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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가를 찾아서 ①]퇴계 이황의 80세 종손이 몸으로 보여주는 공경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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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nbnews 제253호(송년) 대구 = 박정우 기자⁄ 2011.12.20 09:01:11

▲퇴계 이황의 고택. (사진 = 김락현 기자)

‘경(敬)의 마음으로 사람을 빚다’ 경(敬). 겸손과 공경의 뜻이다. 예를 다해 상대를 배려하고 존중한다는 의미다. ‘사람은 사람답게 살아야 한다’고 주장한 조선의 대유학자 퇴계 이황의 정신을 대변하는 말이기도 하다. 퇴계 선생이 안동에 있고, 아들 내외는 서울에서 생활하던 시절. 손자며느리가 종손을 얻었는데 젖이 돌지 않아 애를 먹었다. 마침 안동에 있는 여자 노비가 같은 시기에 애를 낳았다. 그를 서울로 올려 보내 달라는 기별이 왔다. 노비가 주인의 소유물 취급을 받던 과거엔 있을 수 있던 일이다. 하지만 퇴계는 내 아이 살리자고 남의 아이 젖을 끊을 수 없다며 거절했다. 노비의 아이가 좀 자라고 나면 그때나 다시 생각해 보자고 했는데 결국 선생의 종손은 얼마 안 가 세상을 뜨고 말았다. 대를 잇는 것 보다 세상 모든 인간을 존중하는 것이 더 큰 가치였던 것이다. 진정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실천이다. 그 정신은 후손에게 대물림되며 여전히 이어지고 있다. ‘예인조복(譽人造福)’. 사람을 칭찬해 복을 짓는다는 이 글귀는 지금 퇴계 종택을 지키는 16대 종손 이근필(80) 옹이 스스로 지어 평생 신념으로 삼은 말이다. 다른 사람을 칭찬하고 사랑하는 것이 복을 짓는 첩경이란 의미로, 복은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만드는 것이란 뜻을 품고 있다.

▲퇴계 이황의 16대 종손인 이근필(80) 옹. (사진 = 김락현 기자)

11월의 마지막 날 하얀 두루마기를 단정히 차려입고 취재진을 맞은 이 옹은 퇴계 정신의 참된 의미를 묻는 질문에 즉각 답을 하는 대신 무릎 꿇고 두 손 모아 자신이 직접 쓴 이 글을 건넸다. 이근필 종손은 “죽으면 화장해 달라”고 밝혀 세상을 놀라게 만들기도. 그는 “격식 부담 줄여줘야 후손들이 조상을 찾는 전통이 이어지지 않겠느냐?“ 되물어 이 옹은 “입학이나 취업, 사회적 성공을 바라면서 간절히 기도만 한다면 복은 찾아오지 않는다”며 “복은 가만히 앉아서 바라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노력해서 만들어가는 것이란 사실을 강조하고 싶다”고 했다. 또 “사람은 누구나 자기 삶의 주인으로서 스스로 다스려야 한다는 게 퇴계 정신이며, 이런 마음가짐을 서로 실천할 수 있도록 자신을 낮추면서 상대를 배려하는 태도가 바로 경(敬)이라 할 수 있다”는 설명을 덧붙였다. 차를 마실 때도 이야기를 하면서도 자세에 흐트러짐이 없었다. 손자뻘 되는 기자에게 온화하면서도 깍듯한 경어로 예를 다했다. 마음이 불편해 편히 앉으시라 하니 되레 취재진을 편히 앉게 하고 자신은 그 자세 그대로 무릎을 단정히 꿇고 이야기를 이어 나갔다. 이 옹은 노환으로 소리를 거의 듣지 못한다고 했다. 필담(筆談)으로 퇴계 선생의 가르침과 종손으로서의 마음가짐에 관한 질문을 했더니 “듣지 못하는 폐인이라 정신까지 오락가락해서 정확한 답을 드릴 수 없는 점 양해해 달라”는 답이 돌아왔다. 간혹 눈을 마주치지 않고 말을 건네면 소리 낸 사실조차 알아차리지 못할 만큼 청력 손상이 심각한 듯 했으나 말에는 어눌함이 없고 논리가 정연했다. 자신을 끊임없이 낮추면서 상대를 높인다. 겸손과 공경의 덕목을 지키며 사람의 길을 걷고자 했던 옛 선비의 이상적인 모습 그대로다. 얼마 전 그는 자신이 죽으면 화장할 것을 요구해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조상의 묘에서 예를 다하는 것은 유교 문화를 대변하는 상징적 풍습이다. 상식적으로, 평생 성리학을 공부하며 종가를 지킨 종손의 입에서 나올 이야기가 아니다. 이 옹은 “후손이 조상을 잊지 않고 찾는 것은 자신의 뿌리를 기억하는 일인 만큼 후세에도 계속돼야 하는 아주 중요한 일인데 이것이 복잡한 격식 때문에 귀찮은 일이 되는 것 같아 안타까워서 그런 결심을 하게 됐다”고 했다. 묘를 쓰면 해야 할 일이 많다 보니 조상을 찾는 일에 소홀해지거나 아예 찾지 않는 일이 생기더라는 것이다. 그래서 가족이 함께 즐거운 소풍을 가듯이 홀가분한 마음으로 조상을 찾았으면 한다는 것이 화장에 찬성하는 그의 입장이다. 평생 지극정성으로 웃어른을 섬기며 조상에 대한 예를 다해 왔지만 자신은 그것을 되받기를 고집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이 또한 양보하고 배려하는 경의 마음이다.

