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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라진 공간을 우린 그냥 스쳐가지만…

시간 속에서 변화하는 공간을 얘기하는 설치작가 이수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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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nbnews 제271호 김대희⁄ 2012.04.23 13:22:38

도시와 자연의 관계, 도시가 유지되기 위해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는 불편한 일 등 오늘날 도시를 다루는 미술 작가들은 필연적으로 삶의 조건과 마주한다. 이미 해외에서는 노골적인 일상문화에 대해 분석하거나 근심하거나 집요하게 기록하고 때론 저항하는 것이 미술의 주요 테마 중 하나가 되고 있다. 그동안 예술가들은 수많은 작업을 하면서도 끊임없이 자신들의 정체성을 고민하고 생각해왔다. 그 중에는 삶과 현실 등 사회와 싸워나가거나 아니면 타협하는 등 자신이 원치 않는 길을 가는 작가들도 많았다. 현실도 중요하고 예술적 가치 역시 등한시할 수 없는 ‘현실인과 창작인의 간극’에서 정체성 혼란까지 느끼는 예술가에 대해 해법을 강구하고 새 지향점을 찾아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한 미술 관계자는 “적어도 예술이라는 것을 염두에 두고 어떤 행위나 작업을 하는 사람이라면 그것이 과연 사람들 속에서 무엇을 할 수 있으며 또 누구를 위한 것인지 고민해야 한다. 사회 속 문제점을 짚어내고 이야기하는 게 예술가가 해야 할 일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먹고 산다는 점은 중요한 문제임에 틀림없지만 상업적 가치와 예술가로서의 진정성 가운데 어떤 것을 우선할지 고민하지 않을 수 없다”고 말했다. 아울러 그는 “하나의 작품을 완성하기 위해 많은 노력과 시간을 들이는 것도 중요하지만 현재 벌어지는 삶을 주목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사회적으로 큰 이슈가 아니더라도 우리가 돌아보지 못하고 놓치는 어떤 것, 삶의 균열을 뚫고 나오는 부조화 등은 널려 있다는 얘기다.

최근 예술가들의 정체성이 의심받는 현실에 자신의 역할을 찾아 나서는 작가들이 생겨나고 있다. 감성에 의존하는 기존 작가들과 달리 사회 속 현상들을 주제로 자신의 정체성을 찾고 구축하는 예술가들이다. 이렇게 다양하게 변해가는 사회와 환경 속에서 우리가 무관심하게 지나치기 쉬운 일들에 대해 문제를 제시하고 다시 한 번 돌아보기를 바라는 작가들을 만나 그들의 동기나 목적을 들어봤다. “버려진 공간과 장소에 대해 다시 생각해요” 끊임없이 변하는 우리 사회 속 환경은 결국 시간의 흐름 우리 주변을 주의 깊게 살펴보면 각종 버려진 폐품들을 쉽게 볼 수 있다. 하지만 그냥 스쳐지나갈 뿐 이것들에 관심을 갖는 사람은 드물다. 일하는 회사나 집, 동네 슈퍼, 음식점, PC방 등등 수많은 공간과 장소에서 우리는 삶을 살아간다. 나 자신과 직접적으로 연관되지 않는 한 이런 일상생활 속 장소에 대해 관심을 갖기 힘들다. 이미 적응된 환경이기 때문이다. 가끔 길을 지나다보면 옷가게가 빵집으로 바뀌었거나 육교가 있던 자리에 건널목이 생기기도 하고 버스정류장이 옮겨가기도 하는 등 삶의 환경은 수없이 변한다. 변할 때만 조금 관심을 끌 뿐 그 뒤에 사람들은 원래 그랬던 것처럼 적응하며 살아간다. 하지만 그렇게 변해버린 공간이나 장소는 누구에게는 추억이 될 수도, 아픔이 될 수도 있다. 버려진 물품이나 장소가 예술가의 손을 거친다면 어떻게 될까? 관심을 받지 못했던 이러한 것들에 생명을 부여하고 다시금 돌아보자는 이수진 작가를 서울 평창동 가인갤러리에서 만났다.

