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 변호사가 반도체 기술 설명하면 판사가 믿겠어요?” 재판부 앞에서 기술 설명회를 앞두고 한 대선배는 이렇게 직설적으로 말했다. 조금 전달력이 떨어져도 기술 설명만은 전문가가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사실 변리사들도 대학에서 전공 공부를 마친 정도로는 그 분야의 최첨단 기술을 다루는 특허 기술을 이해하기가 쉽지 않다고 하소연한다. 변리사와 몇 달간 집중적으로 고생하는 동안 변호사들도 전문가 수준으로 해외 논문지에 실린 연구 논문을 읽고 이해할 수준이 되긴 한다. 하지만 내가 아무리 논리 정연하게 잘 설명한다고 하더라도 나의 경력을 뻔히 아는 재판부는 나의 말을 크게 신뢰하지 않을 것이라는 선배들의 신랄한 지적이 백 번 옳다고 생각했다. 특허 소송에 있어 변호사의 역할은 전문가의 언어를 일반인의 언어로 통역해 내는 것이었다. 2011년 7월 남아공 더반에서 IOC 총회가 열렸다. 당시 동계올림픽 유치를 위한 프레젠테이션을 보면서 나는 특허 소송 변호사 시절을 떠올렸다. 그 당시 외국의 유명 컨설팅 회사의 도움을 받아 프레젠테이션 팀과 내용을 짰던 우리 팀은 내용도 좋았지만, 팀의 구성과 각 구성원에게 맡겨진 역할이 무척 설득력 있었다. 영어와 불어에 능통한 나승연 씨는 도입과 마무리를 맡고, 김진선 전 지사는 동계올림픽 유치를 위해 그간 들였던 노력을, 박용성 회장과 조양호 위원장은 경기 준비 과정을 설명했다. 대통령은 우리나라의 동계올림픽 참여 역사를 들며 동계 스포츠의 변방에서 중심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줄 것을 호소했다. 특히 당시 프레젠테이션에서 빛난 건 세 명의 운동선수들이었다. 김연아, 문대성, 토비 도슨. 이들이 팀원으로 있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빛이 났다. 이 사람들의 존재는 뮌헨과 낭시가 오랜 동계 스포츠 역사를 통해 쌓아 온 최첨단 기술과 장비, 물적·인적 자원을 모두 능가해버렸다. 이 세 사람은 하나같이 “저 사람은 저런 이야기를 할 만하다”는 이야기만 했다. 문대성 의원의 사람 끌어들이는 리더십 평창으로 결정이 난 후 시내 한 호텔에서 IOC 위원들을 초청한 리셉션을 열었다. 나는 문대성 위원과 함께 우리를 지지해준 IOC 위원들에게 감사의 인사를 하러 다녔다. 문대성 위원의 활약상에 대해서는 익히 언론의 보도를 통해 알고 있었지만, 실제로 옆에서 보니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위원 한 명 한 명을 내게 소개하면서 아주 작은 한국말로 그 사람이 영어를 잘하는지, 성향은 어떤지, 과거에 무엇을 했던 사람인지를 감쪽같이 알려줬다. 슬쩍 보기만 해도 그 사람들이 문 위원을 얼마나 좋아하는지 느낄 수 있었다. 나이가 지긋한 위원들은 문 위원에게 “이제는 우리 모두 같은 친구인데 너무 어른 대하듯 깍듯이 인사하지 말라”는 말까지 했다.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문 위원의 친화력은 대단했다. IOC 총회의 각종 리셉션장에서 보였던 김연아 선수의 위력은 말할 나위도 없다. 기라성 같은 IOC 위원들조차 김연아 선수와 사진을 찍고 싶어 했다. 그녀는 은반 위에서뿐 아니라 회의장에서도 요정이었다. 문대성이나 김연아는 운동선수가 아닌 일반인이었다 해도 사람을 끄는 매력이 있는 사람들이다. 하지만 운동선수가 아니었다면 그들의 매력이 이만큼의 엄청난 파워를 지닐 수가 없다. 그들의 파괴력은 운동선수로서 이루기 어려운 성적을 냈다는 사실뿐만 아니라, 치열한 훈련과 경쟁의 과정을 우아하게 겪어 냄으로써 그 많은 금메달리스트 중에서도 세계인의 사랑을 받은 실적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행사를 마치고 문 위원과 이야기를 나눴다. IOC 위원으로 활동하다 보니 우리가 세계 스포츠계에 지속적인 영향력을 갖고자 하는 노력이 턱없이 부족하다는 점을 느꼈다고 그는 말했다. 이제부터라도 체계적으로 운동선수 출신의 인재들을 세계기구에서 일하도록 준비하지 않으면 스포츠계에서의 우리 영향력은 단발성 이벤트에 그치고 말 것이라는 걱정도 했다. 우리의 스포츠 진흥 정책이 ‘좋은 기록’을 내는 데 집중됐으며 이후 운동선수들의 복지를 위해 연금을 주는 수준에 머물고 있다는 비판이 나온 지 한참이나 지났다. 운동선수들은 웬만해서는 30대를 넘어서 현역에 남기가 쉽지 않다. 그 나이면 일반인들은 공부를 마치고 일을 시작할 때인데 말이다. 남들은 시작할 나이에 은퇴하는데… 1986년 서울 아시안게임에서 유남규와 현정화 두 선수의 탁구 게임은 정말 환상이었다. 당시 전문가들은 우리가 앞으로도 중국을 계속 이길 수 있으리란 보장이 없다고 했다. 중국에는 유남규, 현정화 같은 어린 꿈나무들이 수도 없이 많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중국은 많은 인구 덕분에 두각을 나타내는 아이들을 뽑아 훈련을 시켜 올라가다 보면 무수히 많은 아이들이 탈락해도 충분한 숫자의 선수 풀이 남게 된다. 하지만 우리 형편은 그렇지 못하다. 애지중지 소수정예를 훈련시켜 좋은 성적을 낼 수밖에 없는 현실에서 우리 선수들은 경기에서 좋은 성적을 내는 것 외에 개인 공부에 신경 쓸 여력이 없다.
