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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한성의 옛절터 가는 길 ④上] 대자사터, 경혜공주묘, 성녕대군묘, 연산군 금표

14세 왕자를 먼저 보낸 왕후가 애달픈 마음으로 지은 대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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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nbnews 제259-260호 박현준⁄ 2012.02.06 11:54:21

서울 근교에 왕릉이 가장 많이 모여 있는 곳을 떠올린다면 분명 동구릉(東九陵)과 서오릉(西五陵)일 것이다. 그렇다면 왕자들의 묘소가 가장 많이 모여 있는 곳은 어디일까? 그 곳은 아마도 고양시 대자동(大慈洞)일 것이다. 많은 이들이 대자리(大慈里, 지금의 대자동)라는 지명은 들어 보았어도 가 본 이들은 많지 않다. 물리적 거리는 가깝지만 쉽게 다가갈 인연이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지하철 3호선 구파발역 2번 출구로 나와 버스를 갈아탄다. 버스는 막힘없이 10여분을 달려 하차 정류장 ‘필리핀 참전기념비’ 앞에 정차한다. 이곳에서 내리면 6.25에 참전했던 필리핀 군을 기리는 기념비가 날렵한 모습으로 서 있다. 참전 16개국 중 세 번째로 많은 7400여 명의 군인을 파견해 450명 가까운 사상자를 낸 우방이건만, 어느새 그들보다 잘 살게 된 우리는 그 때의 고마움을 까맣게 잊고 있다. 기념비 앞에 서니 어쩐지 미안한 생각이 고개를 든다. 입장 바꿔 생각하면 그들은 우리가 부럽기도 하고 서운하기도 할 것 같다. 이곳에는 대자동 입구 버스정류장이 있다. 10여분 간격으로 오는 026번 마을버스가 있는데 이 버스는 대자동을 지나 67번 지방도로를 경유해 고양동으로 간다. 일단은 걷기로 한다. 앞으로 보이는 사우나탕 앞길로 대자천을 끼고 걷는 길이다. 오늘의 목표인 대자사 터까지 1.5km 정도에 불과하니 걸어도 20분 정도밖에 걸리지 않는다. 다니는 차량도 뜸한 편이고 인도도 확실해 걷기에 불편함은 없다. 가는 길 도중에는 해인사 미타원이라는 절이 있다. 한 줌 재로 돌아간 육신의 흔적을 맡아주는 납골당으로 유명한 곳이다. 잠시 후 갈림길에 닿는데 이정표에는 좌(左)는 최영 장군 묘, 우(右)는 고양향교 방향을 가리키고 있다. 좌측 최영 장군 묘, 성녕대군 묘 방향으로 간다. 5분 정도 지나니 3거리에 ‘관산25통’을 알리는 버스정류장이 있다. 이곳을 중심으로 많은 왕가(王家) 자손들의 무덤이 있다. 성녕대군, 단종의 누나 경혜공주, 원천군, 이성군, 소현세자의 아들 경안군과 그의 후손 임창군, 임성군, 밀풍군, 최영 장군, 명나라 궁녀 굴씨 등…. 사연도 많고 아픔도 많은 이들이 잠든 곳이다. 오늘은 이들 중 경혜공주 묘, 이성군 묘, 성녕대군 묘, 대자사 터, 연산군 금표비(禁標碑)를 찾아가 보려 한다.

‘25통 버스정류장’ 3거리에 서면 동쪽으로 ‘성녕대군 묘’와 ‘최영 장군 묘’를 가리키는 안내판이 있고 서쪽으로는 조그맣게 ‘이성군 묘’를 가리키는 이정표가 있다. 이성군 묘 방향으로 길을 잡으면 1차선 시멘트 포장길이 이어진다. 이 길을 따라 산(山) 쪽으로 50여m 지점 우측으로 충민사(忠愍祠)라는 한옥 사당을 만난다. 경혜공주(敬惠公主)와 그녀의 남편 영양위 정종(寧陽尉 鄭悰)을 모시는 사당이다. 이 길로 50여m 더 들어가면 길이 끝나면서 좌측 45도 방향으로 거칠게 닦아 놓은 산길을 만난다. 바로 이 지점에 요즈음 세운 신도비가 서 있다. 공주와 그의 남편에 대해 기록한 신도비(神道碑)다. 좌측 45도 방향 산길을 오른다. 부스럭 갈잎 사이에서 고라니 한 마리가 뛰어나와 놀란 듯 내 앞길을 치고 오른다. 네가 내게 길을 일러 주려 함이냐? 10분쯤 올랐을까, 우측 둔덕 위로 고졸한 무덤 한 기가 보인다. 문종의 외동딸이며 단종의 누나인 경혜공주의 무덤이다. 지난 해 인기 TV극에서 많은 여성들에게 아픔을 준 비운의 주인공이다. 세종대왕은 18남 4녀의 자식을 두었는데 그 중 본처인 소헌왕후 심씨와의 사이에서 8명의 대군과 2명의 공주를 두었다. 첫아들이 경혜공주의 아버지인 문종이며, 둘째가 수양대군(세조)이며, 셋째가 안평대군, 이어서 임영, 광평, 금성, 평원, 영응이었다.

