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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옥 특집]“한옥의 푸르름에 풍덩 빠졌어요”

황두진 건축가 “문살·창살·공포에서 최고 공간을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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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nbnews 제268-269호 왕진오⁄ 2012.04.10 16:42:42

2004년 무무헌을 시작으로 가회동 L주택, 쌍희재, 동인재, 취죽당 등 서울 북촌 지역에 다수의 한옥들을 설계해 유네스코가 수여하는 아시아-태평양 문화유산 상을 수상한 건축가 황두진. 그는 북촌 지역 한옥들을 설계하면서 ‘우리 시대 한옥은 어떠해야 하는가’를 고민했고, 그 결과를 “한옥만의 고유한 가치를 지니면서도 현대인의 삶을 담을 수 있는 주택”으로 정리했다. 그가 만든 가회헌은 서양식 철근 콘크리트 구조와 전통 나무 구조의 한옥 구축술이 만나 서로를 관통하고 중첩하면서 복합적인 경관을 만들어낸다. 황 건축가는 전통적인 방식을 답습하기보다는 현대의 건축 문법으로 한옥을 해체해 재구성하려 했다. 재료나 구조 면에서 급진적인 실험을 했다. 이는 나무 골조 위에 흙을 바른 뒤 기와로 마감하는 습식 전통 한옥 지붕은 공기 조화나 전기 배선 설비 같은 현대식 설비를 집어넣기 힘들기 때문이다. 그는 이천 골프클럽 게스트하우스의 지붕을 흙이 아닌 나무 합판 위에 기와를 얹은 건식 구조로 만들었다. 통풍에 대한 걱정을 없애고 지붕과 천정 사이의 공간에 공조, 배선, 스프링클러까지 넣을 수 있었다. 이러한 그의 실험은 통인시장 입구, 다층의 무지개떡 한옥 등을 통해 한옥과 현대식 건축 사이의 경계를 넘나들고 그 경계를 확장시킨다. 더 이상 한옥이 아니면서도 한옥이 추구해 온 공간적 가치를 구현하는 방법을 모색한 결과다. 다음은 황 건축가가 말하는 ‘나의 한옥 공간 이야기’다. 한옥은 내게 ‘다공성 연속체(porosity continuum)’ 내가 알기에 한옥만큼 풍성한 다공성(多孔性, porosity: 스펀지처럼 구멍이 많음)을 담은 건축물은 없다. 그것은 건축의 전 스케일과 요소에서 발견된다. 배치에서 마당은 건물 못지않게 중요한 요소다. 마당은 한옥의 다공성에 기여하는 가장 큰 요소의 하나다. 건물과 마당이 만나는 접점에서 툇마루를 곁들인 처마 아래 공간이 존재한다. 구획하는 벽이 없이 개방된 누마루나 대청마루 등 역시 공간적 다공성에 크게 기여한다. 그 다음 단계의 다공성은 구조에서 발견된다. 가구식(架構式, 짜맞추기 식) 구조 자체가 평면과 단면과 입면의 다공성을 확보하기에 유리하다. 특히 지붕이나 공포는 구조 자체가 다공성을 내포하고 있는 좋은 예다. 서까래 위에 덧서까래를 걸어 이중 지붕을 만들면 다공성은 증가하며, 이는 각종 배관의 설치와 점검을 위한 공간으로 유용하게 쓰인다.

