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호선 구파발역 2번 출구를 나와 대자동, 필리핀 참전비 방향 버스로 환승한다. 교통체증 없는 통일로를 지나는 버스는 10여 분만에 참전비 앞에 정차한다. 햇볕은 맑은데 바람은 차다. 오늘의 목적지는 1km 남짓한 길이라 대자천(大慈川)을 끼고 걷는다. 026번 마을버스가 있는데 탔다가 내리는 것이 오히려 번거로운 일이다. 약 10분 후 갈림길에 닿는다. 좌측은 최영 장군 묘/성녕대군 묘를 가리키는 길표지가 있고 우측은 고양동을 가리키는 표지판이 있다. 우측 길 고양동 방향으로 길을 잡는다. 길은 한적한 2차선 포장도로다. 500여m 가벼운 비탈길을 걸으면 왼쪽으로 ‘정원가든’이라는 음식점이 보인다. 주변은 농막(農幕)과 밭이다. 음식점 뒤로는 나지막한 산등성이가 보인다. 음식점 앞길로 들어가 이 산등성이 앞에 서면 등성이로 오르는 길은 없고 출입금지 안내판이 서 있다. 그 안으로는 작은 묘가 두세 기(基) 보인다. 필자의 경험으로는 이름 없는 마애불보다 더 찾아가기 힘든 곳이 안내판 없는 이의 묘소다. 이곳을 찾기 위해 주변 산등성이를 헤매며 묘란 묘는 다 찾아다녔던 기억이 새롭다. 알면 금방이건만 모르면 참으로 아득한 것이 길이다. 아마 우리 사는 나날의 길도 다름 아닐 것이다. 과감히 산등성이를 오르면 우측으로 등성이 남쪽에 조그맣게 자리 잡은 묘(墓)가 보인다. 새로 세운 비(碑)도 보인다. 비문에 쓰여 있기를, ‘昭顯世子 淸國瀋館侍女 屈氏之墓(소현세자 청국심관시녀 굴씨지묘)’다. 2001년 4월 소현세자 종중에서 정비한 비석이다. 한편으로는 고양시에서 세운 예쁜 안내판도 있다. 조선이 멸망한 후 참으로 오랜 세월 버려졌던 묘소다. 似羅裙花似□鈿(사라군화사□전) 비단치마 꽃처럼, 비녀는 □처럼 斷原埋玉幾經年(단원매옥기경년) 이 언덕에 옥 같이 묻힌 지 몇 해가 지났던가 年年寒食淸明節(년년한식청명절) 해마다 한식 청명 그 날이 오면 惟有宮娥送紙錢(유유궁아송지전) 궁녀들이 오직 넋을 위로해 주었지 *紙錢(지전): 冥錢(명전)이라고도 하며 종이로 만든 모형 돈으로 저승에서 쓸 노자돈이다. 위는 조선말 선비 김구(金球)의 ‘굴씨 묘를 지나며(過屈氏墓詩)’라는 시(詩)다. 이 밖에도 선비 신진유는 ‘굴씨사(屈氏辭’)를 남겼고, 자하 신위도 ‘숭정궁인 굴씨 비파가(崇禎宮人屈氏 琵琶歌)’를 남겼다. 굴씨가 누구이길래 이랬던가?