병약한 문종은 현덕왕후 권씨와의 사이에서 딸 경혜공주와, 아들 단종을 남기고 2년 4개월 만에 승하했다. 1452년 5월 단종은 12살의 나이로 왕위에 올랐다. 자연히 선왕(先王)의 신임을 받던 김종서와 황보인에게 의지하게 되었는데 둘째 수양(首陽)과 셋째 안평(安平)은 자신의 세력을 키워나가 왕권을 불안하게 하였다. 드디어 수양은 쿠데타(계유정란)를 일으켜 김종서와 왕보인 등 단종 보호 세력을 쳐 죽이고 아우 안평마저 귀양 보낸 뒤 사사(賜死)하니 세상은 수양의 천하가 되었다. 하는 수 없이 단종은 재위 3년 2개월 되는 1455년 윤6월에 수양에게 선위(禪位)하고 물러났다. 동생(단종)은 자살하고, 남편은 능지처참 당한 비운의 경혜공주의 스산한 무덤에서 바라보면, 요절한 세종의 동생 성녕대군의 넋을 기리는 ‘큰 자비 절(대자사)’의 불탄 자리가 보이고… 일이 여기서 그쳤으면 좋으련만 6월11일 경혜공주의 남편 영양위 정종, 금성대군, 혜빈(惠嬪) 양씨(생후 2일 만에 어머니를 잃은 단종을 키워준 세종의 후궁, 단종에게는 작은 할머니가 됨) 등등이 결탁해 권세를 휘둘렀다는 죄명으로 이들은 귀양길에 올랐다. 이 때 정종의 귀양지는 영월이었다. 세조가 미리 단종의 비호 세력을 차단한 것이다. 이후 정종은 단종의 노력으로 병석에 누운 경혜공주 곁에 잠시 머문 후 양근, 수원을 거쳐 이듬해(1456년) 6월 전라도 광주(光州)에 이배(移配: 유배지를 옮김)되었는데 이때는 경혜공주가 함께 했던 것 같다. 금성대군도 순흥으로 이배되었다. 바로 이때가 사육신(死六臣)의 거사가 실패로 돌아간 때였다. 다음해인 1457년 단종도 노산군으로 강등돼 영월로 유배되는 변을 당한다. 사육신을 국문한 내용이 세조실록 2년(1456년) 6월조에 실려 있다. 구치관이 성삼문을 취조하는데, “상왕(上王)께서도 함께 너희들의 모의를 알고 있는가? 성삼문이 대답하기를, ‘알고 있다’(上王亦與知汝謀乎? 三問曰: 知之).” 죽기를 마음먹은 성삼문이 미쳤단 말인가? 끌어들일 사람이 없어서 단종을 끌어들인단 말인가? 이긴 자들은 이렇게 구실을 만들었다. 그뿐이 아니었다. 사육신을 비롯한 소위 난신들의 아내, 첩, 딸들은 이긴 자들에게 분배되었다. 세조실록 2년(1456년) 9월7일 조에는 누구의 아내와 딸들을 누구에게 나누어 주었는지 세세히 기록되어 있다. 아아 가슴 떨린다, 성삼문의 아내와 딸도 운성부원군 박종우에게 분배되었다. 그나마 아직 살아 있는 단종(노산군), 금성대군, 정종을 처단하라는 사간원, 사헌부의 상소가 그치지 않았다. 후환을 없애려 하는 인간의 섬뜩한 단면이 실록 곳곳에 배여 있는 것이다. 그런데 정말로 이해할 수 없는 사람이 있다. 세조실록 곳곳에 이들을 처단해야 한다고 청하는 종친(宗親)의 어른이 기록되어 있으니 아아 슬프다, 그 이름은 양녕대군(讓寧大君)이다. 이 분은 조카와, 어린 손주, 손녀사위를 죽여 더 무엇을 얻으려 한 것일까? 그 후 이들은 원대로 모두 죽임을 당했는데, 단종은 사약을 들지 않고 자살했다고 기록해 놓았으며 금성대군은 순흥부사 이보흠과 함께 단종 복위를 꾀하다 사사되었고, 정종은 1461(세조7년) 7월 능지처참(陵遲處斬)당했다. 다행히 경혜공주는 야사(野史)와는 달리 관노(官奴)가 되지 않았으며 아들 하나(鄭眉壽), 딸 하나를 무사히 키워내었다. 초겨울 공주의 무덤에는 스산한 바람이 지나간다. 남편 정종은 시신(屍身)도 수습하지 못했는가? 무덤 한 쪽에 영양위 정종 제단(寧陽尉 鄭悰祭壇)만이 조그맣게 자리 잡았다. 단종이 애달프게 죽은 뒤에도 단종과 가까웠던 사람들을 죽여야 한다고 끊임없이 주장한 사람들이 있고, 그 중에는 손주-손녀사위를 죽이라고 요구한 양녕대군이 있으니… 무덤을 지키는 문인석도 스산해 보인다. 그런데 오래 전에 누군가가 코를 갈아 갔다. 이 땅 아낙들의 기자신앙(祈子:아들 낳기 바람)은 슬픈 공주 내외의 무덤이라고 비껴가지 않았구나. 길을 내려온다. 어귀 안쪽에는 향토문화재 4호인 이성군(利城君)의 묘소가 있다. 이성군은 성종의 9번째 아들로서 어머니는 숙용심씨다. 이성군 묘 아래로는 경양군(景陽君)과 영평군(寧平君)의 묘도 있어 조선 왕실 무덤에 대해 공부하는 이들에게는 도움이 될 것이다. 이제 건너편 산등성이 성녕대군(誠寧大君) 묘역으로 넘어간다. 성녕대군은 태종의 넷째 아들이다. 태종은 12남 17녀를 두었는데 정처(正妻)인 원경왕후 민씨와의 사이에 4남 4녀를 두었다. 4남은 양녕, 효녕, 충녕(세종), 성녕인데 성녕은 홍역으로 14세 어린 나이(1418년)로 사망했다. 태종과 민경왕후의 슬픔은 밥을 넘길 수 없을 정도로 깊었다. 그 슬픔을 담아 이곳에 장사지내고 변계량(卞季良)으로 하여금 신도비문을 짓게 하였다. 그 비가 지금도 사당인 대자사(大慈祠) 옆 비각에 남아 있다.

