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지런히 발굴해 놓은 회암사터는 격자형으로 층을 이뤄 엄연한 질서를 느끼게 한다. 한 부분이라도 그 터를 밟아 보고 싶었으나 유적 보호를 위해 허락되지 않는다. 아쉬움을 달래면서 발굴 때 출토된 특이한 발굴품의 사진만 살펴본다. 내년(2012년) 봄이면 실물을 볼 수 있으리라. 청기와도 있고, 맷돌도 있고, 아마도 손오공일 것 같은데… 잡상도 있고, 용과 봉황새를 그려 넣은 기와 수막새와 암막새도 있다. 연호(年號)도 기록돼 있는데 천순(天順) 경진(庚辰)이다. 우리 연호가 없는 아쉬움은 있으나 명나라 영종(英宗) 때이니 세조 6년(1460년)에 새로 불사를 한 흔적임을 알 수 있다. 여기에서도 분명한 것이 여느 절에서는 사용하지 않는 건물 지붕의 잡상(雜像)과 감히 제왕이 아니고서는 사용할 수 없는 용(龍)과 봉(鳳) 문양을 볼 때 행궁(임금이 나들이 때에 머물던 별궁)의 역할을 했음은 기록에서나 출토품에서나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러던 조선 제1의 회암사가 어느 순간 사라져 간 것을 생각하면 아쉬움을 쉽게 떨칠 수가 없다. 이제 회암사로 향한다. 회암사터에서 천보산(天寶山)을 향해 오르다 보면 ‘회암사’라 부르는 절 하나가 있다. ‘옛 회암사 본가’가 없어졌기에 회암사(檜巖寺)란 이름으로 그 정신을 잇고 있는 것이다. 순조 28년경(1828년) 세워진 절이다. 들리기로는 옛 회암사에는 9개의 부속 암자가 있었다 한다. 현재의 회암사는 아마도 그 암자 자리 중 하나가 아니었을까. 회암사는 이곳이 그 옛날 ‘절골’이었음을 알리는 안내석을 지나 휘어진 길로 접어들면 비스듬 언덕 위쪽에 있다. 6.25에 대부분 소실된 터를 넓히고 모두 새로 건물을 세웠다. 그러니 고풍스러운 회암사에 대한 기대는 아예 접고 오르시라. 다행히 조사전(祖師殿) 안에는 1755년 창평 용흥사에서 발원한 아담한 목조여래좌상이 모셔져 있다. 경기 유형문화재 206호인데 이렇게 제작 연대와 출처를 분명히 알 수 있는 유물들은 시대를 판정하는 기준이 되기에 중요한 자리를 점하는 조상의 선물인 것이다. 또한 조사당 벽에는 고려의 지공(指空) ~ 나옹(懶翁) ~ 조선의 무학(無學)으로 이어지는 선종(禪宗) 세 화상(三和尙)의 진영(眞影: 초상화)이 있다. 이 세 분이 고려 말 이후 이 땅 불교의 법맥(法脈)이다. 천보산 한 줄기가 내려와 좌우로 갈라지며 작은 두 능선을 만드는데 그 사이 아늑한 땅이 지금의 회암사 자리다. 암사를 품고 있는 좌우의 능선에는 지공, 나옹, 무학 세 화상의 부도와 비석이 있다. 일반인들 기준으로 본다면 세 화상의 무덤이 여기에 있는 셈이다. 그런데 이상하게 부도와 비석들이 온전하지가 않다. 비석들은 아래를 받치는 귀부(龜趺)만 있고 비신(碑身)이 없거나 새로 만들어 세웠다. 우측 능선에는 선각대사(나옹)의 비가 있는데 비신은 없고 귀부마저 온전치 못하다. 그나마 새로 새겨 세워 죄송함을 달래고 있다. 청산은 나를 보고 말없이 살라하고 靑山兮要我以無語(청산혜요아이무어) 창공은 나를 보고 티없이 살라하네 蒼空兮要我以無垢(창공혜요아이무구) 사랑도 벗어놓고 미움도 벗어놓고 聊無愛而無憎兮(료무애이무증혜) 물같이 바람같이 살다가 가라하네. 如水如風而終我(여수여풍이종아) 이렇게 살다간 그 분에게 흔적이 무슨 소용 있으랴? 그러함에도 인륜으로 차마 볼 수 없는 일이 발생했다. 좌측 능선에는 지공, 무학의 부도와 비석이 있고 나옹의 부도가 있다.
