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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한성의 옛절터 가는 길]도선사 ~ 용암사 ~ 봉성암 ~ 태고사 ~ 중흥사

300년 전, 高山에 샘파고 절지은 노력을 깔아뭉개는 우리는 도대체 어떤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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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nbnews 제267호 박현준⁄ 2012.03.26 13:48:56

성능(聖能)의 북한지(北漢誌)를 보거나 옛 지도 동국여도(東國輿圖)를 펼치면 북한산성 안팎으로 많은 절들이 자리잡고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많은 경우 그 절들은 을사늑약(乙巳勒約: 1905년) 이후 의병들의 근거지가 된다는 이유로 일제에 의해 파괴되었고, 1925년 을축년 대홍수로 무너지더니 6.25를 겪으면서 온전한 절이 하나도 없을 정도로 파괴되었다. 다행히 1950년대 후반부터 그 절터에 새롭게 절들이 자리를 잡기 시작하였다. 아쉬운 점은 남아 있는 초석 위에 하나씩 하나씩 옛 자취를 복원했더라면 좋았으련만 가난한 그 시절에 마음만 바빠 남아 있던 초석과 석축을 헐어내어 새 건물을 지었으니 옛 절터는 이름은 옛 절이로되 가르침도 절 모양새도 계승된 것 없는 경우가 많이 발생했다. 오늘 들리려는 용암사(龍岩寺), 봉성암(奉聖菴), 태고사(太古寺), 중흥사(重興寺)는 이미 1930년대에 발행된 석문의범(釋門儀範)이나 주요 사찰의 본말사지(本末寺誌)에서도 이름을 찾을 수 없다. 일제의 탄압과 을축년 대홍수로 이미 사찰은 무너졌거나 무너져 가고 있었을 것이다. 숙종 37년(1711년) 북한산성 축성을 완료한 조선 조정은 새로운 고민을 시작했다. 성(城)을 쌓는 것으로 하드웨어(hardware)는 완성했으나 방어 시스템(software)을 만들어야 했던 것이다. 그래서 설치한 기관이 경리청(經理廳)이며 그 아래 기존의 조선 군대 조직인 훈련도감, 어영청, 금위영 등 이른바 3군부(三軍部)의 파견대인 유영(留營)을 두게 되었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부족해 임진란 때 이미 그 능력을 충분히 보였던 승려(僧侶)들을 주둔케 하여 평상시에는 승려로, 유사시에는 승군(僧軍)으로 산성방어에 참여케 했다. 그 결과 성내에 새로 창사한 절이 12개이며 기존에 있던 중흥사까지 합쳐 13개 사찰에 350명 승려가 상주하게 되었다.

