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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한성의 옛절터 가는 길 ⑦]밟히는 기와편… 여기가 분명 절터인데

왜구 피해 서울로 올라온 청자 도요터 남아 있는 북한산 기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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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nbnews 제268-269호 박현준⁄ 2012.04.09 15:43:59

조선시대에 북한산에 대해 기록한 많은 문서들이 있다. 대표적인 기록이 승려 성능(聖能)의 북한지(北漢誌)이며, 왕조실록 기록도 풍부하다. 요즘 표현으로 하면 산행기(山行記)에 해당하는 유산록(遊山錄)도 많으며, 보고서라 할 만한 자료들도 많이 남아 있다. 그 기록들 속에는 절에 대한 기록들도 많은데 지금은 그 절들이 없어져 그 위치를 궁금하게 만든다. 신혈사, 향림사, 청담사, 정토사, 인수사, 조계사, 도성암, 수도암 등이다. 오늘은 대동문을 중심으로 동쪽의 우이동, 수유리 지역에 있었다는 옛 절터를 찾아가 보려 한다. 도성암(道成菴), 수도암(修道菴), 조계사(曹溪寺)가 그것이다. 보물찾기 게임에는 지도가 있건만 내게 주어진 힌트는 옛 글뿐이다. 선조 29년(1596년) 3월 3일자 내용을 살펴보자. 임진란에 치욕을 당한 선조의 명(命)으로 한음 이덕형이 삼각산(북한산)에 성(城)을 쌓을 만한지 살펴보고 올린 보고서가 있다. 그 내용에 도성암(道成菴)과 수도암(修道菴)이 나온다. “(중흥사를 지나니) 성에는 석문이 있는데 절과의 거리는 수백 보 가량입니다. 절문을 지나 동남으로 가다가 길이 셋으로 나뉘는데, 하나는 동문(東門)으로 통해 왕래하는 길로 성 밖에 수도암, 도성암 등의 암자가 있고 그 밑은 곧 우이동(牛耳洞)이며 하나는 동남문(東南門) 석가현(釋伽峴)으로 통해 사을한리(沙乙閑里)로 내려가는 길이며, 하나는 문수봉(文殊峯)을 넘어 창의문(彰義門)으로 통하는 탕춘대(蕩春臺)의 앞들이 내려다보이는 길입니다. (城有石門, 距寺可數百步. 歷寺門東南行, 路分爲三. 一, 由東門往來, 而城外有修道、道成等菴子, 其下卽牛耳洞也; 一, 由東南門釋伽峴, 而下抵沙乙閑里; 一, 踰文殊峰, 達于彰義門, 俯瞰蕩春臺前野)” 옛 지명을 현재 지명으로 바꿔 부연하면 중흥사를 지나 돌문(북한산성 쌓기 이전의 옛 성)이 있고 잠시 뒤, 길이 셋으로 갈라지는데 한 길은 대동문으로 통하며 그 밖은 우이동인데 수도암, 도성암이 있다. 또 한길은 동남쪽 문인데(보국문: 보국문 근처를 석가현이라 함, 칼바위능선 봉우리를 석가봉이라 했음) 그 밖은 정릉(사흘한리)이다. 또 오른쪽 길은 문수봉 넘어 창의문, 탕춘대(즉 세검정 방향)로 연결된다는 내용이다.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이 대동문 나와 우이동 방향에 도성암, 수도암이 있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소귀천이나 진달래능선과 우이동 종점 사이에 이 두 암자가 있었다는 말이다. 한편 조계사(현 종로에 있는 조계사가 아님)는 어디에 있었던 것일까? 성호 이익 선생이 남긴 유삼각산기(遊三角山記)가 있다. 1707년 봄이 무르익은 때 이익은 친구와 함께 동소문(혜화문)을 나서 조계동(지금의 수유리 아카데미하우스 계곡)으로 들어왔다. 조계사에서 하룻밤 묵으며 시도 짓고 석가령(칼바위) 넘어 산성으로 들어가 중흥사를 찾는다. 이때의 기록이다. “노적봉 아래는 중흥동인데 중흥사가 있다. 동쪽은 취봉이고 남으로 뻗어나가 고개를 이루는데 그 고개가 석가령이다. 고개의 동쪽을 조계라 하며 조계사가 있다. 절에 폭포가 있다. (露積峰之下爲重興洞 衆興寺在焉 東爲鷲峰 轉南迤爲嶺 嶺曰釋迦 自嶺以東曰曹溪. 曹溪寺在焉 寺有瀑)” 遊三角山記 李瀷 星湖先生全集에서 이 기록을 보면 아카데미하우스 계곡(요즈음은 구천계곡이라 부름)에 폭포가 있고 절은 거기에 있었다는 말이다. 그렇다. 북한산 국립공원 지도에도 표시된 구천폭포에 절터가 있다면 그 곳이 바로 조계사 터인 것이다. 이만한 정보가 있으니 이제 길을 나서 보자. 도성암은 세종대왕의 둘째 딸인 정의공주(貞懿公主)의 원찰이다. 정의공주 묘는 우이동에서 1.5km 정도 떨어진 고개 넘어 방학동에 있다. 도성암에 대해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삼각산 동쪽에 있다(在三角山東)’고 했으며, 북한지에는 ‘대동문 밖에 있다. 정의공주 원찰이다. 지금은 폐사되었다(在東門外 貞懿公主願刹, 今廢)’라고 기록돼 있다.