순조실록(純祖實錄) 21년(1821년) 7월 조를 보자. “광주(廣州)의 유학(幼學) 이응준(李膺峻)이 양주 회암사 부도와 비석을 파괴하고 사리를 훔친 후 그곳에다가 자신의 아버지를 묻었다. 지공·나옹·무학 세 선사의 부도와 사적비(事蹟碑)가 회암사 북쪽 산비탈에 있었는데, 무학의 비석은 곧 태종의 분부를 받아 글을 지어 세운 것이다. 경기 관찰사가 이 사실을 장계로 아뢰자… (廣州幼學李膺峻, 碎破楊州、檜巖寺浮圖及石碑, 偸竊舍利, 仍葬其親於其地. 蓋指空、懶翁、無學三禪師浮圖及事蹟碑, 在於寺之北厓, 而無學碑, 卽太宗朝奉敎撰立者也. 因畿伯狀…)” 이응준은 섬으로 귀양가고 부도는 제 자리로 돌아 왔으나 깨어진 비문은 모두 복원되지 못하고 귀부만 상처 입은 채 세월에 늙어 간다. 이 일로 지금의 회암사가 부도가 있는 능선 아래에 자리 잡게 됐다. 이제는 부도와 비가 모두 보물과 유형문화재로 인정받게 됐으니 행여 느끼는 것이 있다면 석물(石物)인들 감회가 깊지 않겠는가. 고려조 목은 이색(李穡) 선생은 회암사에서 시 한 수를 읊었다. 회수창창석세완(檜樹蒼蒼石勢頑: 회암사 숲 우거지고 바위 기운 단단한데) 엽간풍우반천한(葉間風雨半天寒: 잎 사이 비바람에 하늘은 차구나) 노승출정망성색(老僧出定忘聲色: 노승은 선정 끝에 세상사를 잊었는데) 두상광음주사환(頭上光陰走似丸: 눈 앞 세월은 구르는 구슬 같네) 세월은 정말로 구르는 구슬 같아서 회암사의 아픔도 모두 잊혀졌다. 세월이 모든 것을 감싸 그냥 바람 속으로 날려 버린 것이다. 무심(無心)으로 돌아 온 회암사터를 뒤로 하고 천보산으로 오른다. 나지막한 산(423m)에 바위가 우뚝하여 밧줄도 매어져 있다. 산세가 만만치 않다. 목은(牧隱)선생도 이 산을 오르셨기에 바위 기운이 만만치 않다(石勢頑) 하셨겠지. 잠시 밧줄을 잡고 오르니 암반이 나타난다. 뒤돌아보니 시야가 확 트인다. 회암사터, 회암사, 회암동이 눈 아래 있다.
동북쪽으로는 포천의 들판이 가까이 보인다. 이곳 43번 도로를 따라가면 철원 지나 김화, 평강으로 이어진다. 조선시대에는 이 길로 김화 지나서 회양 거쳐 철령(鐵嶺)을 넘어 함경도로 들면서 함흥 거쳐 두만강변 서수라까지 가는 길이 관북대로(關北大路) 곧 경흥대로(慶興大路)였다. 태조 이성계도 아들(방원)에게 또 다른 아들(방석)이 죽임을 당하는 차마 보지 못할 꼴을 보고 함흥으로 간 그 길이 바로 저 길일 것이며, 두만강 쪽 여진의 사신도 많은 경우 이 길을 지나갔을 것이다. 삼국사기를 보면 이 땅은 말갈(靺鞨)의 땅이었으며, 백제의 땅이 됐다가 고구려의 땅이 되고 다시 신라의 땅이 됐다. 땅에 주인이 따로 있겠냐마는 내 마음에는 이 지역에 오면 언제나 이곳은 궁예(弓裔)의 땅이라는 생각이 먼저 고개를 든다. 신라 효공왕 5년(901년)에 스스로 왕을 칭하고 후고구려를 세운 사람. 그 시대에 감히 외람되게 무태(武泰)와 수덕만세(水德萬歲), 정개(政開)라는 연호로 건원(建元)했던 진보주의자 궁예. 호족 연합세력 같은 미지근한 국가체제를 버리고 과감히 왕권을 강화하려던 사람. 역사는 이긴 자들의 스토리라서 고려인들은 그를 너무 폄훼한 것은 아닌지. 부하인 왕건(王建), 홍유, 배현경, 신숭겸, 복지겸, 유검필 등에게 졸지에 배신당해 철원을 버리고 이곳 포천 보가산성으로 패주해 왔던 사람. 보가산성에서도 부하들에게 패해 성동리성에서 마지막 저항을 했던 사람. 그 뒤에는 역사에서 사라진 사람, 전설로 패주골이라는 지명을 남기고 산에 들어 울었다며 명성산(鳴聲山)이라는 슬픈 산 이름으로 남아 있는 사람. 언젠가는 철원 비무장지대 안에 있는 태봉국의 왕궁터와도 만나고 싶고 궁예의 참모습과도 만나고 싶다는 희망을 가지고 천보산 능선을 간다. 아들이 아들의 칼에 죽는 못볼 꼴을 본 태조 이성계가 함흥으로 가던 길이 바로 이 길일 것이며, 진보주의자 궁예가 부하들에게 패하면서 산속에서 울었던 곳(명성산)이 바로 이곳 아닐까 ‘천보산 제5보루’를 만난다. 길 옆 작은 봉에 무너져 내리는 석축이 있다. 안내판에 고구려 토기가 발굴된 보루(堡壘: 방어 또는 후망하던 진지)라고 한다. 이 곳 천보산 주변만 해도 여러 개의 보루가 있다. 보루의 역사는 적어도 160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알 수가 있다. 한강과 그 이남을 통치하던 백제는 371년 근초고왕 때 고구려의 평양성을 공격해 고국원왕을 전사시킨다. 이때 이후 임진강(臨津江) 이남은 확실한 백제의 땅이 됐다. 백제는 임진강 이남에 방어용 성과 보루를 구축한다. 그러기를 100여년 백제의 전성기였다.
