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을 대표하는 작가 중 하나인 김환기 화백의 탄생 99주년을 맞아 대규모 회고전이 1월 6일부터 2월 26일까지 서울 사간동 갤러리현대에서 열린다. 이번 전시회는 2004년 이후 8년 만에 열리는 대규모 회고전이다. 그런 만큼 공공 미술관에서 볼 수 없었던, 숨겨진 주옥같은 대표작을 엄선하고 모으는 데만 1년이 소요됐다고 한다. 이번 전시를 맞아 김환기의 작품 세계를 정리한다. 한 자리에서 보기 힘들던 김환기 화백의 시대별 대표작을 한꺼번에 만나는 자리로, 대가의 육십 평생을 작가적 행보와 작품의 흐름을 통해 한 눈에 볼 수 있다. 앞으로 당분간 만나기 힘든 전시로 평가받는 이유다. 이번 전시에는 특별히 '메아리(1964년)' '귀로(1950년대)' '항아리와 꽃가지(1957년)' '무제(1964-65년)' 등 50, 60년대 미공개작 4점이 출품된다. 1930년대부터 63년까지의 구상 작품 30여점은 본관에, ‘뉴욕 시대’로 일컬어지는 1963~1974년 사이의 추상작품 30여 점은 신관에 각각 선보인다. 김 화백이 20대 중반에 제작한 1930년대 작품부터, 1974년 작고 직전의 작품까지 망라된 이번 회고전은 많은 개인 소장자들의 도움과 협조로 가능했다는 후문이다. 잠잘 때를 제외하고 하루 16시간 이상 작업하는 데 몰두했던 김환기(1913~1974년)는 열정적인 삶의 자세, 그리고 구상-추상의 경계를 아우르는 작품 활동으로 동시대와 후대에 큰 영향을 주었다. 그는 한국 현대미술의 독보적인 존재이면서도 동시에 가장 많은 작품을 후대에 남긴 작가이기도 했다.
미공개작 4점 포함해 엄선한 대표작 64점 선보여. 한국 근대회화의 추상적 방향을 열며 독창적 세계를 구축. 〃나는 동양 사람이요, 한국 사람이다. 내가 아무리 비약하고 변모하더라도 내 이상의 것을 할 수는 없다. 내 그림은 동양 사람의 그림일 수밖에 없다. 세계적이려면 가장 민족적이어야 하지 않을까. 예술이란 강력한 민족의 노래인 것 같다. 나는 우리나라를 떠나 봄으로써 더 많은 우리나라를 알았고 그것을 표현했으며 또 생각했다. 파리라는 국제 경기장에 나서니 우리 하늘이 역력히 보였고 우리의 노래가 강력히 들려왔다. 우리는 우리 것을 들고 나갈 수밖에 없다. 우리 것이 아닌 그것은 틀림없이 모방이 아니면 복사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김환기는 1913년 전라도 신안군 기좌면(안좌면)에서 부농 김상현의 외아들로 태어났다. 서울 중동중학에 진학했으나 1931년 바로 일본 도쿄의 니시키시로 중학에 입학했고, 이어 1933~1936년 일본대학 예술학원 미술학부를 입학-졸업했다. 당시 도쿄의 실험적인 미술 분위기에 영향을 받으면서 김환기는 추상미술을 시도하기 시작했고 1936년 도쿄의 아마기 화랑에서 첫 개인전을 가졌다. 이 무렵의 작품들은 대부분 없어졌지만 현재 남아 있는 '론도'나 '창' 같은 작품에선 곡선과 직선, 기하학적 형태들로 구성된, 당시 한국 화단에서는 거의 볼 수 없었던 회화가 대담하게 시도됐음을 알 수 있다. 한국 추상회화의 선구적 화가로서 그의 초기 역할을 확인하게 만드는 작품들이다. 1930년대 도쿄에서 벌어지던 새로운 추상미술에 매혹된 일종의 실험 시기였다면 이어 1950년대는 무언가 우리 것을 그려야 된다는 자각이 움트는 시기다. 이 무렵 그의 그림에 많이 등장하는 소재는 산, 달, 학, 매화, 조선시대의 백자 등이다. 전통적 소재로 전환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그의 작업은 1956년 파리에 가면서 더욱 심화됐다. 파리에 간 지 1년 만에 제작한 '영원의 노래'가 이 시기의 대표작이다. 그의 풍경화는 대부분 푸른색으로 일관된 색채를 보인다. 당시 그는 어느 프랑스 방송국과의 인터뷰에서 〃한국의 하늘과 동해바다는 푸르고 맑으며 이러한 나라에 사는 한국인은 깨끗하고 단순한 것을 좋아한다〃고 말했다. 아마 그에게 푸른색은 우리나라를, 아니면 작가의 마음 상태를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
