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통합당 간판을 달고 새누리당의 정치적 텃밭인 부산에서 내리 3선의 영예를 일군 조경태(44) 의원. 4월18일 오후 CNB저널과의 인터뷰에서 그는 “부산에서 민주통합당 후보로 3선에 성공한 것은 사하구민들의 승리이자 지역주의의 벽을 깬, 한국 정치의 패러다임을 뒤집는 사건”이라고 말했다. 총선이 끝난 지 일주일이 지났지만 아직도 당선 확정 순간의 감격을 감추지 못하는 표정이 역력했다. 경남 고성 출생인 조 의원은 지역구인 부산 사하구에서 유년기와 청소년기를 보내며 성장했다. 그 후 부산대학교에서 토목공학을 전공하였고 동대학원에서 석사와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토목공학도였던 그가 정치에 입문하게 된 계기는 부산 경제는 나날이 쇠퇴하고 있는데 지역 일은 뒷전이었던 어느 국회의원이 단독출마 하면서 최다 득표를 호언장담 하는 현실을 그냥 보고 있을 수만은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1996년 28세 나이로 굳은 콘크리트 같은 ‘묻지마 지역주의 선거’에 경종을 울리기 위해 출마를 결심했다고 한다. 제15대 국회의원 선거에 부산 사하구에서 민주당 간판으로 첫 출마해 지역주의의 벽을 넘지 못했지만 자신을 선택해준 1만835표의 뜻을 저버릴 수 없었고, 지역주의 벽을 넘을 수 있다는 희망을 갖게 돼 다시 16대 총선에 도전, 두 번째 낙선의 고배를 마셨다. 8년간 지역 밀착형 공약을 준비하고 주민과 함께한 결과 2004년 1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부산에서 유일하게 非한나라당 지역구 의원이자 민주당 내 최연소 국회의원으로 당선되는 쾌거를 이뤘다. 이어 성실한 의정활동을 기반으로 2008년 18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도 민주당 간판으로 부산에서 재선되며 지역주의 극복의 기반을 마련하게 됐다. 17대 국회 전반기 상임위엔 전공을 살려 건설교통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했으며, 후반기에는 농림해양수산위원회에서 활동하면서 쇠고기 청문회에서 당시 정운천 농림수산식품부 장관을 호통치고 쩔쩔매게 만든 일로 ‘조포스’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 이외에도 부산 북항재개발사업 추진특별위원회위원장을 맡아 원활한 사업추진을 이끌어 냈다. 이명박 정부의 해양수산부 폐지 반대운동에도 앞장섰다. 18대 국회의원 당선 이후에는 정무위원회에서 서민과 중산층에게 피해를 주는 대기업의 불공정행위를 밝혀냈다. 특히 당시 국정감사를 통해 밝혀낸 정유사의 LPG 가격담합에 대해 공정거래위원회는 사상 최대의 과징금(6700억원)을 부과하기도 했다. 후반기에는 지식경제위원회로 상임위를 옮겨 대기업의 대형마트와 SSM으로부터 전통시장과 골목상권의 영세중소상인 보호를 위한 유통산업법 개정안(전통상업보존구역 2km 확대, 영업시간 제한, 영업품목 제한 등)을 발의했다. 2011년도 국정감사를 통해 이마트의 도매업 진출을 정부가 주도했음을 밝혀낸 바 있다. 또한 ‘전력 대란’이 이명박 정부의 전문성 없는 낙하산인사 때문이라는 점과, 최근 문제가 되고 있는 이명박 정부의 자원외교 허상을 밝혀냈다. 