그런데 또 하나의 도성암이 있었다. 권상로 스님이 50여 년간 자료를 모아 70년대에 발행한 ‘한국사찰총서’에는 수유동 가오리(加五里)에 있었던 도성암도 소개하고 있다. 신녀(信女) 손덕인이란 이가 홀연히 한밤중에 신명(神明)에 의해 집 근처에서 옛 부처님을 발굴하고 1926년경 도성암이란 암자를 지었다는 것이다. 여러 신통한 일이 있어 상당히 유명했던 것 같다. 이 절의 뒤를 이은 절이 북한산 둘레길 가오리 냉골 근처에 있는 본원정사라 한다. 4호선 수유역 중앙차로에서 130번 버스로 환승한다. 기왕에 도성암을 찾아가려 하니 정의공주 묘에서 출발하는 것이 좋을 같아서다. 버스는 방학동을 돌아 정의공주·연산군묘 정류장에 선다. 공주는 변함없이 남편 양효공 안맹담(安孟聃) 곁에 잠들어 계시는구나. 세종과 소헌왕후 심씨 사이에서 8남 2녀가 태어났는데 언니 정소공주가 어려서 일찍 세상을 떠나니 세종대왕 내외에게는 정의공주가 유일한 딸로 사랑 받으면서 자랐다. 그녀는 남편과도 금실(琴瑟)이 좋았는데 술 좋아하던 남편이 일찍 세상을 떠나는 바람에 15년이나 과수댁으로 지낸 분이다. 길을 건너 골목에 있는 연산군 묘역을 지나간다. 북한산 둘레길을 따라 우이동으로 넘어 온다. 1km 조금 넘는 길이다. 둘레길을 계속 따라가면 봉황각·손병희 선생 묘역에 이른다. 잠시 봉황각에 들른다. 3.1운동 당시 33인 중 15명을 배출한 천도교의 교육기관이었다.(졸고 ‘이야기가 있는 길⑨ 지장암~도선사’ 참조) 1922년에 지어 1969년에 이곳으로 옮겨온 붉은 벽돌 건물(천도교 중앙총부)에도 들른다. 그곳에는 기미독립선언서 영인본이 벽에 걸려 있기 때문이다. 오죽 다급했으면 ‘오등(吾等)은 자(玆)에 아 조선(朝鮮)의 독립국임과…’에서 朝鮮을 鮮朝라고 교정도 못보고 배포했겠는가. 영인본의 鮮朝가 그 날의 다급함을 지금도 증언하고 있다. 천도교 측 인쇄소 보성사에서 고등계 형사 신철(申哲)에게 발각되었으니…. 손병희 선생의 사위 소파 방정환 선생이 사용하던 방도 둘러보고 그 곳을 떠난다. 도선사 방향으로 200~300m 오르면 우측으로 ‘지장암’을 알리는 안내판이 있다. 작은 다리를 건너 여염집 같은 지장암을 지나 산길을 약 100m 오르자. 무너져 내렸으나 정성들여 싼 석축이 눈길을 잡는다. 그 위로는 비교적 넓은 공터에 초석과 장대석, 기와편이 흩어져 있다.