인간적 매력, 멋을 지닌 예술가 1959년 파리에서 귀국한 김환기는 미술 교육에 몰두하며 여러 번 개인전을 가졌다. 그러다 1963년 10월 상파울루 비엔날레에 커미셔너 자격으로 참석한 뒤 뉴욕으로 건너가 11년에 걸친 뉴욕 생활을 시작했다. 뉴욕에 정착한 뒤부터 1970년 이전의 작품들은 숫자로 된 제목을 가진 경우도 많지만 아직은 '겨울의 새벽별', '봄의 소리', '아침의 메아리' 등 계절과 시간 또는 음향을 느끼게 하는 소제목을 곁들인 경우도 많다. 이는 기본적으로 그의 작품이 자연에 대한 서정적 반응에서 출발함을 알게 해준다. 1967, 1968년부터는 그의 작품에서 형태가 서서히 해체되기 시작한다. 1970년에서 그가 타계하는 74년까지는 그의 절정기였다. 1970년에 출품한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는 제1회 한국미술대상전에서 대상을 받으면서 국내 미술인들을 놀라게 했다. 1974년에 그린 대부분 작품들은 이전 작품에서 보이던 깊이 빨아들이는 푸른색에서 회청색으로 변해 뉴욕 시기의 작품 중에서도 가장 우울한 느낌을 준다. 작가는 자신의 죽음을 무의식적으로 알고 있었을까, 그는 그 해 7월 7일에 입원하고 수술을 받았으나 끝내 회복하지 못하고 7월 25일 뉴욕의 한 병원에서 홀연히 세상을 떠났다. 전시 문의 02-2287-3500.
자는 시간만 빼고 작업 계속한 ‘한국의 피카소’ 구상·추상 넘나들며 한국적 감성을 끝까지 추구 박수근, 이중섭, 장욱진 등과 함께 한국 근현대 미술의 대가로 손꼽히는 김환기 화백은 한국 모더니즘 미술의 제1 세대로서 한국 근대 회화의 추상적 방향을 여는 데 선구자 역할을 한 것으로 평가된다. 낯선 곳에서 접한 새로운 문화를 '우리 것'의 뿌리 위에서 접목한 선구자로서, 동양의 직관과 서양의 논리를 결합한 그림을 구상과 추상으로 구현했다. 산, 달, 학, 매화, 백자 같은 동양적 소재를 서양적 기법으로 표현한 구상부터, 점ㆍ선ㆍ면 등 단순하고 상징화된 추상 작품까지 다양한 형식과 내용으로 독창적인 한국미의 세계를 구축했다. 하루 종일 작업에만 매달리는 열정적인 삶의 자세, 구상과 추상의 경계를 아우르며 동시대와 후세에 큰 영향을 준 작품 활동, 그로 인해 한국 현대미술 사상 가장 독보적인 존재로 우뚝 선 김 화백은 많은 작품을 남긴 ‘다작 화가’로도 유명하다. 그의 유작은 3000점 이상으로, 이중섭 화백(총 5백여 점 이하 추정), 박수근(유화 2백여 점 포함해 총 1000여 점 이하로 추정)과 비교해 보면 가히 압도적이다. 왕성한 작품 활동으로 한국 미술사에 중요한 족적을 남긴 그에게 붙여진 '한국의 피카소'라는 별명이 잘 어울림을 알 수 있다. 한국 근현대미술을 대표하는 대부분 작가들이 구상 또는 추상 중 한 가지의 작품을 보인 반면, 구상과 추상을 아우르는 그의 작품 세계는 한국 근현대 미술사에서 독보적 위치를 점하면서 학술적으로도 중요한 의미를 지녔기에 많은 연구가 이뤄지고 있다. 초기 구상 작품에서 후기 추상 작품으로 이어지는 흐름이 매우 도드라지면서도 자연스러운 통일감을 지닌다는 것이 김환기의 신비로운 점이기도 하다. 서양적 표현방식이라는 바탕에 한국적 소재와 정체성을 그렸기에 그만의 독특한 개성이 나타난 것으로 해석되기도 한다. 김환기의 작품 세계에 대해 서울대 김영나 교수는 "그의 작품들을 보면 서양적 기법을 사용해 동양적 정체성을 어떻게 그리는가 하는 데 평생 관심을 갖고 추구했음을 알 수 있다. 만년의 작품에 보이는, 캔버스의 올을 물들여가는 듯 번지는 화법은 오랜 서양화 기법의 연마를 통해 다다른 수묵화적 기법임을 알게 해 준다. 누구보다 앞서서 선구적 추상화가로 시작했고 또 서양 미술의 경험이 풍부한 김환기였지만 마지막에는 자연과의 교감을 바탕으로 동양적 추상의 세계에 도달한 것"이라고 해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