발전소 주변 지역의 열악한 생활환경을 직접 캠코더로 찍어가며 한전 사장과 지식경제부 관계자들을 꾸준히 설득한 결과, 폐쇄적이던 발전소 유휴부지에 지역주민을 위한 시민공원을 건설하기도 했다. 그리고 2006년부터 2010년까지 부산시당 위원장을 맡아 한나라당의 텃밭인 부산에서 지역주의 극복과 민주당의 전국 정당화를 위해 고군분투해왔고, 이번 총선에서는 새누리당 텃밭인 부산에서 58.2%라는 득표율로 민주통합당 후보로는 영남에서 유일하게 3선 의원이 됐다. 다음은 그와의 일문일답. - 이번 19대 총선을 평가한다면? “이번 총선 결과를 냉정하게 평가하자면 18대 총선보다는 조금 좋았고 2010년 지방선거 때보다는 안 좋았다고 할 수 있다. 선거 전략에서 오류가 있었기 때문이다. 특히 공천 과정에서 국민경선을 치르지 않은 지역이 있었는데, 경선을 통해 후보를 선출했으면 흥행성도 높이고 유권자의 관심을 좀 더 받았을 거라고 생각한다. 그냥 특정 계파가 후보를 공천하다보니 유권자의 관심을 끌지 못했다. 아마 국민경선을 했다면 지지율을 3~4%포인트 더 끌어올릴 수 있었을 것이라고 확신한다. 또한 이번에 전략공천 받은 후보들이 지역에서 뿌리를 내릴 만큼의 시간적 여유가 없었다는 점도 패배 원인으로 들 수 있다. 다들 낙하산식으로 내려오다 보니 새누리당 후보와의 차별성을 부각시키지 못했다. 그리고 국민적 정서를 무시한 지도부의 발언과 막말파문 등 지도부의 리더십 부재가 지지율 상승에 악재로 작용했다고 본다. 특히 부산 지역에 야권후보들의 득표율이 40%선에 이른 것을 보면 지지하는 민심이 상당히 좋아졌다고 할 수 있다. 예전에 비해 야권 득표율은 많이 상승했다. 지역주의에 의한 투표 성향이 많이 희석된 결과로서 매우 희망적이라고 보고 있다.”
- 한 번도 힘들다는 지역주의 벽을 세 번씩이나 넘었는데 원동력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먼저 부족한 저에게 58.2%라는 놀라운 득표율(부산 18개 지역구에서 득표율 2위)로 3선 의원의 막중한 소임을 맡겨 주신 사하을 주민 여러분께 진심으로 감사드린다. 저는 그동안 바람에 의존하지 않고 유-불리를 떠나 한결같이 선거에 임했다. 그리고 지속적으로 낮은 자세로 겸허히 지역 주민과 소통한 것이 가장 큰 승리의 요인이라고 생각한다. 또한 지역 현안이라면 작은 일이라도 직접 챙기고 진실 되게 접근했다. 특히 제 공약 중에 모두가 불가능하다고 여겼던 부산지하철 1호선을 다대포까지 연장하는 공약을 사하 주민들의 열망을 담아 실현시켰고 그 결과 지금 현재 한창 다대선 연장 공사가 진행 중이다. 무모하게 보였던 저의 공약이 하나, 둘 실현됨으로써 약속을 잘 지키는 정치인으로 인식되었다. 지하철1호선 다대선 연장, 신평 재래시장 현대화사업, 장림유수지 환경개선사업, 도서관 건립 등 낙후된 지역발전에 팔을 걷어붙여 실제 많은 성과를 올렸다. 이러한 저의 진정성이 지역구 주민들께 잘 전달되었고 또한 지역발전을 앞당길 수 있는 적임자로서 유권자들께서 신뢰를 보내주셨다고 생각한다.” - 이번 총선에서도 민주통합당 김부겸, 새누리당 이정현 의원 등이 대구와 광주에서 지역주의 벽을 극복 못하고 낙선했는데 원인이 뭐라고 보는가. “이번 선거에서도 지역주의 구도의 벽은 여전히 높았다. 그래도 예년에 비하면 득표율은 많이 올라갔다. 비록 낙선했지만 김부겸 의원의 경우 대구에서 40.4%, 이정현 의원은 광주에서 39.7%라는 의미있는 득표율을 올렸다. 