현역으로 뛰던 선수들이 은퇴 후를 준비하며 숨을 고르는 걸 본 적이 있는가? 운동선수들에게 그런 호사를 부릴 여유는 없다. 그들은 죽을힘을 다해 시합을 하다가 돌연 은퇴를 한다. 이기고 은퇴하면 멋지고, 지고 은퇴하면 안타까운 게 운동선수의 운명이다. 훈련과 시합 이외에 다른 것은 생각해볼 여유가 없던 선수들은 은퇴와 더불어 공황상태가 되고, 남이 도와주지 않으면 어디서부터 무엇을 해야 할지 막막한 게 당연하다. 그런데 남들이 일을 시작할 때에 은퇴해야 하는 운동선수들의 제2의 삶에 대해 우리는 너무나 무심하고 둔탁하다. 베이징 올림픽 개막식에서 줄타기의 묘기를 선사한 중국의 체조선수 리닝. 1982년 세계체조월드컵 6관왕이었던 그는 은퇴 후 스포츠의류 사업을 이끌었다.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에 참가한 중국 대표선수단 251명은 그가 대표로 있는 기업 리닝의 유니폼을 입었다. 중국 정부가 그 선수의 은퇴 뒤 사업과 그 시장까지 보장해준 것이었다. 우리 선수들은 부러운 눈으로 그 광경을 지켜봐야 했다. 탁구 선수 덩야핑. 그는 국비로 영국 케임브리지 대학 연수를 갔다. 졸업 후 스포츠 국제 외교에 몸담아 현재는 중국 인민정치협상회의에서 일하고 있다. 중국에서는 운동선수가 체육부 차관, 체육부 장관 자리에 임명되기도 한다. 선수촌의 관리직, 선수단의 임원들도 운동선수 몫이다. 운동선수가 최고의 성적을 낼 때까지만 국가가 노력을 들이는 게 아니다. 은퇴 후의 성공적인 안착을 국가에서 책임져 주지 않는다면 누가 자신의 젊음과 삶을 희생하며 운동선수의 길을 걸으려 하겠는가. 특히 상업적인 성공을 기대하기 어려운 비인기 종목의 운동선수일수록 그들의 특장점을 살려 일하고 기여할 수 있는 길을 터줘야 한다. 훈련 과정에서 선수의 기록을 관리하는 치밀한 프로그램처럼, 은퇴 준비 프로그램도 선수마다 정교하고 구체적으로 마련하지 않으면 이제까지처럼 형식적인 전시 행정이 되고 말 것이다. 국내 생활체육은 국가와 지자체 재정을 통해 무척 활성화되고 있다. 엘리트 체육인들이 은퇴 후 후학을 가르치는 일 외에도 생활체육의 요로에서 국민의 사랑을 계속 받으며 뛰어난 기량을 발휘할 수 있도록 길을 터줘야 한다. 탁구의 여왕이었던 이에리사 선수가 있었기 때문에 유남규, 현정화 같은 금메달리스트들이 나왔고, 전국에 탁구 붐이 일어날 수 있었다. 그 결과 탁구 인구가 늘어났으며, 우리의 탁구선수 풀도 넓어졌다. 이에리사 선수는 벌써 2년째 한국과 호주에서 이에리사배 탁구대회를 열고 있다. 태릉선수촌 제17대 촌장(2005년 3월~2008년 9월)을 맡아 리더십도 입증했다. 하지만 개인기에서 비롯된 성공 사례를 넘어 제2, 제3의 이에리사를 만드는 제도가 있어야 건강한 체육생태계가 된다. 우리에게는 화려한 선수에게 실속 있는 은퇴를 선사할 의무가 있다. - 조윤선 의원(한나라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