답은 정조의 명에 따라 간행된 존주휘편(尊周彙編)이라는 한정판 책에 들어 있다. 임란, 호란 후 흐트러진 정신과 기강을 바로잡고자 발간된 책인데 자연히 명(明)을 숭상하고 그 옛날 반듯한 정신으로 돌아가고자 했으니 청(淸)이 알까 극비에 붙였으며 명나라 멸망 뒤 조선으로 오게 된 궁녀들의 이야기도 기록에 남게 되었다. 1644년(인조 23년) 명(明)이 청(淸)에 멸망했다. 이 때 많은 사람들이 청나라의 포로가 되었는데 궁녀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굴씨는 명나라의 마지막 임금 의종(숭정제)의 부인 주황후(周皇后)의 궁녀였는데, 의종 내외가 자결한 뒤 민가에 숨어 있다가 청에 포로가 됐다. 그녀는 소현세자가 청(淸)의 인질에서 풀려나 귀국할 때인 1645년(인조23년) 함께 조선으로 왔다. 이때 함께 온 명나라 궁녀들이 굴씨, 최회저, 유저, 진저 등이며 환관들도 함께 데리고 왔다. 아마도 소현세자가 아담 샬에게 요청했다는 천주교 신부와 관련이 있을 것이다. 유저와 진저는 일찍 세상을 떠나 화장(火葬)한 후 이 땅의 산하에 뿌려졌고, 명나라 고관의 후처였던 최회저는 80세를 넘기고 1699년 숙종으로부터 상궁(尙宮)의 직을 받았음이 실록에 기록돼 있다. 그녀는 1705년(숙종 31년) 이국 땅에서 눈을 감아 양주군 화향촌에 묻혔다. 그 뒤 그녀의 묘소는 영영 잊혀졌다. ‘죽은 명나라를 섬기고 산 청나라를 배척’하다가병조호란이란 치욕을 당한 인조는, 자신을 대신해 청에 인질로 잡혀갔던 아들 소현세자가 돌아오자 그를 미워한 끝에 의문의 죽음을 보고, 이어 며느리 일가를 몰살시킨 뒤, 4-8-12살 손자를 귀양 보내니… 굴씨만은 예외였다. 글씨를 읽지 못했던 그녀는 자신의 이름을 ‘qu’라고 발음했는데 조선인들 귀에는 ‘규’로 들리니 규저(圭姐)로 불리다가 자신의 이름이 반름기(頒廩記: 녹봉표)에 尺자처럼 쓰여 있다 하기에 사신 길에 역관이 확인하니 굴(屈)씨였다. 우리나라 발음에 있는 ㄱ,ㄹ,ㅂ 받침이 중국에는 없는 언어 구조가 빚은 난센스였다. 이렇게 이름을 찾아 조선의 궁녀로 살아 간 그녀는 명나라 황실의 예법을 가르치고, 여인네의 머리 매는 법, 새와 짐승 길들이기, 비파의 명수로도 성가를 높였다. 70세에 세상을 떠났다. 유언은 ‘바라건대 서쪽 근교에 묻어 달라’는 것이었다. ‘왕(효종)께서 청나라 정벌을 위해 출정하는 것을 보고 싶다’는 소원을 가슴에 안고…. 그러나 그 원(願)은 끝내 이루어지지 않았다. 전하기에 그녀는 소현세자의 단 하나 남은 막내아들(TV사극 ‘추노’에서 오지호가 목숨을 걸고 지키려 한 어린애)을 보살폈다고 한다. 이에 따라 소현세자 문중에서 그녀의 묘를 보살폈고, 김구의 시에서 보듯 궁녀들도 보살폈으며 그녀의 비파 연주는 장악원에 전수되었다 한다. 강세황의 손자 강이오(姜彛五)는 자단목(紫檀木)으로 된 그녀의 비파를 찾아내 손질했고 자하 신위는 그녀로부터 전수받은 장악원 악사로부터 비파 연주를 듣고 그 감흥을 떨칠 수 없었다. ‘미인은 흙으로 돌아갔어도 악기에 배인 향기는 남았구나.’ 숭정궁인 굴씨 비파가(崇禎宮人屈氏 琵琶歌)는 절절히 애절하다. 나도 문득 부서지는 겨울 햇빛 속에서 그녀의 비파 소리가 듣고 싶다. 뻗어 나온 능선 길을 우측으로 오르면 묘한 기가 있고 그 뒤로 반듯한 비석과 문인석을 갖춘 묘가 보인다. 밀풍군(密豊君)의 묘소이다. 밀풍군은 누구일까? 소현세자에게는 세 아들이 있었다. 그들의 비극은 잠시 후 경안군 묘소에서 돌아보자. 첫째, 둘째는 일찍 죽고 셋째 경안군(慶安君: 오지호가 지키려 한 어린애)만 살아남았다. 이 경안군은 다행히 두 아들을 두었는데 첫째가 임창군, 둘째가 임성군이다. 첫째 임창군의 맏아들이 밀풍군이니 소현세자의 증손으로 소현세자가(昭顯世子家)의 적장자(嫡長子)였다. 만일에 소현세자가 살아 임금이 되었더라면 밀풍군이 임금이 됐을 것이다.