지역구도를 깨기 위해 도전해주신 김 의원이나 이 의원의 노력을 높이 평가한다. 지역구도의 벽은 생각보다 높았지만 조금씩 허물어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지역주의 벽을 극복하려면 먼저 제대로 뿌리를 내려야 한다. 일시적인 바람에 의존하지 않고 꾸준히 지역주민과 소통하고 그들이 원하는 바가 무엇인지 중앙정치보다는 지역 이슈를 발굴하여 공약에 반영하고 노력한다면 지역주민들께서도 멀지 않아 진정성을 알아주리라 생각한다.” - 다음달 4일 민주당 원내대표 선출과 관련해 계속 하마평에 오르고 있다. 출마 계획은? “이번 총선에서 부산에서 3선을 해서 그런지, 그런 제안을 받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아직까지 최종 결정을 하지 못했고 주변 선배님들이나 후견인 분들의 이야기를 많이 듣고 고민 중에 있다.”
- 이제 3선 의원으로서 중진의원 반열에 섰다. 19대 국회는 초반부터 12월 대선을 앞두고 여야 간의 치열한 공방전이 예상되고 있다. 특별한 계획이 있다면? “저는 지금까지 개인적인 욕심을 가지고 정치를 해 본 적이 없다. 물론 어느 특정 계파에 속하지도 않았다. 오로지 국민만 바라보고 정치를 해왔다. 앞으로도 이런 스탠스는 계속 유지할 것이다. 그리고 이번에 58.2% 라는 압도적인 득표율로 저를 당선시켜주신 부산 유권자들께서도 ‘더 큰 정치를 하라’는 열망이 강한 것 같다. 따라서 3선 중진으로 지역정치를 넘어 중앙정치에 역량을 집중할 예정이다. 그리고 정당 개혁에 앞장서고 싶고, 정당개혁이 완성되면 전체적인 정치개혁도 가능하리라 생각한다. 저에게 역할이 있다면 한 알의 밀알이 되겠다는 각오로 열심히 하겠다. 그것이 당원으로서 당에 대한 도리라고 생각한다. 또한 영남 출신 의원으로서 당의 당면과제인 민주당의 전국정당화에도 더욱 노력하겠다.” - 부산-경남 지역의 총선 결과와 관련해 당초 기대가 많았던 ‘문재인 바람’이 생각보다 미흡했다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12월 대선에서는 어떤 결과를 예상하는가? “이번 선거결과를 냉정하게 평가하면 보수언론의 역할도 있었지만 우리 스스로 선거 전략의 문제도 있었지 않았나 생각한다. 부산, 경남의 경우 문재인 대 박근혜 구도로 가져간 것이 득표의 한계를 가져올 수밖에 없었다는 생각이 든다. ‘문재인 바람’이 ‘박근혜 대망론’에 주춤해 버린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공천 과정에서 부산의 대표적인 인물들이 국민경선을 통해 절차적 민주주의를 실천하는 모습을 보였더라면 흥행성도 높이고 유권자의 관심을 좀 더 받았을 거라고 생각한다. 기득권을 버릴 때 국민들은 감동한다는 것이다. 노무현 전 대통령과 안철수 교수가 아주 좋은 사례라고 생각한다. 이름만 따르고 정신을 따르지 않을 때 사단이 일어나는 것이다. 결국 특정 계파에 의해 공천 문제가 좌지우지 되는 모습을 보이면서 국민들의 감동을 이끌어내지 못한 것이다.” - 문재인 상임고문이나 김두관 경남지사 등과 함께 조 의원의 역할도 적지 않을 텐데? “민주당 내 부산과 경남지역 정치인들이 힘을 합쳐야 한다는 데에는 동의한다. 