앞면에는 돌아간 이의 행장이 적혀 있고, 뒷면은 음기(陰記)인데 중요 부분을 살펴보면, “고양 북쪽에 있는 골자기를 산리(酸梨)라 부르는데 산의 형세는 고령(高嶺: 고양동 북쪽 보광사 뒷산)에서부터 뻗어와 진좌태향(震坐兌向:東을 등지고 西를 향함)하며, 물은 간방(艮方: 동북쪽)에서 나와 곤방(坤方:서남쪽)으로 빠지는데 도성까지 거리는 35리다. 방위나 풍수가 길해서 불리한 점이 없다. … 또 (묘소)의 □□쪽 □□거리에 암자를 세워 대자(大慈)라 했다”라는 내용이다 (高揚之北有洞曰酸梨 山之形勢來高嶺震坐兌向 水自艮出而坤破 距都城三十五里 方位風水吉無不利 … 且於□□百□于□□菴名曰大慈) 묘자리는 동쪽을 뒤로 하고 서쪽을 향하며 물길도 북동에서 서남으로 흐른다 했다. 이렇듯 풍수로 볼 때 길하다는 것이다. 요즈음도 풍수 공부하는 이들의 단골 간산(看山: 산 형태 보는 실습) 코스로 인기있는 지역임은 우연이 아닌 것 같다. 그나저나 비석이 오랜 동안 풍우로 마모돼 이 비문으로는 대자사(大慈寺)의 정확한 위치를 찾을 수 없게 되었다. 세종실록지리지에는 대자사(大慈寺)에 대해 “(고양)현 북쪽에 있다. 태종 원경왕후의 막내아들이 일찍 죽어서 그를 위해 재와 암자를 묘 남쪽에 짓고(爲作齋庵于墓南) 선종에 소속시켜 밭 250결을 주었다”는 내용이 실려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도 대자사가 기록되어 있다. “대자암: 대자산에 있다(在大慈山).” 그러면서 이곳에서 읊은 서거정의 오언율시(五言律詩)를 소개했다. 그 때의 분위기를 한번 느껴 보자. 산중책영마(山中策赢馬: 산속에서 여윈 말 채찍질하여) 사리별고승(寺裏別高僧: 절 뒤에서 고승과 헤어지는데) 수밀운구암(樹密雲俱暗: 숲이 우거져 구름도 어둡고) 사명수자곤(沙明水自滾: 모래는 밝고 물은 절로 맑구나) 이런 근거들을 바탕으로 연구자들이 그 동안 대자사 터를 찾아 왔는데 다행히 성녕대군 묘 남쪽 즉 경안군 묘 전방 넓은 밭에서 그 유지들을 찾아내었다. 경안군 묘 펜스 설치 작업을 하며 파낸 자리에서도 기와 파편들이 발견됐다. 성녕대군의 원찰로 자그맣게 출발한 대자사는 사세가 넓어지면서 문종, 예종 때에 이르러서는 승려가 100여명이 넘는 왕실 대찰이 되었다. 성종실록 18년조(1487년)에 보면 절에 보조해 주는 소금의 양(量)이 나오는데 용문사와 더불어 연 120석을 받는 최대의 절이었다. 참고로 궁궐 안에 있던 내불당은 5석이었으니 그 규모를 짐작할 수 있다.