영조 4년(1728년) 이인좌의 난이 일어났다. 난이 평정되고 이인좌를 문초했는데 그때 밀풍군 이탄(李坦) 이야기가 나온다. 난을 일으킨 세력들이 밀풍군을 염두에 두었는데 밀풍군은 대답하지 않았다(密豊不答云)고 한다. 그러나 소용이 없었다. 조선의 신료(臣僚)들은 건수(件數)만 있으면 충성 경쟁을 벌여 혐의자를 엄벌에 처하라고 온통 난리를 벌였다. 아마도 충성스럽게 보이고 정적을 제거하고 벼슬자리를 만들고 그들의 재산을 몰수하고 그들의 처(妻)와 딸(女)들을 분배받을 기회를 만들 수 있었기에 그러지 않았을까. 영조실록은 기록하고 있다. 왕 5년(1729년) 3월28일 밀풍군은 자진(自盡)하도록 명을 받는다. 일은 여기에서 끝나지 않았다. 오늘의 법률로는 일사부재리(一事不再理: 한 번 판결한 일은 새로운 혐의가 없는 한 다시 거론하지 않음) 원칙이 있건만 그때는 26년 후인 1755년(영조 31년)에 다시 신료들이 들고 일어나 노륙(孥戮: 죄인의 처자를 죽음에 처함)하였다. 세월은 무심히 흘렀다. 110년이 지나 당사자들이 모두 사라진 뒤 고종1년(1864년) 밀풍군은 복권되었다. 그 긴 세월 신산(辛酸)하게 살아갔을 그 후손들의 삶은 어떠했을까? 소현세자는 무슨 천형(天刑)을 지었기에 자신의 가계(家系)는 물론 후손들까지 이렇듯 힘겨운 삶을 살아가야 했던 것일까? 이제 능선 길을 돌아 밀풍군의 아버지 임창군(臨昌君), 할아버지 경안군(慶安君)이 잠들어 있는 등성이로 넘어 간다. 길은 동쪽 능선 길을 100m쯤 오르면 북으로 잠시 가다가 다시 좌로 갈라지는데 이 길을 택한다. 아래로는 농막이 한두 집 보이고 붉은 벽돌로 담장을 두른 묘소가 나타난다. 농막에서 개들이 낯선 인기척을 느끼고 심하게 짖는다. 이 붉은 벽돌로 담장을 두른 곳이 경안군의 묘소이다. 400년 가까이 지난 지금도 경안군은 아직 세상 바람이 시린 것일까? 병자호란에 항복한 조선은 청나라로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을 인질로 보냈다. 인조와 신하들의 눈물 속 손길을 뿌리치고 세자는 패전국의 차기 왕으로서 두려움을 떨치고 인질(人質) 길에 올랐다. 당시 청나라 수도였던 심양(瀋陽)에서의 생활은 포로나 다름없는 생활이었다. 그러나 세자와 세자빈 강씨는 굳건히 역경을 견디며 청나라 실력자들과 인적 교류를 터나갔고, 무역과 농장을 이루면서 부(富)도 축적해갔다. 심양 주재 조선 외교부이자 비즈니스센터 같은 역할이었다. 청나라의 조선 담당 실력자라 할 수 있는 용골대는 세자의 후견인 같은 사람이 되었다. 이 과정에서 인조는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인조실록 곳곳에는 세자에 대한 인조의 불편한 심기가 드러나고 있다. 1640년(인조 18년) 2월에는 결정적으로 세자를 미워할 일이 일어났다. 빈객 신득연(申得淵)의 장계(狀啓: 원격지 보고)가 도착했는데 이때 인조는 병이 심해 세자가 병문안차 일시 귀국할 시점이었다. 고관들이 세자의 환송회를 열었고, 청 황제도 손수 불러 환송회를 열어줬는데 이 자리에서 용골대가 대홍망룡의(大紅蟒龍衣: 임금의 장복)를 내어주면서 입으라 하였다. 세자가 황급히 거절했으나 이 내용이 조선에 보고된 것이다. 이때부터 인조는 세자를 자신의 아들, 패전국을 대표해 자기 대신 잡혀간 인질로 보지 않고 자신의 왕위를 위협하는 정적(政敵)으로 보았던 것이다.