청자(靑瓷)인지 분청(粉靑)인지 구분이 잘 되지 않는 푸르스름한 회색 자기 파편도 눈에 띈다. 옆 계곡 흙 속에도 기와 파편들이 박혀 있고 내려오는 길 아래 쪽 밭에도 기와 파편들이 많이 보인다. 서울에 청자 도요 터가 있다고 하면 사람들이 믿지 않는다. 그러나 왜구에 시달린 조선 왕조는 강진 등 바닷가의 도요지를 폐쇄하고 도공들을 서울로 불러들였으니… 규모도 작지 않았던 절이다. 수도암이나 도성암과 관련 있는 절터는 아닐까. 언젠가 발굴이 돼 더 많은 정보가 나올 때까지는 기다릴 수밖에 없다. 다시 돌아 나온다. 찻길을 따라 5분 오르면 선운교에 이른다. 60, 70년대에 요정 선운각이 있었기에 선운교가 된 것이다. 이곳에서 북한산 길은 둘로 나뉜다. 좌측은 계곡 길로 예전 선운각에서 고향산천을 거쳐 이제는 할렐루야 기도원이 된 한옥 건물들이 즐비한 계곡길이다. 우측은 찻길이지만 산길 능선을 통해 도선사, 백운대로 이어지는 길이다.

오늘은 좌측 대동문에 이르는 계곡길을 택한다. 요즈음에는 ‘소귀천계곡’이라 부르는 곳이다. 소귀(牛耳)를 표현한 이름인 것 같다. 예전에 어떤 이들은 이 계곡을 ‘홀아비계곡’이라 불렀다. 유래는 알 수 없다. 혹시 홀아비 바람꽃이 있었던 것은 아닐런지. 할렐루야기도원을 지나는데 ‘통곡의 벽’이라고 써 놓은 바위 앞에 기도하는 이들이 바위를 붙잡고 열심히 갈구하고 있다. 생소한 풍경들이 많다. 60, 70년대 군사정권 시대에는 삼청각, 대원각 등과 더불어 ‘요정 정치’의 한 축을 형성하던 곳이라서 마음대로 다닐 수도 없었던 길이다. 그때 골짜기 자연이 파괴되더니 국립공원이 됐음에도 영영 자연은 돌아오지 못하고 있다. 이제 기도원을 지나 계곡을 오른다. 1km 쯤 왔을까, 청자편들이 흩어져 있다. 우측 등성이를 살피니 더 많은 파편과 청자 구울 때 쓰던 받침돌들이 눈에 띈다. 가마는 무너져 확인할 수 없으나 청자 도요지임에 틀림없다. 연전 서울시립박물관에서 우이동과 수유리 지역에 지표 조사를 해 청자 도요지 7개소를 찾았다고 한다. 우이동 그린파크 주변과 수유리 백련사, 이준 열사 묘역 주변이라고 한다. 우이동 솔밭 위 보광사 경내에도 상당한 규모의 청자 도요지가 있었는데 얼마 전 가보니 절 증축에 밀려 모두 사라져 버리고 흔적도 없었다.

사람들에게 서울에 청자 도요지가 있다고 하면 좀처럼 믿으려 하지 않는다. 그러나 서울 주변에는 의외로 청자 도요지, 백자 도요지가 많이 자리잡았었다. 왜 그랬을까? 주 요인은 왜구(倭寇)의 침범이었다. 1223년(고려 고종 10년)을 시작으로 고려말 40여 년은 왜구의 창궐이 극심했고 조선초 세조 연간까지도 왜구의 약탈이 그치지 않았다. 이러다 보니 1300년대 후반에는 섬에 거주하지 못하게 하는 공도(空島) 정책을 실시했고, 바닷가 읍(邑)도 폐쇄하는 폐읍(廢邑) 정책도 썼다. 이때 강진, 부안 등지의 도요지 대부분이 폐쇄되고 도공들은 내륙으로 옮겨갔다. 우이동, 수유리의 청자 도요지도 이때 생긴 것이 아닐까 추측하고 있다. 14세기 후반이 될 것이다. 절터였을 만한 곳을 철저히 짚으면서 대동문으로 간다. 일행 중 한 분이 “절터는 어찌 아느냐”고 묻는다. 달리 방법이 있겠는가? 한 평이라도 평평한 땅이 있는지, 기와 파편은 있는지, 초석이나 축대의 흔적은 있는지, 주변에 샘이 있는지 등을 본다. 탑이나 부도가 있으면야 더 말해 무엇하겠는가? 좀처럼 절터가 나타나지 않는다. 대동문이 바로 앞인데…. 바로 그때 발밑에 기와 파편들이 걸린다. 대동문 전 성벽 쪽 100m 지점의 넓은 공터에서다. 봄눈 쌓인 터로 들어가 초석과 기와편을 찾는다. 틀림없는 절터였다. 도성암, 수도암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진달래능선에는 절터가 없었으니 이곳이 도성암, 수도암 터일 가능성이 높다. 대동문으로 들어가니 아직 바람이 차다. 산성 안을 내려다보고 다시 나온다. 조계사(曹溪寺)를 찾으러 가야지. 대동문 앞 능선에는 아카데미하우스 방향을 가리키는 이정표가 있다. 그 이정표 방향의 능선 길로 간다. 잠시 후 길은 우측으로 급경사를 이룬다.

