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통합당의 지난 1월 15일 전당대회에서 한명숙 전 국무총리가 신임 당 대표로 선출됨에 따라 집권 여당인 한나라당과 제1야당인 민주통합당 그리고 통합진보당(공동대표 유시민·심상정·이정희)의 대표가 모두 여성으로 채워졌다. 헌정사상 최초로 국회 교섭단체(국회의원 20명 이상) 요건 갖춘 정당의 여야 대표가 여성에 의해 장악되면서 여의도 정치권이 ‘여풍(女風) 당당’ 시대를 맞았다. 우리 역사상 최초의 여성 당 대표는 1965년 통합 야당인 민중당의 고(故) 박순천 대표였으며 이후 2004년 한나라당 박근혜 비대위원장이 당대표를 맡은 바 있다. 특히 국회 교섭단체 요건을 갖춘 여야(與野) 대표가 모두 여성인 것은 헌정(憲政) 사상 처음 있는 일이다. 이로써 200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한국 정치사에서 비주류로 여겨지며 들러리 정도만 평가되었던 여성 정치인들이 이제는 여의도 정가의 핵으로 떠오르며 바야흐로 주류로 당당히 자리매김한 현상을 보이고 있다. 무엇보다 관심을 끄는 것은 집권 한나라당의 사실상 당 대표 역할을 맡고 있는 박 비대위원장과 정권 탈환을 노리는 민주통합당의 새로운 수장인 한 대표 간의 대결이다. 가깝게는 4월 총선에서, 멀게는 오는 12월 대선에서 불가피하게 대척점에 서게 될 진검 승부를 벌일 것으로 보인다. 인생의 상당 부분을 대통령의 딸로 살아온 박 비대위원장과 재야여성 운동가 출신의 한 대표는 다른 인생을 살아오다가 이제는 총선과 대선이라는 외나무다리에서 만난 격이다. 박근혜-한명숙 총선과 대선서 ‘진검승부’ 불가피 박 비대위원장은 지난 2004년 탄핵 후폭풍 속에서 한나라당의 구원투수로 등판해 천막당사까지 전전하면서 노무현 정부 시절 재·보선에서 ‘40대 0’의 신화를 만들어내는 등 강력한 정치적 존재감을 내보였다. 이런 능력을 바탕으로 이명박 정부 이후 ‘보수 재집권’의 희망이 된 지 오래다. 한 대표 역시 1970년대부터 옥고를 치르며 투신한 민주화 운동 경험으로 김대중 정부에서 여성부ㆍ환경부 장관을 거쳐 노무현 정부 때인 2006년에는 헌정 사상 첫 여성 총리로 임명되면서 한국 정치사에 한 획을 그은 인물이다. 정치권에 혜성처럼 등장한 뒤 한 대표는 이후 노무현 정부의 정통성을 계승하는 대표적 여성 정치인으로 야권에서 자리매김해 왔다. 한 대표는 뇌물수수 혐의로 강도 높은 검찰 수사를 받으면서 ‘철의 여인’으로 거듭나겠다는 의지를 수차례 천명하는 등 강하게 담금질 됐다는 점도 기대감을 높이고 있다. 이런 상징성 때문에 두 사람이 역대 한국 정치사에서 전례가 없던 치열한 여성 대표간 격돌을 벌일 것으로 예상되는 가운데 첫 승부처인 4·11 총선이 다가오고 있다. 박 비대위원장은 민심의 외면 속에 바닥으로 가라앉는 한나라호(號)를 어느 정도 수면 위로 끌어올리느냐에 따라 향후 대권 가도에서의 정치적 입지가 달라질 전망이다. 한 신임 대표 역시 야당에 절대적으로 유리한 환경이라는 평을 받는 이번 총선에서 집권 여당에 어느 정도의 정치적 타격을 가하느냐에 따라 정치적 미래가 걸려 있다는 전망이 나오고 있다. 뿐만아니라 총선 이후 대선에서는 사즉생의 각오로 뛰는 두 사람의 진검승부 파열음이 더욱 커질 것으로 보인다. 물론 박 비대위원장은 상황 변동이 없다면 한나라당의 대선 후보로 보수 재집권을 위해 직접 여권 대선 후보로 뛰게 될 것으로 보인다. 