저도 친노이고 예전에 故 노무현 전 대통령을 같이 모셨던 사람으로서, 뜻을 같이 하지 못할 이유는 없다고 생각한다. 3선 의원으로서의 경험과 역량도 필요하다면 모두 공유할 것이며 더 큰 정치를 하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 - 故 노무현 대통령과는 어떻게 만나게 되었는가. “故 노무현 전 대통령과의 첫 번째 인연은 1988년 4월, 13대 총선 때 일이다. 불법선거감시단 자원봉사자로서 활동하면서 부산 동구 당선인이었던 故 노 전 대통령을 처음 뵈었다. 당시 상대 후보는 5공 실세 허삼수였기에 더욱 불법적인 개표가 발생하지 않도록 연좌농성을 하며 밤새 감시를 했다. 그 노고를 치하하러 오신 노 당선자와 자원봉사자로서 처음 만났다. 이어 15대 총선에 출마하면서 정치적 스승이자 동지로서 그를 또 만났다. 출마를 결심하고 김정길 전 의원을 찾아갔었는데, 김 전 의원께서 노 전 대통령께 공천추천을 해주었다. 낙선 뒤 영남 지역에서 지역주의와 싸우다가 낙선한 사람들의 모임인 ‘일요회’라는 작은 모임을 통해 故 노 전 대통령과 소통하면서 부산발전을 위한 정책개발을 함께 했다.” - 친노 그룹에서 다소 멀어지는 경향도 있었던 것으로 알고 있는데 특별한 이유가 있는가. “저도 친노 인사의 한사람으로서 친노 그룹과 사이가 나쁠 이유가 없다. 저는 우리 사회를 더 발전시키기 위해서라도 반드시 거쳐야 할 기본단계가 정치개혁이라고 생각한다. 여기서 좀 더 사고의 폭을 넓힌다면, 대한민국의 올바른 개혁과 통합이 나아가 남북과의 평화적 공존과 통일까지 이루어 낼 수 있다고 본다. 이것이 바로 노무현 정신이라고 확신한다. 즉, 노무현 정신은 故 김대중 대통령의 평화공존정신과 일맥상통하며, 어쩌면 우리 민족의 바람이 그 정신에 고스란히 담겨져 있다. 따라서 노무현 정신은 특정 세력의 전유물이 아니라, 우리 민족이 함께 공유해야할 정신이다. 이 정신에 동의하는 이들은 모두 ‘친노 세력’이며 ‘친 DJ 세력’이며, 곧 ‘개혁· 평화 세력’이다. 따라서 ‘친노’라는 이름만 내세울 게 아니라 그 정신을 계승하는 것이 참된 친노의 길이라고 생각한다. 이러한 실천 방식의 차이에서 일명 친노그룹과 다소 거리가 생기지 않았는가 생각한다.” - 지역구인 부산 사하구의 당면과제가 있다면? “부산 사하구의 가장 큰 당면과제라면 부산지하철 1호선 신평-장림-다대구간 연장사업의 차질없는 완공이다. 주민 최대의 숙원사업이었고 우리 사하구가 부산의 동서균형발전을 위한 교두보로써, 서부산 발전의 중심이 되는 초석 사업이다. 제 공약이기도 한만큼 차질없이 마무리될 수 있도록 예산확보와 안전한 공사를 위해 국회의원으로서 할 수 있는 모든 분야에서 최선을 다할 것이다. 또한 악취 문제 해결과 경제발전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기 위해 오염 발생원이 되는 산업들의 이전 집적화와 신재생산업을 육성하는 일 또한 우리 지역의 당면과제라고 할 수 있다. 19대 공약에서도 언급했듯이 현재 우리 지역의 산업분야를 IT산업으로 전환시키는 것을 목표로 IT산업밸리를 조성할 계획이다. 이를 위해 저를 비롯해 부산시와 사하구의 노력이 필요하다. 동서균형발전을 위해서라도 부산시의 결단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제2의 도시였던 부산의 명성을 되찾기 위해서라도 동서균형발전을 이뤄야 하며, 이를 위한 시작이 바로 서부산의 중심 사하에서 시작되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