경안군 묘 앞에 서서 대자사 터를 바라본다. 그 너머 산등성이에 경혜공주 묘가 있다. 대자사는 임진왜란에 불타 회복되지 못했다. 그 나마 몸은 사라졌어도 이름은 대자동이라는 지명으로 살아 있으니 없어져도 영영 없어진 것은 아니다. 이제는 유지에 안내판 하나 세워 주었으면 좋겠다. 자식을 먼저 보낸 어미의 마음으로 세운 절터라고. 다시 버스 정류장으로 내려간다. 연산군 시대에 세운 금표(禁標)를 찾기 위해서다.(문화재 자료 88호) 길을 북쪽으로 1.5km 가면 삼거리에 주유소가 있고 67번 지방도와 만나게 된다. 이 길에서 우회전하여 500m 가면 고갯마루가 예전 당고개이다. 좌측 길로 들어서서 200~300m 안쪽 간촌마을 길가에 금표 비석이 서 있다. 걷기에 조금 멀다면 26번 마을버스를 이용하면 편하다.

금표(禁標)란 무엇인가? 바로 출입금지를 알리는 표석이다. 연산군은 극도로 사생활 노출을 꺼리는 중증 환자였던 것 같다. 대궐 주위 고지대 집들에서 궁궐이 보인다고 궐 주변 집들을 철거하더니 즉위 10년에 이르러서는 경기 일원 상당 면적을 사냥터로 만들면서 금표를 세워 누구도 출입할 수 없게 했다. 은밀한 사생활 중시한 연산군은 고양에서 김포에 이르는 100리 땅에 ‘출입금지 비석(금표)’을 세우고 백성의 목을 쳤는데, 딱 하나 발견된 금표는 천덕구니 신세로 방치돼 있고… 연산군일기 10년(1504년) 8월조를 보면 그 생각의 근거를 알 수 있다. “임금 땅 아닌 곳이 없는데 누가 감히 자기 것이라 하겠느냐?(莫非王土 誰敢認爲己物)”. 고양, 파주, 양주, 포천, 광주, 김포…. 100리 가까운 땅들에 금표를 세우고 침입자는 참수하여 효수(梟首)하기에 이르렀으니 온전한 정신은 아니었다. 금표로 쫓겨난 사람들이 2만5500명, 전지가 5700결이라고 연산군일기 10년조(1504년)는 기록을 남겼다. 금표에는 이렇게 써 놓았다. ‘禁標內犯入者 論棄毁制書律 處斬’(금표내범입자 논기훼제서율 처참), 금표 안을 범하는 자는 기훼제서율로 논단하여 참형에 처한다는 내용이다. ‘기훼제서율’은 연산군 10년에 제정한 형벌이다. 이 비는 1995년 이곳 묘역 정비 중에 흙속에서 출토되었는데 연산군조에 핍박 받았던 옆 묘소 온녕군(溫寧君) 후손들이 고양시에 이전 요구를 하기도 하였다. 폭군의 흔적을 신성한 조상묘 옆에 둘 수 없다는 뜻에서다. 연산군 금표 중 유일하게 발견된 것이라서 소중한 자료인데 온건치 못한 유적이다 보니 500년이 지난 지금도 천덕꾸러기가 되었다. 오늘 못다 찾은 가슴 아픈 이들의 흔적은 다음에 찾기로 하고 당고개를 넘어 고양동으로 내려간다. 저녁 해가 짧다. - 이한성 동국대 교수 ※‘이야기가 있는 길’ 답사에 독자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매월 마지막 토요일에 함께 모여 서울 근교의 마애불과 문화유적지 탐방을 합니다. 3, 4시간 정도 등산과 걷기를 하며 선인들의 숨겨진 발자취와 미의식을 찾아갑니다. 참가할 분은 comtou@hanmail.net(조운조 총무)로 메일 보내 주시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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