반면 한 대표는 대선 불출마를 선언한 상황이라 야권 대선후보를 도와 정권 탈환에 밀알이 되려한다는 점에서 볼 때 역할 면에서는 차이가 있다. 두 사람은 1월 17일 오후 2시 한 대표가 취임 인사차 박 비대위원장실을 찾음으로써 첫 만남을 가졌다. 이날 두 사람의 ‘드레스 코드’는 일하는 여성이 많이 입는 ‘테일러드 재킷(남성풍 재킷)’에 모노톤의 바지 차림으로 대동소이 했다. 박 비대위원장은 고동색이 감도는 재킷에 평소 애용하는 꽃 브로치를 달았고, 한 대표는 흰색 블라우스에 회색 재킷을 입었다.
두 사람은 남성 대표들 사이의 만남처럼 너스레를 떨며 과도하게 상대를 치켜세우는 모습은 전혀 없었고 평범한 수준의 덕담을 주고받았다. 몇 가지 실무적 대화를 나누는 것으로 끝내는 등 만남의 성격이 다르다는 평가를 받았다. 두 사람은 “우리는 같은 것 같다” “(같은 여성으로서) 같이 힘을 합해서…”(박 위원장) 등의 말을 여러 차례 했다. 한 대표도 “정치 사상 처음으로 여성이 여야 대표가 됐다”며 “2012년에 우리 여성들이 국민의 삶을 책임지고 가장 후진적인 정치를 한 단계 도약시키는…”이라고 하는 등 여성 대표로서의 동질감을 표현했다. 두 사람은 4월 총선을 위한 각 당의 경선 룰 문제에 대한 이야기로 대화를 옮겨 박 비대위원장은 여야가 같은 날 국민경선을 실시하기 위한 선거법 개정을, 한 대표는 모바일 투표를 경선에 도입하기 위한 선거법 개정을 꺼내는 등 각자의 주장을 펼치며 서로 경청했다. 다른 삶 두 여인, 정치 최전선에 서다 그러나 한 대표가 “꼭 좀 부탁드린다. 정봉주 씨가 (BBK 발언 문제로) 감옥에 들어간 것은 표현의 자유와 연계된 정치 탄압일 수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라며 〃국회에 소위 ‘정봉주법’이 발의돼 있는데, 2월 국회에서 해결될 수 있으면 좋겠다”고 하자, 그동안 옅은 미소를 띠고 있던 박 비대위원장의 얼굴이 일순 굳어지면서 “같이 검토를… 예… 알겠습니다”고만 했다. 당을 떠맡은 부담감은 여야를 막론하고 두 사람을 모두 부담스럽고 무겁게 만들고 있다는 평이다. 한 대표가 “많이 어려우시죠. (당선의) 기쁨은 한 순간이고 어려움이 닥치기 때문에 ‘박 비대위원장도 어려우시겠구나’ 생각하면서 왔다”고 말하자 박 비대위원장도 “같은 것 같다. 같이 힘을 합하자”고 답하기도 했다. 이처럼 박 비대위원장과 한 대표의 만남은 짧지만 화기애애한 분위기였다는 데는 이견이 없지만 ‘탐색전’ 냄새가 물씬 풍겼다는 관측도 나오고 있다. 박 비대위원장은 지나 1월 9일 불거진 ‘전당대회 돈봉투’ 사건을 계기로 초강경 쇄신 의지를 밝혔다. 물론 여당으로서는 악재지만, 유야무야 덮지 않고 구태 정치를 완전히 뿌리뽑아 전화위복의 계기로 삼겠다는 각오를 내비친 것이다. 박 비대위원장은 이날 국회에서 열린 비대위 모두발언을 통해 “한나라당이 나아갈 길에 대해 말씀드리겠다”면서 “이번 사건을 구태 정치와 과거의 잘못된 정치 관행과 단절하는 계기로 삼고자 한다”고 분명하게 말했다. 그러면서 박 비대위원장은 “국민 앞에 한 점 의혹 없이 철저히 밝힐 것이고, 앞으로도 과거의 잘못된 부분이 나오더라도 털고 갈 것”이라고 공언 했다. 