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65호 최영태⁄ 2012.03.16 11:34:56
한미FTA가 시작된 뒤 물가가 내리길 기대하고 마트를 찾은 사람들이 실망하고 돌아섰다는 기사가 한미FTA 개시일인 3월15일의 주요 화제였다. 그리고 관련 기사 밑에는 “그럴 줄 몰랐어?” “FTA로 수입가격 낮춰봐야 재벌 유통업체들은 가격을 안 내릴 것이고, 결국 추가 마진은 재벌 차지가 될 것” “관세 인하로 정부의 수입이 줄 것이니 이제 남은 것은 서민들에게서 세금을 더 세게 빨아낼 것”이라는 댓글들이 이어졌다. 한미FTA의 성과를 홍보해야 하는 정부 입장에서는 앞으로 ‘업계에 대한 지도’를 통해 수입 제품의 가격을 낮추려 들겠지만, 유통업계가 재벌에 완전히 사로잡힌 한국에서 과연 이러한 가격인하 지도가 얼마나 성과를 거둘지는 미지수다. 오히려 이번 경우처럼 ‘수입가는 낮아져도 판매가는 개미 눈곱만큼 찔끔 내릴 것’이라는 예상이 더 들어맞을 것 같은 느낌이다. 미국 경제는 만신창이가 됐지만, 좋은 물건을 값싸게 살 수 있다는 점에서 ‘쇼핑 천국’이란 특징은 쉽게 바뀌지 않을 것 같다. 세계 모든 메이커들이 세계 최대의 시장인 미국에 좋고 값싼 물건을 공급하기 위해 경쟁을 벌이기 때문이다. 경쟁 없이는 가격인하 없는데, 국내 유통가 장악한 소수 재벌은 어쩔 건가? 쉽게 예를 들어보자. 가전제품 매장이다. 미국에선 여러 유통 경로로 전자제품을 살 수 있다. 베스트바이(BestBuy)라는 전국 체인을 가진 매장이 있지만 가격은 그리 크게 싼 편은 아니다. 같은 제품을 월마트에서 판다면 대개 더 싸게 살 수 있다. 할인 양판점인 코스트코(Costco)나 비제이스(BJ's)에 가면 더 싸게 살 수도 있다. 물론 이들 양판점은 ‘비싼 고급 물건을 싸게 파는 쪽’이기 때문에 월마트에서처럼 무조건 싼 상품을 사기는 힘들다. 정말 싸고 좋은 물건을 파는 곳은 ‘프라이스(Fry's)' 같은 대형 전자 양판점이다. 차를 몰고 좀 교외로 나가야 하기는 하지만, 엄청 넓은 매장에 상대적으로 값싼 물건을 가득 쟁여 놓아 가히 소비자의 천국이라고 할만하다. 위의 예를 보면 알겠지만 유통 경로가 엄청 다양함을 알 수 있다. 양판점, 할인점, 회원제 할인점 등이 경쟁을 하면서 가격을 떨어뜨림을 알 수 있다. 반면 한국은? 전자제품을 살 수 있는 경로는 극히 제한적이다. 삼성 또는 LG전자의 매장을 가거나 하이마트 또는 전자랜드를 가야 한다. 백화점 전자 매장은 거의 폭리 수준이므로 갈 수도 없고, 인터넷 구매는 값은 싸지만 ‘골치 아플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싸니까’라는 결심을 해야 한다. 극히 제한적인 유통 경로를 재벌급 대형 업체들이 장악하고 있는 게 한국 유통 업계의 현실임을 알 수 있다. 이런 시스템에서는 아무리 수입 물가가 떨어져도 소매가는 ‘재벌이 결정하는 대로’ 정해지기 마련이다. “원가의 10배를 받는다” “비쌀수록 더 잘 팔린다”는 게 수입업계의 상식이라는 데서 ‘원가와 상관없는’ 한국 소매가의 현실을 알 수 있다. 그래서 결국 또 문제는 재벌이다. 소수 대기업의 손아귀에 틀어 쥐인 경제로는 한미FTA가 아니라 뭔 수단을 써도 결국 ‘손오공은 부처님 손아귀 안’이다. 한국 역사상 ‘재벌개혁’이라는 말은 선거 국면에서는 항상 화제였지만, 이런 말잔치와는 상관없이 한국 재벌은 성장 일로를 달려왔다. 정치의 해를 맞아 또 재벌개혁 논란이 뜨겁다. 말은 필요없다. 정말로 재벌을 손볼 수 있는, 그래서 한미FTA의 성과가 서민 손에 쥐어질 수 있도록 하는 정당을 이번 선거에서 뽑아야 한다. 그러지 못하면 한미FTA의 효과는 재벌만 누릴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