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대 노인과 10대 여고생이 손을 잡고 있다. 무슨 생각이 드는가? ‘연인’이라는 단어를 떠올리기는 쉽지 않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가장 많이 떠올리는 이미지는 손녀와 할아버지일 것이다. 혹은 ‘적절치 못한’ 관계? 그런데 이때 적절치 못하다는 것은 누가 만들어낸 이미지일까? “나이 들면 욕망도 없고 사랑도 못 하냐”고 되묻는 영화가 ‘은교’다. 4월 26일 개봉하는 영화 ‘은교’는 박범신의 동명 소설이 원작이다. 사람들에게 칭송받는 위대한 시인 이적요와 그의 제자이자 ‘가짜 베스트셀러 작가’인 서지우에게 17살 여고생 은교가 나타난다. 이들 셋은 서로 지니지 못한 것을 욕망한다. 이적요는 은교의 순수함과 젊음에 매혹돼 흔들린다. 서지우는 자신이 스승 이적요의 천재적인 재능에 못 미치는 ‘멍청이’라는 사실에 질투를 느낀다. 은교는 할아버지 이적요를 동경하면서도 그와 서지우, 즉 두 남자 사이의 끈끈한 관계에서 알 수 없는 외로움을 느낀다. 이적요는 박해일, 서지우는 김무열, 은교는 김고은이 맡았다. 이미지 캐스팅은 적절해 보인다. 박해일은 이적요가 자신의 늙어버린 몸을 바라보며 좌절을 느끼는 장면에서 성기까지 노출하며 열연을 펼쳤다. 이번 작품이 데뷔작인 김고은은 신선한 얼굴로 은교의 싱그러운 면을 보여주다가도, 이적요의 상상 속에서 이뤄지는 베드신과 현실에서 행하는 서지우와의 베드신에선 전라 노출을 감행하는 도발적 면모를 보인다. 김무열은 스승 이적요를 존경하면서도 그의 재능에 열등감을 느끼는 복잡한 심정을 고요한 표정 속에 철저히 담아낸다. 소설은 이적요가 죽은 지 1년 뒤 은교에게 남긴 글에서 충격적인 사실이 드러나는 것으로 시작된다. 하지만 영화에서는 모든 상황이 현재 시점으로 진행된다. 소설에서는 천천히 서사적으로 전개됐던 세 인물의 이야기가 영화에서는 보다 빠르고 직설적이며, 현장감 있게 펼쳐진다.
소설에서는 다소 묵직하고 진지하게 표현됐던 장면들이 영화에선 순수하게, 어떻게 보면 재밌게 표현된다. 이런 부분이 소설을 읽고 나서 영화를 보는 재미랄 수 있겠다. 한 예를 들자면 은교의 소중한 거울이 절벽 아래로 떨어졌을 때 은교를 위해 거울을 주우려 아슬아슬하게 산을 타고 내려가는 이적요의 모습이 그렇다. 다리를 부들부들 떨면서도 거침없이 절벽을 내려가는 그의 모습은 위험하기보다는 첫사랑에 빠진 소년 같이 순수하다. 그런 모습에서 사람들의 웃음이 터져 나오는 장면을 영화 몇 군데에서 찾을 수 있다. 반면 소설 속에서는 이런 장면은 심각한 분위기다. 영화의 하이라이트라고 할 수 있는 이적요의 상상 속 장면도 그렇다. 은교가 이적요의 머리를 자신의 허벅지에 뉘이고 헤나 문신을 해줄 때 쭈뼛거리고 머뭇머뭇하는 이적요의 모습은 평소의 근엄한 모습이 아니어서 괴리감을 주는 동시에 웃음을 자아낸다. 하지만 이 뒤에 이어지는 이적요의 상상 속 은교와의 베드신은 소설에 비해 아쉬운 감이 있다. 소설 속에서는 청년으로 돌아간 이적요가 은교와 관계를 가질 때 은교가 70대 할머니로부터 17살 소녀로까지 변신하는 환상적인 이미지로 표현된다. 은교의 젊음에 매혹되고 이를 욕망하면서도 나이에 상관없이 은교를 순수하게 사랑하는 이적요의 마음을 드러낸 소설 속 장면이다. 하지만 이를 영화로 표현하기에는 어려운 감이 있었던 것 같다. 영화에서는 이적요가 욕망하는 ‘젊고 싱싱한 청년 이적요’가 소녀 은교가 베드신을 펼친다. 이 영화의 베드신은 개봉 이전부터 검색어 상위권을 차지할 정도로 뜨거운 감자였다. 하지만 이적요가 욕망하는 것은 성적인 욕망만이 아니다. 그는 찬란한 젊음에 대한 그리움과 순수함에 대한 갈망을 지니고 있다. 그런데 영화에서는 이런 그의 내적인 측면보다는 성적인 욕망이 유독 많이 부각된 것 같아서 아쉬운 점도 있다. 은교는 시종일관 짧은 치마와 바지를 입고 등장하며, 걸레질을 할 때나 물건을 옮길 때 허리라인과 속살을 살짝살짝 드러낸다. 이런 장면이 자주 등장한다.
