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은교’와 영화 ‘은교’를 나란히 만났다. 제목은 같지만 내용은 많이 다르다. 소설은 슬프지 않았지만 영화는 슬펐다. 소설을 읽을 때는 딱 한 군데에서만 눈물이 났는데, 영화에서는 불쌍한 두 남자(70노인 시인 이적요와 무능력 문학지망생 서지우)를 보면서 측은지심에 곳곳에서 눈물이 났다. ‘70 노인의 17세 소녀에 대한 이루지 못할 사랑’이 주제라고는 하지만, 소설 쪽이 1인칭 시점으로 서술되기 때문에 “왜 늙은 나는 젊은 그녀를 사랑할 수 없는가?”에 대한 분노가 줄곧 이어진다면, 영화 쪽은 이런 내적인 얘기를 영상으로 표현할 수 없기 때문에 원작에는 없는 스토리를 일부 가미해 관객들이 줄거리를 쫓아가며 ‘느끼게’ 만든다. 영화 쪽이 더 슬퍼지는 이유다. 소설과 영화에 이런 차이는 있지만 ‘은교’가 말하고자 하는 핵심은 ‘젊은이의 욕망은 자연스럽고 아름답고, 늙은 나의 욕망은 반자연적이고 추악한 범죄란 말인가’라는 항변이다. ‘은교’의 주인공 이적요는, 비록 마음 속은 욕정과 회환으로 부글부글 끓지만 외적으로는 숭앙받는 국민시인이다. 평생을 그의 이름 그대로 ‘고요하고 적적하게’ 살아온 이적요에게 불현듯 나타난 17세 고교생 은교는 그의 존재를 흔들어놓은 첫 사랑이었다. 그녀도 ‘할아버지’에 대해 호감을 가진 눈치다. 몇 차례 ‘허락’할 듯한 결정적 순간도 스쳐간다. 그러나 이적요는 끝내 국민시인다운 자세를 지키며, 성욕을 정신적 사랑으로 승화시키면서 자신의 죽음을 재촉한다. 여고생이 할아버지를 사랑하는 것도, 할아버지가 17세 소녀를 사랑하는 것도 한국에선 모두 금기다. “안 된다” 정도가 아니라 죄악이고, 추악이다. 그러나 껍데기가 쭈글쭈글하고 반질반질하다는 차이는 있지만, 은교나 적요나 껍데기를 벗겨내면 그저 남자 대 여자로서 사랑할 수 있는 영혼일 뿐이다. 은교는 자신의 이런 마음을 몇 번 표시하지만 이적요는 끝내 넘지못할 선을 넘지 않는다. 이런 금기를 보면서 한국 사회의 답답함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미국에서 살아본 경험에 의하면 미국인들은 이런 금기에서 훨씬 자유롭다. 우디 앨런 감독이 자신의 입양 딸인 순이 프레빈과 결혼하는 파격적 사랑이 아니더라도, 일반인들도 타인의 시선에 주눅들지 않고 파격적인 사랑(한국적 기준으로 보면 죄악인 사랑)을 떳떳이 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체면치레 때문에 사랑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죽는 한국인이 참 불쌍하다. 외부의 시선으로 자신을 보기 때문에 늙은이와 젊은이는 절대로 의사소통을 할 수 없고, 완전히 다른 나라에 살 듯 서로를 배척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처럼 여겨지는 이런 나라를 이제 벗어나야 할 때가 되지 않았나? 늙은이와 젊은이 사이의 사랑-성욕을 정신-체면으로 억누르는 ‘은교’의 차원을 지나 이제 한국에서도 ‘더럽고 죄악적으로 보이지만 순수한 나이초월 사랑’을 보여주는 영화나 소설이 나와도 아무렇지 않은 나라가 되는 걸 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