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68-269호 대구 = 박정우 기자⁄ 2012.04.09 15:09:21
경당 장흥효의 11세 종손 장성진(73) 씨는 “누추한 집안이라 자랑할 것도 없는데 어인 일이시냐”고 취재진을 향해 먼저 정중한 태도로 물었다. 그에게서 명문가 주인으로서의 권위의식은 찾을 수가 없다. 소박하고 겸손하고 친절하다. 논리 정연한 말솜씨가 아니라면 평범한 촌부와 다름없다. 얼마 전부터 이곳 경당종택이 음식디미방의 저자 장계향의 친정이란 사실이 알려지면서 전국 각지에서 밥손님이 몰려들고 있다. 그들의 눈에는 한국을 대표하는 명문가 종손도 한낱 친절한 식사도우미에 불과하다. 심지어 양반가에 대한 단순한 호기심에 최근 이곳을 찾은 한 40대 여성은 “종손이면 학처럼 고고한 기품이 있고 우아할 줄 알았는데 당신도 나와 같은 평범한 사람이라 실망스럽다”는 무례한 말을 하기도 했다. 체면을 중시하는 것이 양반의 미덕이라 우기는 편견이 우습고, 면전에서 그런 이야기를 내뱉는 경박함에 속상할 만도 했을 터. 하지만 종손은 그냥 웃어 넘겼다. 그 모든 것을 자신의 운명으로 여기는 것이다.
“봉제사 접빈객, 제사를 모시고 손님을 대접하는 것이 종손의 도리라 하지 않습니까. 게다가 먹고 살기가 어렵다보니 종손의 품위만 고집했다간 제사도 못 지낼 형편이에요. 평생을 그렇게 살아왔습니다.” 아닌 게 아니라 종손은 그의 나이 30대 초반에 대구에서 겨우 몇 년 공무원 생활을 했던 것을 제외하고는 일생을 종택에서 살았다. 종부 권순(72) 씨도 스물다섯에 시집을 온 뒤 한평생 그의 곁을 지켰다. 종부의 친정은 영양 청기의 산택재 권태시 선생의 종가다. 종부는 종가에서 태어나 종가로 시집왔으니 평생을 종가에서 산 사람이다. 종손 내외는 어려운 형편에도 봉제사 접빈객의 도리를 놓치지 않기 위해 애썼고, 경당 선생의 사상과 업적을 알리는 일에 일평생 매진했다. 경당선생기념사업회를 중심으로 ‘경당 선생 문집 국역’ 작업을 완성하고, 종가 근처에 ‘유허비’를 세워 선조의 자취를 길이 남겼다. 최근에는 조선중기 대표적 유학자의 일상을 보여주는 ‘경당일기’의 국역 작업을 진행 중이다.
대대로 손이 귀한 집안에서 아들을 둘이나 생산했고 손자도 줄줄이 얻었다. 장남을 장가보낼 때의 일화를 설명할 때는 자긍심도 묻어난다. 종손의 장남은 울산에 살던 1남4녀의 장녀와 연애 끝에 혼인했다. 사돈댁도 만만찮게 뼈대 있는 가문이라 가풍이 엄했다. 사돈은 단지 중매가 아닌 연애결혼이란 이유만으로 사위를 탐탁지 않게 여겼다. 사돈의 생각이 바뀐 것은 혼인식 때다. 결혼은 전통 예법대로 치러졌는데 어마어마하게 큰 상이 중앙에 놓였고 하객으로는 도포 차림의 갓 쓴 명문가 어른들이 구름떼처럼 몰렸다. 사돈의 입이 떡 벌어졌다. “다른 지역 분이시라 경당에 대해서는 들어본 적도 없던 겁니다. 기품 있는 하객들이 모인 성대한 혼례를 보고서야 자신의 딸이 시집 잘 갔다는 생각을 하시는지 흐뭇한 미소를 짓더군요.” 겸손하게 낮추되 품위를 잃지 않는 자세가 지금 퇴계 종가를 지키는 16대 종손 이근필(80)씨와 꼭 닮았다. 경(敬). 사람을 공경하고 존중하는 퇴계의 정신이 제자 경당에게 고스란히 전해졌으니 어쩌면 당연한 이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