또한 이적요의 상상 속 은교는 언제나 알몸으로 등장하거나 흰 티셔츠에 팬티만 입고 뛰어다닌다. 순수성과 젊음의 싱그러움이 흰색 옷을 입고 발랄하게 웃으며 뛰어다니는 소녀의 모습으로만 모두 설명되기엔 다소 부족한 점이 없지 않나 싶다. 70세 노인과 17세 소녀의 사랑 다룬 ‘은교’. 소설에선 아련하고 중후한 맛, 영화에선 경쾌하고 젊은 맛 느낄 수 있어. 소설을 읽어본 입장에서는 영화의 결말 부분도 아쉬운 장면으로 남는다. 이적요와 서지우의 갈등이 결국 폭발하고 한 동안 시간이 지난 뒤 은교가 이적요를 찾아와 흐느끼는 장면은 무언가 더 이야기하려다가 만 것 같은 느낌이다. 만족스런 여운을 남기기보다는 부족하다고 여겨진다. 소설에서는 이적요가 남긴 글을 읽은 은교가 흐느끼는 장면으로 마무리된다. 똑같이 흐느끼는 장면이지만 소설 쪽이 주는 여운과 임팩트가 더 크다. ‘머릿속 상상으로 읽는’ 소설의 재미와, 장편소설 내용을 129분 안에 담아내야 하는 영화의 차이일 수 있다. 소설에서보다 더 명쾌하게 설명되는 부분도 있다. 영화에서는 소설보다 은교가 더 강하게 자신의 생각과 주장을 내세운다. 이적요와 서지우도 마찬가지다. 소설 속에서 서로 하고 싶은 말을 하기보다는 노트에 글을 적으며 분을 삼키던 이들은 영화에서는 상대방에게 직접 “더러운 스캔들이다” “도둑놈 같으니” “꺼져버려” 같은 말들을 크게 외친다. 소설에서 함축적·상징적으로 표현돼 이해에 다소 어려움을 주었던 부분이 속 시원하게 드러나는 부분이다. 원작자 박범신 작가는 “소설 은교는 삶의 유한성에 의한 존재적 슬픔에 따른 깊은 갈망을 그린 소설이다. 내가 늙어가면서 경험한 슬픔과 그리움 등을 갈망이라는 주제로 써낸 소설”이라고 설명했다. 영화를 만든 정지우 감독은 “은교는 노시인과 소녀의 사랑과 순정에 대한 영화다. 원작소설을 읽고 보니 나이가 든다는 것은 마음은 청춘이지만 몸껍데기는 늙어가는 것 같았다. 그런 본질적인 관점을 표현하고 싶었다”고 의도를 밝혔다. 결국 이들이 표현하고자 한 것은 나이에 상관없는 ‘순수한 욕망’이다. 누구나 나이를 먹는다. 찬란한 젊음 뒤에 오는 세월의 흐름을 막을 재간이 없다. 그렇다고 욕망까지 늙어버린다고 말하면 너무 슬프지 않은가. 영화와 소설 ‘은교’는 그렇게 말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