한옥이 갖는 고상식 건축의 특성상 또 다른 공간이 기단부에 존재하는데 나는 이 둘을 묶어 '마법의 공간'이라 부른 바 있다. 그 다음은 입면의 다공성이다. 한옥의 입면은 가구식 구조의 특성상 하중을 받지 않으므로 아주 섬세하고 다양한 패턴의 적용이 가능하다. 내가 설계한 취죽당 안채의 마당 쪽 입면은 벽이라고는 거의 없이 순전히 창과 문으로만 이루어져 있다. 문살과 창살의 다양한 패턴은 한옥의 매력 가운데 하나이며, 이것이야말로 입면의 다공성이 극한으로 표현된 예라 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재료 자체의 다공성이 있다, '한옥은 숨을 쉰다'는 표현이 있는데 이것은 나무와 창호지, 회벽 등 한옥의 내부와 외부를 연결하는 재료들이 갖는 미시적 다공성에 근거하고 있다. 이것은 무생물인 건자재가 달성할 수 있는 가장 높은 경지일지 모른다. 마치 생명체처럼 호흡하는 건축이란 매우 매력적인 개념이다. 이 모든 것이 다공성이라는 개념으로 설명될 수 있다는 것 또한 근사하다. 나는 이런 측면에서 한옥을 ‘다공성 연속체’로 부르고자 한다. 근대에 들어선 뒤 한옥의 변천사는 사실상 공극율(孔隙率: 빈 공간의 비율) 감소의 역사였다. 소위 개량형 한옥이 만들어지면서 대청마루의 앞뒤에 창호를 설치하게 된 것이 그 첫 번째 단계다. 처마의 깊이가 줄어들거나 아예 처마 아래를 덧대어 집안 공간을 넓히려는 시도가 그 두 번째 단계다. 마지막으로 음식점 등에서 종종 그런 것처럼 중정(中庭, 가운데 마당)을 덮어버리는 경우 한옥은 그 고유한 성격의 대부분을 상실하고 만다. 현대식 박스 구조에 한옥의 겉면을 덧붙인 것 같은 이상한 결과만 얻어지는 것이다. 한옥은 3(+2)개의 기하학 한옥의 아름다움은 풍성한 기하학에서 나온다. 한옥의 기하학은 기단, 몸체, 지붕의 큰 세부분과 그 사이에 낀 주춧돌과 공포라는 두 개의 중간 영역으로 구성된다. 우선 제일 아랫부분을 보면 크고 작은 돌과 흙이 모여 기단을 이룬다. 그 기하학의 성질은 적층, 고정, 분리 등이다. 그 다음에는 첫 번째 중간 영역인 주춧돌이 나온다. 주춧돌은 재료적으로는 기단의 연속이지만 종종 자연석이 아닌 다듬은 돌을 써서 그 성격을 분리하기도 한다. 그리고 그 배치는 철저하게 바로 윗부분인 몸체의 논리를 따른다. 그 기하학적 성질은 위치, 표시 등으로, 기단과 몸체 사이를 매개하는 것이다. 그 다음은 생활이 이루어지는 공간을 담는 목가구 부분, 즉 몸체다. 엄격한 직교좌표계가 적용되는 부분이기도 하다. 그 기하학적 성질은 결합, 분절, 개방, 제한 등이다. 그 다음으로 두 번째 중간 영역인 공포(처마 끝의 무게를 받치기 위하여 기둥머리에 짜 맞춘 목제 구조물)가 있다. 공포는 구조적으로 말하자면 일종의 캔틸레버(cantilever, 한쪽 끝이 고정되고 다른 끝은 받쳐지지 않은 상태로 되어 있는 보) 형태인데 그것을 단일 부재가 아닌 부재의 얼기설기 조합으로 해결함으로써 그 내부에 정교한 공간, 즉 다공성을 내포하는 성과를 거둔다. 그 기하학적 성질은 내포, 전개, 지지다. 마지막으로 지붕이 있다. 여기서 한옥의 기하학은 기다렸다는 듯이 폭발적으로 개화한다. 지붕 아래의 직선과 직선이 만나는 직교좌표계(直交座標系)의 엄격함에서 홀연 벗어나 상승하며 비상하는 것이다. 현수곡선(懸垂曲線)과 3차원 곡연의 세계가 펼쳐진다. 이처럼 한옥은 다양한 기하학과 서로 다른 물성이 결합한 고도의 다공성 건축물이다. 이런 구조는 결과적으로 관념과 감각 모두에 풍성함을 제공한다. 다만 한국의 건축가들이 그동안 한옥의 이런 특성을 적극적으로 활용하지 못한 채 목조의 보와 기둥으로 구성된 직교좌표계의 '칸'에만 집중한 것은 매우 유감스럽다. 이런 구조로 선비정신의 청빈함과 절제를 이야기하지만 내가 아는 한 선비들은 상상력이 풍부하고 얽매이지 않고 즐길 줄 아는 매력적인 사람들이기도 했다. 이런 꽉 막힘은 한국 현대 건축에 극도의 조형적 지루함과 기하학의 빈곤을 가져왔다. 고를 반찬이 없는 식탁 같은 상황이 된 것이다. 내 반찬이 부실하니 남의 식탁을 기웃거리게 된 것도 무리는 아니다. 젊은 세대들이 자유형태(프리폼) 건축에 열광하는 것은 이러한 관점에서 해석될 수 있는 흥미로운 현상이다. 한때 우리의 상상력을 제한했던 한옥이 이제 오히려 우리를 더 자유롭게 해 줄 수 있는 가능성을 찾아 나는 그 시퍼런 물에 뛰어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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