박 비대위원장의 이 같은 발언은 이번 사건에 대한 검찰 수사가 미진하다고 판단될 경우, 특검 수사나 국정조사를 선제적으로 제안함으로써 진실 규명의 의지를 피력한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2008년 전당대회 외에도 돈이 오간 의혹이 제기되는 2010년 전당대회나 2008년 총선 비례대표 공천 과정에 대해 당내 윤리위원회나 별도의 진상조사 기구를 만들어 과거 구태 정치에 대해 스스로 칼을 들이댈 것이라는 관측이다. 이 과정에서 박희태 국회의장을 포함한 현 정부의 전직 당 대표들에게까지 구태정치 단절의 칼날을 들이댈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는 시각도 있다. 이와 함께 강력한 인적 쇄신도 예상된다. 이번 사건과 관련된 인사는 당내 정치적 입지와 계파를 불문하고 구태 정치에 상응하는 대가를 치르게 할 것이라는 얘기다. 한편 한 대표는 취임 이후 야권 대통합 등을 위한 광폭 행보를 이어가고 있다. 한 대표는 1월17일 통합진보당 이정희, 유시민, 심상정 공동대표를 방문해 총·대선 때 야권 연대 필요성에 공감대를 형성했다. 그러나 협력 수준에 대한 이견은 여전히 좁히지 못한 상태다. 통합진보당도 여성 대표 맹활약 심 공동대표는 통합진보당이 정당 간 통합이 아닌 후보 단일화 방식의 선거연대를 제시한 것을 거론하며 민주당이 협상 테이블에 나올 것을 당부했다. 그러자 한 대표는 “승리의 구도를 만들자고 제안한 것은 우리도 바라던 바였기 때문에 조속히 함께 논의하면서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화답했다. 그러나 협력 수준에 대해서는 “이렇게 다 앉아 계시는데 왜 제가 저 당을 예방했나 이런 생각이 든다” “지금이라도 같이 할 수 없느냐〃며 정당간 대통합 필요성을 강조하기도 했다. 한 대표는 창조한국당 한면희 대표를 만난 자리에서도 “민주통합당은 미완의 통합이기 때문에 앞으로 더 큰 통합을 통해 나아가야 한다”고 호소했으며, 청와대 김효재 정무수석의 취임 축하 예방을 받은 자리에서는 정부의 신뢰 회복을 강조했다. 그리고 한 대표는 김석동 금융위원장과 별도 간담회도 가져 론스타 문제와 관련해 “론스타의 외환은행 매입 당시 법을 어기고 진행한 증거들이 많아 원인 무효”라며 “국정조사를 통해 국민적 의혹을 푸는 것이 바른길”이라고 강력하게 주장하기도 했다. 또한 한 대표는 여의도 한국노총회관에서 한노총 지도부와 만나 “노동 문제를 해결하는 데 절대 게으르지 않겠다”고 다짐했고 이용득 위원장은 “희망을 갖고 열심히 돕겠다”고 답했다. 한 대표의 당 대표 취임 이후 이러한 광폭 행보는 18일 부산을 방문해 “부산의 선택이 4월 총선 승리와 12월 대선 승리로 인한 정권 교체라는 국민승리의 진원지가 될 것”이라며 “민주통합당은 (부산에서 여는 오늘) 최고위원회를 출발점으로 해서 정권교체를 위한 대장정을 부산에서 시작할 것”이라고 공언하면서 최고조에 달했다. 이처럼 두 여성 대표의 낡은 정치 결별 첫 카드는 조만간 제시할 것으로 알려진 19대 총선 공천기준 및 원칙이 될 것으로 보인다. 한나라당은 이미 박 비대위원장이 “공천은 국민이 납득할만한 기준과 원칙을 갖고 시스템으로 하겠다”고 거듭 밝힌 만큼 비대위가 후속으로 구체안을 제시하는 등 속도를 낼 것으로 보인다. 반면 민주통합당은 한 대표가 오랫동안 구상해 왔던 가이드라인이 제시되면 새 인물 영입과 인적쇄신이 급물살을 타게 될 것으로 전망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