▲퇴계 이황의 묘. (사진 = 김락현 기자)

“가볍게 살 수 없어 힘들지만…” 유교철학 박사과정의 17대 종손 치억 씨 “왜 이렇게 살아야 하나, 고민도 했는데 이게 운명인가 봐요.” 종손으로 산다는 것. 한 해 제사만 서른 번이 넘을 정도로 수많은 대소사를 치러야 한다. 몸도 마음도 편히 쉬기 힘든 그들의 삶에는 겪지 않고는 상상도 못할 피로와 막중한 책임감이 필수적으로 뒤따른다. 퇴계 16대 종손 이근필 옹의 외아들 치억(36) 씨는 “한시도 가볍게 살 수 없다는 것이 종손으로 살아가는 가장 큰 어려움”이라고 털어놨다. 그는 “학창시절엔 친구들과 어울려 노는 게 좋은 평범한 학생이었고, 가끔은 일탈을 꿈꾸기도 했다”며 “하지만 어디서 무엇을 하든 퇴계 집안의 종손이란 사실 때문에 남의 시선을 의식할 수밖에 없는 것이 힘들었다”고 말했다. 소년은 문학을 좋아해서 대학도 굳이 갈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홀가분하고 가볍게 자신이 하고 싶은 대로 하면서 살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는 현실에 부딪히자 ‘나는 왜 친구들하고 다를까’하는 고민에 빠지기도 했다. 그런 꿈 많고 철없던 소년이 지금은 성균관대에서 유교철학 박사과정을 밟고 있다. 가문의 종손으로서 선조의 가르침을 널리 알리는 일에 열중하고 있는 것이다. 생각이 바뀐 것은 한순간의 일이었다. “유교 문화라는 것이 고리타분해서 현대 사회에는 맞지 않다는데 어째서 지속되고 있을까, 이렇게까지 내려온 데는 뭔가 특별한 게 있지 않을까 하는 궁금증이 문득 들었던 겁니다.” 그를 각성케 한 성리학은 ‘자연을 따라 인간의 길을 찾는 깨어 있는 진보적인 학문’이다. “성리학이 예를 중시하며 차등을 두는 것은 인간의 본질적 차이가 아닌 역할에서의 구분일 뿐입니다. 문제가 있다면 그것을 행하는 사람의 마음에 있는 것이죠. 가장 인간적으로 바람직한 학문이 아닐까 여겼습니다.” 호기심에 시작한 일이지만 자신의 운명으로 알고 열과 성을 다해 성리학의 가르침을 올바로 전하는 데 모든 것을 걸었다. 그리고 언젠가 때가 되면 고향으로 돌아와 가문을 지키는 것이 17대 퇴계 종손의 인생 목표다.

▲퇴계 이황의 묘비. (사진 = 김락현 기자)

도산서원에서 10분 더 들어가면… 공경하는 마음 가르치는 퇴계종택과 선비수련원 경북 안동시 도산면 토계리에 위치한 퇴계종택은 경북 기념물 제42호로 지정됐다. 조선 중기의 대학자 퇴계 이황의 종택으로, 퇴계의 13대 후손인 하정공 이충호가 1926~1929년에 새로 지은 것이다. 이 고택은 5칸 솟을대문과 미음자형 정침이 있고, 우측에 5칸 솟을대문과 한수정이 있으며 뒤에 사당이 있다. 본채인 미음자형 정침은 사랑마당을 면한 사랑채가 전면에 있고 뒤에 안채 부분이 있다. 퇴계종택 바로 뒤에는 울창한 숲이 있는 야산이 있어 경관이 좋고 대체적으로 평탄한 지형에 자리잡고 있어 안정감을 준다. 선비문화를 체험하는 연수시설인 선비문화수련원이 이 숲에 있다. 수련원은 퇴계 선생이 주창한 ‘남을 배려하고 공경하는 마음’을 널리 알려 우리 사회 구성원들에게 올바른 도덕적 가치관을 일깨우는 역할을 하는 곳이다. 종택 건너편에는 계상서당(溪上書堂)이 있다. 계상서당은 퇴계가 풍기 군수를 사직하고 계상에 한서암(寒棲庵)을 짓고 머문 이듬해인 1551년 지어진 작은 건물이다. 퇴계는 도산서당을 지을 때까지 이곳에서 10여 년 간 제자들을 가르치고 ‘주자서절요’ 등을 집필했다. 퇴계가 후학을 가르치던 도산서원이 10여분 거리에 있고 말년에 그가 산천을 벗 삼아 시문을 읊었던 청량산이 또 10여분 거리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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