창사(創寺)의 목적이 산성 방어에 있다 보니 북한산성 안 절들의 위치는 일반 절들의 위치와는 달리 대부분 성문 근처에 자리잡았고 본부의 성격을 가진 절만 아래 쪽 북한산성 계곡 가까운 곳에 자리잡았다. 평일 오후 길동무 몇몇이 우이동 종점에서 도선사 버스를 이용해 도선사 입구까지 오른다. 길동무가 보시함에 감사 표시를 한다. 필자가 어릴 때는 이런 버스 길이 없었다. 군사정권이 들어선 어느 날 불도저가 산길을 밀어 차가 다닐 수 있게 하더니 1974년 초에는 포장까지 했다. 긴 산행이 목적인 이들은 선운교부터 우측 능선을 이용하면 호젓한 길로 갈 수 있다. 이 능선에 달리 이름이 있는지 모르겠다. 전에는 능선 길에 오리나무가 많다 하여 소박하게 ‘오리능선’이라 부르던 생각이 난다. 도선사(道詵寺)로 들어간다. 절 소개 자료에는 도선국사가 창건한 절이라고 돼 있다. 그런데 실록에도, 옛 지리지에도 도선사 기록은 없다. 경내에 있는 마애불이나 조선 말 호산 박문호 선생의 산행기가 그래도 오래된 흔적일 뿐이다. 옛 기록들은 우이동 계곡을 언급할 때면 도성암(道成菴)을 말했고, 조계동 계곡(구천계곡)을 언급할 때는 조계사(曹溪寺: 현 조계종의 본찰이 아닌 아카데미하우스 위 계곡에 있었던 절)를 언급한다. 도선사는 그 때까지 없었거나 미미했을 것이다. 그러던 절이 근세에 청담대종사가 이 터전에 자리잡은 후 호국도량으로 전국 제일을 자랑하게 됐다. 마애불 옆으로 나한(羅漢: 부처님의 수제자)을 새롭게 모시려는지 16나한상이 계곡 길 옆에 자리잡고 있다. 문득 1882년 3월에 이곳 도선사에 들러 하룻밤을 묵고 간 창강(滄江) 김택영 선생이 생각난다. 한말(韓末), 시대를 대표하는 세 명의 문장가가 있었다. 창강 김택영, 매천(梅泉) 황현, 영재(寧齋) 이건창 선생이다. 이들을 세간에서는 한말삼재(韓末三才)라 했다. 여기에 지지 않는 또 한 분이 있으니 호산(壺山) 박문호 선생이다. 이들 중 창강, 매천, 호산 세 사람이 봄바람 살랑 부는 춘삼월에 삼각산 유산(遊山: 요즈음 말로 등산) 길에 올랐다. 나무꾼을 만나 길안내를 받았는데 백운대에 오르다가 중간 수직벽 구간에서 그만 덜컹 겁이나 오르지 못하고 도선사에서 하룻밤 유(留)하게 된다. 일반인들이 쉽게 백운대에 오르게 된 것은 1927년 3월 일제가 쇠난간을 설치하고 난 뒤이니 무리도 아니었다. 그 때 창강은 시 한 편을 남긴다. 제목은 ‘백운대에서 도선암으로(自白雲臺至道詵菴)’이다. 絶頂歸來似謫仙 깍은 듯한 봉우리에서 돌아와 귀양 온 신선처럼 驚魂收召欲參仙 놀랜 혼 불러들이고 신선을 뵙고 싶네 山僧坐睡山花發 산승은 앉아 졸고 산꽃은 피는데 滿院蜂聲卓午天 절 가득 벌 소리 (때는) 한낮이로구나 백운대에서 놀란 가슴 쓸어내리고 한낮의 평화 속으로 빠져든 선생의 그 날이 눈에 보이는 듯 역력하다. 이제 용암문을 향해 도선사 좌측 계곡을 끼고 오른다. 10분이 채 안 돼 우측 바위에 새긴 정광화 김상궁의 사리공(舍利孔)을 만난다. “金尙宮淨光花之舍利塔 同治癸酉十月 日立(김상궁 정광화지사리탑 동치 계유 시월 일입: 김상궁 정광화의 사리탑, 동치(1875년) 계유년 10월 세움)” 나이들어 궁(宮)을 나온 후 도선사에서 마음 닦다 여생을 마친 한 궁녀의 삶의 흔적이다.

길은 계곡을 끼고 계속 오른다. 오르기를 1시간여 잠시 가파른 능선으로 이어진 길 앞에 갑자기 뻥 뚫린 하늘이 나타난다. 용암문(龍巖門)이다. 용암봉 아래 자리 잡고 있어서 용암문이 되었다. 백운봉암문(일명 위문)과 함께 우이동 방향으로 통하는 비밀통로인 셈이다. 문안으로 들어서면 건너편 문수봉 보현봉 줄기가 선연히 보인다. 방향을 좌로 틀어 남쪽으로 길을 잡으면 왼쪽으로 성벽을 끼고 가는 평지나 다름없는 성벽 종주 주능선길이다. 걷기를 5분여, 우측으로 대피소 건물이 나타나고 앞으로는 비교적 넓은 공터와 만난다. 북한산 대피소이다. 예전 숙영(宿營)이 가능하던 때에는 제17 야영장이었다. 야영장이었으니 당연히 샘도 시원하고 풍부했었다. 이제는 ‘음용불가’ 딱지가 붙어 있다. 솟아나는 샘이 더러워서가 아니라 사용하는 사람들이 부주의하다 보니 샘이 오염된 것이다. 과연 이 샘을 이렇게 오염시키고 방치해도 되는 것일까? 아닐 것이다. 이 샘은 300년 전 이 자리에 있던 절에서 사용하던 생명의 물이었다. 성능의 북한지에 의하면 용암사는 ‘일출봉 아래에 있는데 87간이라’고 기록하고 있다.(在日出峰下八十七間)