드디어 1644년(인조 22년) 명나라 오삼계 군단의 항복으로 명(明)이 망하고 청(淸)이 대륙의 주인이 되었다. 이 때 세자는 북경에 70여 일간 머물며 서구 문명에 접할 수 있었고 특히 천주교 신부 아담 샬과 깊은 교분을 쌓았다. 명을 멸망시킨 뒤 청(淸)은 이제 더 이상 세자를 인질로 원하지 않았다. 인조23년(1645년) 2월, 9년간의 인질 생활을 끝낸 34세의 세자는 조선의 밝은 앞날을 꿈꾸며 귀국했다. 그러나 세자를 기다리는 것은 인조의 차가운 눈길뿐이었다. 두 달 후 4월 23일 갑자기 세자의 열이 심하게 올랐다. 어의(御醫) 박군의 진단으로는 학질(瘧疾)이었다. 어의 이형익이 침을 놓았다(世子受鍼). 24일, 25일에도 침을 맞았는데 26일 학질로 발병한 지 3일 만에 세자는 영영 죽음의 길로 떠났다. 누가 이 죽음을 정상적이라고 생각할 수 있겠는가. 같은 해(1645년) 6월 세자의 졸곡제를 기록한 실록을 보자. 세자는 본국에 돌아온 지 얼마 안 돼 병이 나 수일 만에 죽었는데, 온 몸이 모두 검은 빛이었고 일곱 구멍에서는 모두 선혈(鮮血)이 흘러나왔다. 검은 멱목(幎目)으로 그 얼굴 반쪽만 덮어 놓았으나, 곁에 있는 사람도 알아 볼 수 없었고 그 색이 중독돼 죽은 사람 같았다. 그런데 이 사실을 외인(外人)들은 아는 자가 없었고, 상(인조)도 알지 못하였다. (世子東還未幾, 得疾數日而薨, 擧體盡黑, 七竅皆出鮮血, 以玄幎覆其半面, 傍人不能辨, 其色有類中毒之人, 而外人莫有知者, 上亦不之知也) 당시 종실 진원군(珍原君) 이세완(李世完)의 아내는 곧 인열왕후(仁烈王后)의 서제(庶弟)였기 때문에, 세완이 내척(內戚)으로서 세자의 염습(斂襲)에 참여했다가 그 이상한 것을 보고 나와서 사람들에게 말한 것이다. 여기에서 끝나지 않았다. 며느리 강빈(姜嬪)에게 칼날이 겨누어졌다. 용골대가 세자의 큰 아들 석철을 데려다 키우겠다는 이야기가 실록에 남아 있다. 용골대와 큰 손자 석철과 그 어미 강빈…. 인조는 또 불안감을 느낀 것인가? 지아비 세자가 죽은 지 4개월 후인 1645년 8월, 궁중 저주 사건으로 원손 석철의 보모와 세자빈의 궁녀가 국문을 당하였다. 그녀들은 목숨으로 강빈를 지켰다. 또 한 번의 저주 사건으로 세자빈의 궁녀들이 다시 죽음을 당했다. 다음 해인 1646년 2월 인조 독살 기도 사건이 터졌다. 이번에도 강빈이 지목되었다. 강빈의 궁녀 정열과 유덕은 모진 고문에도 주인을 지키며 죽어갔다. 이렇게 되자 인조는 스스로 역적 강빈을 해당 부서에서 품의해 처리하라고 비망기를 내린다. 논의는 끝이 없었다. 그러니 그 칼날을 어이 피할 수 있으리. 강빈의 집안은 그 어머니까지 죽임을 당하는 멸문지화(滅門之禍)를 면치 못했다. 손자까지 죽은 뒤에야 인조는 숨진 손자들을 아비 소현세자의 곁에 묻어주라 했으니 정녕 ‘인자한 임금’이라 해야 하려나 그만 좀 끝났으면 좋겠는데 이 일을 어찌 하나. 강빈의 세 아들(소현세자의 세 아들)이며 인조 자신의 세 손자도 제주 귀양길에 올랐다. 실록은 기록하고 있다. 1647년 5월 13일 12살의 석철, 8살의 석린, 4살의 석견이 유배길에 올랐다고. 9월 18일 첫째 석철이 죽었다. 12월 23일 둘째 석린이 죽었다. 인자한 할아버지였던가? 인조는 이 애들을 애비 곁에 묻어주라 명한다.