“내 주변 사물들이 시간이 지남에 따라 변하는 모습에서 재미를 느꼈고, 끝없이 변화하는 우리 사회 환경을 보면서 시간성에 관심을 갖게 됐어요. 처음에는 주위에 있는 것들에 대한 호기심과 관심으로 시작됐는데 점점 확대되면서 사물에서 공간적인 장소로까지 넓어졌죠. 없어지고 생기기를 반복하는 현 사회의 모습을 더 자세히 들여다보게 됐어요. 모두 시간이 변하면서 생기는 결과들인 거죠.” 일상적인 사물과 공간에 특히 관심이 많은 이수진은 도시 속 버려진 폐오브제로 작업을 해왔다. 그녀의 작업 재료는 트로피, 상장, 유리관을 만들고 남은 유리조각, 사각 비누, 방부제 등 우리가 주변에서 쉽게 보고 느끼는 것들이 대부분이다. 사물이 모여 공간이 되듯 그는 시간성에 대한 주제로 2010년부터 사물을 넘어 공간이나 장소를 대상으로 설치작업을 하고 있다. “우리나라는 주변 환경이 빠르게 변해요. 이러한 변화에 모두 무감각하죠. 어떤 공간이든지 다른 공간처럼 모든 게 다 이뤄져요. 장소에 대해 함께 생각하고, 무관심을 관심으로 만들고 싶어요. 바라보는 시선은 모두 다르겠지만 한번이라도 다시 바라보도록 말이죠.” 그녀는 곧 사라질 공간에 대한 프로젝트도 진행하고 있다. 폐쇄된 군부대와 미아리 텍사스촌 등 점차 사라지는 장소에 대한 작업으로, 현장에 직접 설치 작업을 하거나 갤러리로 옮겨와 전시를 할 예정이다. 일상생활에서 늘 보던 공간이 아닌 숨겨져 보이지 않는 공간으로 주목시키고자 한다.

현재 시간성을 주제로 공간이나 장소를 얘기하는 그녀의 재료는 포장할 때 쓰는 자동밴드다. 자동밴드 또한 흔하게 볼 수 있는 재료로 ‘장소에 드로잉을 한다’고 보면 된다. 장소에 설치작업을 하기에 적합해 쓰는 관심 재료 중 하나일 뿐 주재료는 아니다. 가인갤러리 전시에서 보인 작업은 갤러리 외벽을 자동밴드로 뒤덮어 일률적으로 내린 것이다. 바람과 외부 환경에 의한 벽(공간)을 표현한 작품이다. 보이지 않는 환경을 드러내는 데 관심을 가진 그녀가 공간의 유연함을 얘기하면서 갤러리에서 쓰지 않는 공간들을 활용한 결과다. 주변의 많은 버려진 공간을 얘기하면서 다시 돌아보자고 하는 그녀는 올해 본격적으로 ‘보이지 않는 장소들의 현실성’을 짚어볼 것이라고 했다. 사용하지 않는 공간들을 다루는 작업이다. 일상적 공간이라도 예술가의 손을 거치면 다르게 보이고 관심을 끌기 쉽다. 조형적인 작품을 만들기보다는 그 공간에서 벌어지는 상황에 맞춰 드러내 보일 계획이다.

“일반적인 전시와 달리 준비를 마치고 하는 게 아녜요. 전시 내내 작업이 진행되며 전시가 끝날 때 쯤 완성되기도 해요. 설치가 진행되는 동영상을 촬영해 남기고 전시도 하려 해요. 설치 작업으로 시작해서 영상, 드로잉 작업으로까지 파생되는 거죠. 이렇게 행하는 것들은 퍼포먼스로도 볼 수 있어요.” 이처럼 많은 공간과 장소를 찾아다니는 그녀이기에 웬만한 지역의 교통수단은 꿰뚫고 있다. 어느 지역을 가려면 몇 번 버스를 타야 하는지 노선을 외울 정도라고 한다. 그리고 장소가 정해지면 그곳에 자주 머무르며 주변 환경을 조사한다. 다양한 공간을 찾아가고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며 그곳에서 체험한 경험과 생각을 작업으로 표현한다. 그 공간에서 찾을 수 있는 숨은 스토리를 말하고, 장소와 소통하며 작업한다. “공간들을 뒤지고 조사하다보면 사회적, 정치적, 개인의 욕망과 부딪히게 되요. 공간이 변하거나 사라지는 이유죠. 아직은 이러한 부분들을 크게 드러내지 않겠지만 작업이 더 변하고 점차적으로 문제점들을 짚어나가게 되겠죠.”

공간 선정에 대해서는 그녀만의 의미부여 방법이 있다. 남들이 의미 없다고 보는 공간도 그녀에게는 눈에 띄는 공간이 되기도 한다. 예를 들어 흡연실은 평범하면서 일상적인 곳이지만 그녀에게는 재미있는 공간이 된다. 직장인들이 스트레스를 풀고 잠시 기분전환을 하면서 여러 이야기가 오고가는 공간이기 때문이다. 사회적으로 금연이 추진되면서 생길 수 있는 문제들을 흡연실을 통해 표현할 수도 있다. 사라지고 생김은 일상적이지만 다시 한 번 확인시켜주면서 생각하게 만들 수 있다. 결론을 지어줄 순 없지만 그 속에 개입해 함께 고민하자는 얘기다. 장소가 결국 모든 사람에 대한 이야기가 된다. 시간성이라는 큰 틀 속에서 장소, 환경과 소통하며 사회적 맥락을 찾아나가는 그녀는 금천 지역에 폐쇄된 군부대 지역에서 또 다른 이야기를 시작하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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