5분이나 지났을까, 가파른 내리막을 내려오는데 주위를 둘러보니 좌측 골짜기 위로 가지런한 석축이 보인다. 다가가 보니 한 뼘 공터에 기와 조각 몇 개가 보인다. 아마 쉬어가는 정자가 있었을 것이다. 조계동(구천계곡)에서 대동문 오르는 길이 가파른 길이니 숨 좀 돌리라는 선인들의 배려(配慮) 흔적일 것 같다. 계속 골짜기 길로 내려간다. 한 500m 갔을 때 가지런한 석축이 다시 나타나면서 기와편, 경질의 도기편을 찾을 수 있다. 계곡 옆에 궁둥이 비비고 자리잡은 옛 절터(암자 터)이다. 이름은 알 수가 없다. 조계동에 조계사 말고 다른 절이 있었다는 기록을 아직 본 적이 없으니 기다려야겠다. 그런데 참으로 그 옛날 이 골짜기에 무엇 한다고 절을 세운 것일까? 누가 무슨 사연을 남긴 것일까? 바위가 어우러진 골짜기 길은 가파르기는 해도 아름답다. 북한산에서 바윗길, 폭포처럼 흐르는 계곡수를 가진 곳은 이곳만 한 곳이 없을 것이다. 그런 길을 1km 쯤 내려온다. 구천폭포(옛 조계폭포)가 기다리고 있다. 북한산에는 제대로 된 폭포가 없는데 그나마 이 폭포가 체면을 살려 준다.

주변에는 비교적 평평하고 넓은 평지가 있다. 그렇다면 성호 이익 선생의 유산록(산행기)에서처럼 폭포를 가진 절터를 찾을 수 있으리라. 이곳 지형은 아카데미하우스에서 올라오면 우측 길은 폭포를 지나 대동문으로 이어지고(필자가 내려온 길) 좌측으로 갈라진 길은 평이하게 올라 칼바위능선을 통해 보국문(석가령)으로 오른다. 절터는 칼바위 능선 방향에 있다. 이 지역 주민들이 이용하는 약수에 배드민턴장을 만들어 놓았는데 주변에 많은 기와편과 전돌이 보인다. 절터를 깎아 배드민턴장을 만든 것이다. 가슴이 답답하구나. 실록에도 기록을 남기고 유산록에도 기록을 남긴 유서깊은 조계사 터는 이렇게 사라졌다. 이곳에서 100m 정도 오르면 또 하나 건물터가 있다. 아마도 조계사 여러 건물 중 하나였을 것이다. 용도를 알 수 없는 작은 바위도 두 개 있는데 빗장을 걸었는지 홈이 파여 있다. 시원한 약수를 한 잔 마신다. 이 절에서 성호 이익 선생도 이 물을 드셨을 것이다. 지는 해를 등 뒤로 받으며 아카데미하우스 방향으로 내려간다. 입구 왼쪽에는 이준 열사 묘역이 있다. 경건하게 경배드린다. - 이한성 동국대 교수 교통편 4호선 수유역 3, 6번 출구 ~ 중앙 버스정류장 130번 환승 ~ 정의공주·연산군 묘 하차 걷기 코스 정의공주 묘(둘레길) ~ 연산군 묘 ~ 봉황각 ~ 절터1(지장암 위) ~ 할렐루야기도원 ~ 청자도요지 ~ 절터2(대동문 아래) ~ 대동문 ~ (아카데미하우스 방향) 정자터 ~ 절터3 ~ 구천폭포 ~ 절터4(조계사터) ~ 이준 열사 묘역 ※‘이야기가 있는 길’ 답사에 독자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매월 마지막 토요일에 함께 모여 서울 근교의 마애불과 문화유적지 탐방을 합니다. 3, 4시간 정도 등산과 걷기를 하며 선인들의 숨겨진 발자취와 미의식을 찾아갑니다. 참가할 분은 comtou@hanmail.net(조운조 총무)로 메일 보내 주시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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