그러나 고구려의 걸출한 임금 광개토대왕과 장수왕이 나타나면서 판도는 바뀐다. 급기야 475년(장수왕) 고구려는 백제를 공략해 개로왕을 생포하고 처형한다. 100년 만에 고국원왕의 원한을 푼 것이다. 힘에 밀린 백제는 웅진으로 도읍을 옮기고 고구려는 계립령 ~ 죽령, 순흥 지역까지 영향권에 넣는다. 그리고는 새로 확보한 임진강과 한강 사이 지역 방어망을 구축한다. 이때 구축한 보루들이 임진강과 한강 사이 지역에 산재한다. 이곳 천보산, 도락산, 불곡산, 감악산, 고장산, 노고산, 소래산, 테미산, 사패산, 수락산, 불암산, 용마산, 아차산 등 지금까지 40여 곳이 발견됐으며, 앞으로 더 많이 발견될 것이다. 아쉬운 것은 보존이 잘 이뤄지지 못하고 시민들에게 역사적 중요성을 잘 알리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후 백제는 신라와 나제동맹을 맺고 고구려를 공략해 한강가를 회복한다(551년). 그러기도 잠시 신라 진흥왕은 한강변 여러 성을 공략해 탈취하고(553년) 여러 곳에 방어 기지를 구축한다. 이 때 세운 비가 북한산 순수비(北漢山巡狩碑)이다. 지금도 보루에서 백제, 고구려, 신라의 흔적들이 함께 발견되는 것은 세 나라의 뺏고 빼앗긴 피나는 역사의 흔적이다. 이처럼 우리 역사에서 한강과 임진강 사이 지역은 가장 다이내믹했던 역사의 현장이었다. 그러면 이 지역에서의 다이내믹한 역사는 마무리된 것이었을까? 아니다. 120여년(675년) 뒤 이곳 양주에서 대대적인 전투가 벌어졌으니 이른바 나당전쟁(羅唐戰爭)이었다. 신라는 당나라의 힘을 빌려 고구려와 백제를 멸망시켰다. 두 나라가 멸망한 뒤 당나라는 고구려, 백제 땅은 물론 신라도 그들의 지배하에 두려 했다. 신라를 계림대도독부(鷄林大都督府)로 당나라의 일개 지방 행정단위로 고치고 문무왕을 계림주대도독으로 임명한다. 가당키나 한 일이던가? 신라는 백제, 고구려의 유민들과 힘을 모아 당나라와의 전쟁에 돌입했다. 675년 이 곳 양주벌 매소성(買宵城: 불곡산 아래 대모산성 또는 양주 구읍)에서 당의 20만 대군을 꺾음으로써 대전(大戰)은 막을 내리고 이듬해 금강에서 수군을 물리치는 것으로 전쟁은 마무리됐다. 천보산 길에서 남서쪽 들판 그 어딘가가 그 날의 전쟁터였을 것이다. “잘 하셨습니다. 형님들!” 이 땅의 남자로서 전 시대를 살다간 이 땅의 남자들에게 경의를 표한다. 고구려에 밀린 백제가 이곳 천보산 등에 방어선을 구축하고, 당나라 힘을 빌려 이 땅을 차지한 신라는 한반도 전체를 차지하려는 당나라의 야욕에 맞서 천보산 남서쪽 들판에서 대승을 거두니… 천보산 능선길은 아늑하고 편하다. 남쪽 가파른 바위에 비해 능선과 뒤쪽(북쪽)은 편안한 흙길이다. 20여분 지났을까, 해룡산 갈림길에 닿는다. 여기서 길은 북으로 해룡산 ~ 왕방산 ~ 국사봉에 이르고, 한 쪽 길은 소요산 지나 신천으로 떨어지는 소요지맥이 되고 또 한 줄기는 개미산 지나 영평천으로 떨어지는 왕방지맥이 된다.