이제 이 터는 파헤쳐지고 넓혀져서 초석 하나 기와 한 조각 찾아 볼 수 없다. 예전에 있던 탑의 잔해도 모두 없어졌다. 다만 눈썰미 있는 이라면 축대 아래 간신히 남아 있는 석축의 흔적이나 초석의 흔적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쓰기 위해 300년 전 이 땅에 살다간 선배들의 흔적을 이렇게 없애도 되는 것일까? 용암문을 지키기 위해 이곳 높은 곳에 샘을 찾고 절을 지은 이들께 죄송스럽기 그지없다. 용암사 터였다는 표지라도 하나 마련했으면 좋겠다. 용암사 터에서는 막바로 산성 안으로 내려가는 오솔길이 있다. 10여 분 내려가면 좌측으로 돌을 깐 정성스러운 길이 보인다. 길을 다 내려가지 말고 좌측 돌 깐 길로 넘어 가자. 산성 내에서 가장 은밀한 절, 봉성암(奉聖菴)으로 가는 길이다. 의상봉 능선이나 원효봉에서 바라보면 동장대가 바라보이는 동쪽 산록 높은 곳에 등대처럼 자리한 작은 절이 보인다. 북한산을 사랑하는 이들도 잘 들르지 않는 곳이다. 봉성암은 골목길 끝집처럼 더 이상 길이 없는 곳에 자리 잡았다. 북한지에는 ‘구암봉 아래 있다. 25간이다. 성능이 창건하였다(在龜岩峰下二十五間聖能所創)’는 기록이 있다. “옛절을 복원하면서 옛 석축이나 초석을 살려 복원하면 안 되나? 왜 깡그리 밀어내는 걸까? 이 높은 곳에 샘을 파고 절을 지은 선조들께 죄송스럽기 그지없다” 아직 잔설이 남아 있는 길을 오른다. 정성 가득 담아 반듯하게 지은 법당이 우리를 맞는다. 시주(施主)가 부족했나, 아니면 주지스님의 성품 탓인가 법당에는 단청(丹靑)이 없다. 절마당에서 바라보는 아랫세상은 아스라이 아름답다.

법당 좌측 언덕으로 이어지는 층계를 오른다. 투박하지만 믿음직스러운 승탑(僧塔, 浮屠)을 만난다. 전해지기로는 이 곳 북한산성 축성에 이바지하고 팔도도총섭(八道都摠攝)으로 주재한 성능스님의 부도라 한다. 마침 살림을 맡아 하시는 거사님이 계시기에 여쭤보니 일본으로 반출됐던 것을 일본 측 기록에 의거해 다시 모셔 왔다는 것이다. 그럴 개연성이 크다는 생각이 든다. 바로 아래 큰 절 태고사에 머물던 승려 성능으로서는 조용히 선(禪)의 세계에 들기 위한 선방이 필요했을 것이다. 그러기에 본인이 주재하는 바로 위 조용한 곳에 25간밖에 안 되는 작은 암자를 만든 것이다. 이 절에는 나이 들어가는 비구니 스님과 속가(俗家)의 오라버니 되는 거사 한 분 이렇게 계신다. 젊은 제자는 벌써 5년이나 선방에 들어가 돌아오지를 않는다고 한다. 스님이기에 앞서 속가의 여동생을 걱정하는 거사님의 얼굴에 안타까움이 가득하다. 꽃피는 봄 날 다시 한 번 들려야겠다.