실록에서 사관(史官)은 자신의 속내를 숨기지 않았다(歸骨於父墓之側, 亦何益哉? 可哀也已. 뼈가 아비 곁에 돌아온들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애석할 뿐이다). 이 모진 풍파를 견디고 남해, 함양, 강화, 교통으로 유배지를 전전하던 석견(경안군: ‘추노’에서 오지호가 지키려 했던)은 살아남아 두 아들을 남겼다. 붉은 벽돌 담장의 묘는 경안군의 묘이며 그 앞 평지에 자리한 묘는 큰 아들 임창군, 우측 기슭에 초라하게 자리한 묘는 둘째 아들 임성군의 묘이다. 소현세자 집안의 다른 이들은 어디에 잠들어 있을까? 세자는 서삼릉 구역 소경원(昭慶園)에 잠들어 있고, 강빈은 고종 7년(1903년)에 복위돼 광명시 영외원(永懷園)에 지아비와 어린 자식들을 그리며 잠 못들고 있다. 석철과 석린은 어찌 되었을까? 서삼릉 한 구석에 초라히 누워 있다. 석린의 묘에는 비석조차 남아 있지 못하다. 아 모질구나. 이제 대자사(大慈寺) 터를 밟고 관산 유치원 옆길로 해서 최영 장군 묘로 향한다. 1km 남짓 한산한 아베크길이다. 예쁜 돌층계를 돌아 오르면 단아한 묘가 있다. ‘황금 보기를 돌 같이 하라. 이르신 어버이 뜻을 받들어….’ 어린 날 배웠던 노래 가사처럼 장군은 아버지 최원직 선생 곁에 잠들어 계신다. 고려의 마지막 기둥으로 살다가 신진세력 이성계 일파에게 목숨을 잃은 분, 무속에서는 다시 장군으로 부활하신 분, 이제는 모두 잊고 우리 후손에게 힘을 주소서. 뒷 산등성이에 올라 대자산 능선 길을 밟아 고양향교로 향한다. 향교의 돌담이 예쁘다. 중남미미술관도 곱게 자리 잡았다. 고양동으로 내려온다. 옛 의주대로 길이다. 이제는 일상에 바쁜 차들만 길을 채우고 있다. 명나라 궁녀 굴씨가 그리도 보고 싶어 했던 효종의 북벌행렬이 지났어야 할 길이다. 길가 중국집에 들려 빼갈 한 잔 해야겠다. 바람도 신산(辛酸)하구나. -이한성 동국대 교수 ※‘이야기가 있는 길’ 답사에 독자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매월 마지막 토요일에 함께 모여 서울 근교의 마애불과 문화유적지 탐방을 합니다. 3, 4시간 정도 등산과 걷기를 하며 선인들의 숨겨진 발자취와 미의식을 찾아갑니다. 참가할 분은 comtou@hanmail.net(조운조 총무)로 메일 보내 주시면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