한북정맥 축석령에서 양주, 포천, 동두천, 연천으로 이어지는 산줄기가 왕방·소요지맥이다. 명소로 알려진 신북온천과 열두개울은 국사봉에서 갈라지는 두 산줄기 품에 있는 명소인 것이다. 이제 장림고개를 향해 오던 길을 계속 나아간다. 이 길이 동두천 일주 43km MTB(산악자전거) 코스에 포함된 구간이다. 산악자전거가 다닐 수 있는 길이니 얼마나 편한 길이겠는가. 어렵지 않게 장림고개에 닿는다. 산에 오른 지 1시간 30분 정도 걸린 셈이다. 여기에서 남쪽으로 내려가면 회암리 마을 30-1 버스 종점에 닿는다. 고개 앞 가파른 길을 통해 칠봉산(七峰山)을 오른다. 아기자기한 7개 봉우리가 병풍처럼 펼쳐져 있어 칠봉산이다. 산세는 앞쪽은 병풍처럼 깎아진 바위, 뒤 쪽은 편안한 흙산이라 일명 금병산(錦屛山)이다. 전설로 세조가 올라 사냥했다고 해서 어등산(御登山)이라고도 하는데 대동여지도에는 어등산(於登山)으로 기록돼 있다. 편안한 7개 봉우리가 이어진다. 솔리봉(수리봉), 돌봉(칠봉산 정상), 투구봉, 석봉, 깃대봉, 매봉(응봉), 발리봉이다. 칠봉산 정상에서 40여 분 능선길을 가면 대도사 갈림길을 만난다. 대도사 방향으로 가면 송내동으로 내려가 1호선 지행역을 이용해야 한다.
이곳 대도사 하산 길에는, 대도사에서 20여 분 아래 농장 길에 의미 있는 기념비와 만난다. ‘유행성출열혈 병원체 발견 기념비’다. 유행성출열혈의 병원체를 세계 최초로 규명한 대한민국의 이호왕 박사 연구팀이 등줄쥐를 잡은 곳이 바로 이 곳이었다. 그 바이러스 이름이 ‘한탄 바이러스’인데 그 쥐는 한탄강에서 잡은 게 아니라 한탄강 수계 최상류인 칠봉산 자락에서 잡았다는 것을 이곳에 와서 알게 됐다. 오늘은 천보 ~ 칠봉 종주를 위해 직진한다. 직진 길은 갈림길에서 좌측 길을 택하면 무리가 없다. 이윽고 30여 분 뒤 개가 심하게 짖어대는 밭둑길에 닿는다. 산길 4시간이 걸린 셈이다. 바로 큰 길과 만나는데 길을 건너면 봉양4거리 버스정류장이다. 의정부 방향으로 나오는 버스 노선이 많다. 오늘은 의정부 부대찌개 거리에서 막걸리 한 잔 해야겠다. - 이한성 동국대 교수 교통편 ·1호선 전철(가능역, 의정부북부역, 양주역) ~ 30-1번 버스 환승 ~ 회암교(김삿갓교) 하차 ·또는 1호산 전철 덕정역 하차 ~ 78번 마을버스 ~ 회암2교 하차 ·수유로, 도봉로, 의정부 간선도로에서 902 좌석버스를 타고 천보3거리에서 내려 걸어가도 되지만 걷는 거리가 길다. 답사코스 김삿갓교 ~ 회암2교 ~ 회암사지 ~ 회암사 ~ 천보산 ~ 해룡산 갈림길 ~ 장림고개 ~ (짧은 코스를 택하려면 여기서 ~ 회암동 하산 ~ 30-1버스 종점) ~ 송전탑 ~ 칠봉산 ~ 대도사 갈림길 ~ 봉양4거리 ※‘이야기가 있는 길’ 답사에 독자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매월 마지막 토요일에 함께 모여 서울 근교의 마애불과 문화유적지 탐방을 합니다. 3, 4시간 정도 등산과 걷기를 하며 선인들의 숨겨진 발자취와 미의식을 찾아갑니다. 참가할 분은 comtou@hanmail.net(조운조 총무)로 메일 보내 주시면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