돌길을 내려온다. 길가에 또 다른 부도 한 기(基)를 만난다. 보련당(寶蓮堂)이라는 이름이 새겨져 있다. 누구인지는 모른다. 봉성암에서 마음 닦다 입적한 스님의 흔적일 텐데 기록이 없다. 부도를 뒤로 하고 잠시 내려오면 좌측 조그만 언덕 뒤에 태고사(太古寺)가 있다. 고려 때 원증국사(圓證國師) 보우(普愚) 스님이 머물던 절이다. 보우스님이 입적하자 목은 이색이 비명(碑銘: 비에 새긴 글)을 지었다. 이 절터에 그 비가 남아 있는데(보물 611호) 온전하게 보존돼 그 내용을 모두 파악할 수 있다. 비명에는 신돈(辛旽)에게 핍박받은 이야기가 길게 쓰여 있다. 입적하자 100과(顆)의 사리가 나왔다. 이를 나누어 태고사에 원증국사탑(부도)을 봉안했는데(보물749호) 지금도 온전한 모습으로 절 뒤 언덕에 자리잡고 있다. 나머지는 석종(石鐘) 형의 부도를 만들어 사나사(양평), 양산사(가은), 소설사(미원)에 봉안했다.

세월이 흐른 뒤 이 유지에 팔도도총섭 성능은 131간(間)의 절을 중창하고 예전 그대로 태고사라 하였다. 여기에서 성능은 서책 출판에도 힘을 쓰니 사사삼경언해, 십구사략, 천자문 등 10여 책에 이르렀다. 주로 유학 관련 서적이 많았다. 목판인쇄 하던 판각이 5700판이나 되고 금속활자도 11말이나 있었다고 북한지는 기록하고 있다. 아쉽다. 목판과 활자들은 다 어디로 간 것일까? 북한산을 유산하며 태고사에 머물다 간 이덕무는 그 때의 느낌을 시로 남겼다. ‘텅빈 추녀에 이슬은 방울 맺고 별은 북두성에 가까운데 풍경소리 멀리 돌 담(潭) 속에 떨어지네(露滴虛簷星近斗 磬聲遙落石潭中).’ 다시 중창한 지금의 태고사는 사세가 빈약해 대웅전 하나, 요사체 하나 번듯한 것이 없다. 풍경 소리도 깊지 못하다. 아쉬운 마음으로 중흥사(重興寺) 터로 내려온다. 바로 태고사 아래 두 물줄기가 만나는 곳에 자리하고 있다. 북한지 기록에는 30間의 옛 절에 증건해 136간이 되었다 한다. 지나는 길에서 바라보아도 석축의 규모가 만만치 않다. 1900년대 초에 찍은 중흥사와 태고사 사진이 남아 있는데 웅장한 모습을 볼 수 있다.

가건물처럼 있던 것을 제대로 된 양식으로 재건축하는 공사가 한창이다. 옛터는 그 터대로 보전되는 것이 좋겠으나 다시 복원(재현)한다면 이처럼 제대로 했으면 좋겠다. 기록에는 북한산성 내 세 누관(樓觀) 가운데 하나인 항해루(沆瀣樓)가 중흥사 앞에 있었다는데(在重興寺洞口) 흔적이 없다. 언룡교(偃龍橋)도 항해루 아래 있었다는데 교각 하나 남아 있지 않다. “가건물만 남아 있던 중흥사를 제대로 복원하는 모습을 보니 얼마나 좋은가? 오늘도 이렇게 산길에서 또 하나의 인연을 지으니 반가울 수밖에…” 중흥사 터를 살피고 계곡을 따라 내려온다. 잠시 후 용학사라는 절을 만난다. 그 경내로 들어 가 보자. 건축 중인 작은 건물 뒤 쪽 바위에 사천왕상(四天王像) 선각화가 새겨져 있다. 움직임이 살아 있는 선각화인데 바위에 시멘트를 바르고 그린 그림이다. 시멘트 안에는 무엇이 있을까 궁금하여 주지스님께 물었더니 “큰 스님께 들은 바로는 시멘트 안쪽 바위에 지금 그림과 똑 같은 그림이 있다”고 한다. 그러기를 간절히 바란다. 어느 날 이런 바위 선각화가 나타난다면 소중한 유산이 될 것이다. 이곳 용학사 앞에는 3가지 유산(遺産)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공덕비군(群), 산영루 터, 북한산 승도절목명문(僧徒節目銘文)이다. 공덕비는 이곳 북한산 총융사를 지낸 이들이 벼슬을 마치고 떠날 때 의례적으로 세워준 불망비(선정비)들로서 20여 기가 남아 있다. 따라서 이곳을 ‘비석거리’라 부른다. 산영루는 이곳 계곡언덕에 세운 정자다. 이제 정자는 없어지고 초석만 남았는데 세검정과 유사한 ㄱ자 형태의 건물이다. 자리잡은 곳이나 건물이 아름다워 조선말 한국을 찾은 외국인들이나 조선의 선비들이 사랑하던 정자였으나 을축년 대홍수에 무너졌다. 100여 년 전에 찍은 사진이 여럿 남아 있는데 지금 보아도 아름답다.

용학사 앞 비스듬한 바위에는 4각형의 획을 긋고 300여 자의 글을 새긴 명문이 있다. 1885년(철종 6년)에 작성한 ‘북한산 승도절목(僧徒節目)’이다. 산성내 승려 도총섭 임명에 따른 원칙을 준엄하게 정한 내용이다. (‘조선금석문총람’이나 ‘고양금석문대관’ 참조) 용학사를 뒤로 하고 30분 정도 내려가면 중성문을 만난다. 전해지기로는 백제의 고성(古城)이라는데 최영 장군이 요동정벌을 기획하면서 중수했다 한다. 지금 모습의 원형은 조선 숙종 때의 모습이다. 산성이 완성된 다음해(1712, 숙종 38년 4월) 숙종은 친히 산성에 행차해 외성만으로는 부족함을 느끼고 산성 안에 중성(重城)을 쌓을 것을 명했다. 이 때 쌓은 중성은 성문, 암문, 수문으로 구성됐는데 수문은 을축년에 유실됐다. 이제 대서문을 향해 간다. 저 앞에 으스름 저녁 빛 속에서 스님 한 분이 걸어오신다. 늦은 오후라 산길에는 인적이 없다. 마주치는 순간 나도 모르게 인사를 건넨다. “스님은 어느 절에…” 그 분이 답하신다. “봉성암입니다.” 아 반갑다. 그렇게 또 하나의 인연을 지은 날이다. - 이한성 동국대 교수 교통편 4호선 수유역 3번 출구 ~ 중앙차로 우이동행 버스(120, 130, 153 번) 환승 ~ 우이동 종점 하차. 걷기 코스 우이동 종점 ~ 도선사(버스/택시/오리능선 걷기) ~ 김상궁 사리공 ~ 용암문 ~ 용암사 터(북한산대피소) ~ 봉성암 ~ 태고사 ~ 중흥사 ~ 비석거리(용학사/산영루 터/승도절목) ~ 중성문 ~ 대서문(또는 계곡길) ~ 북한산성 입구. ※‘이야기가 있는 길’ 답사에 독자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매월 마지막 토요일에 함께 모여 서울 근교의 마애불과 문화유적지 탐방을 합니다. 3, 4시간 정도 등산과 걷기를 하며 선인들의 숨겨진 발자취와 미의식을 찾아갑니다. 참가할 분은 comtou@hanmail.net(조운조 총무)로 메일 보내 주시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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