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과 권력, 명예를 모두 다 가진 여자가 있다. 남들이 보기에 부러운 삶을 영위하고 있고, 세상 사는 데 별 어려움도 없을 것 같다. 그런데 그런 그녀가 자신의 삶을 내던져 버리려 한다. 그녀는 항상 불만에 차 있고 정작 원하는 것은 아무 것도 손에 잡히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배부른 투정을 하고 있는 걸까? 연극 ‘헤다 가블러’의 여주인공 헤다 가블러의 이야기다. ‘현대 연극의 아버지’라 불리는 입센의 작품이 원작인 ‘헤다 가블러’는 1981년 초연 이후 120여 년 만에 한국에서 처음으로 본격적인 프로무대에서 공연된다는 소식에 화제가 됐다. 특히 13여년 만에 연극 무대로 복귀하는 배우 이혜영의 출연도 눈길을 끌었다. 이혜영은 극 중 이루지 못하는 욕망을 갈구하는 헤다 역을 맡았다. 연극은 최고의 부와 명예를 가진 가블러 장군의 딸로 태어나 부족함 없이 자란 헤다가 테스만과 결혼하면서 남편의 성을 따른 ‘헤다 테스만’과 원래의 ‘헤다 가블러’ 사이에서 갈등을 겪는 내용을 그린다. 선천적으로 자유롭고 욕망이 강한 사람으로 태어난 헤다는 자신의 욕망이 사회적 요구에 의해 억압되자 좌절한다. 하지만 주인공은 헤다 가블러 뿐만이 아니다. 그녀의 남편 테스만을 비롯해 그녀의 옛 연인이자 테스만의 라이벌인 뢰브보르그, 그를 사랑하는 헤다의 동창 테아 엘브스테드, 헤다를 갈망하는 브라크 판사 등 주변 인물들의 욕망이 뒤섞인다. 서울 명동예술극장에서 5월 28일까지 호흡을 맞추는 박정희 연출과 배우 이혜영을 만나봤다. - 작품에 대해 전반적인 소개를 해주세요. 박정희 “헤다 가블러는 입센의 말기 작품이에요. 헤다라는 인물의 이야기는 여러 해석이 가능해요. 전 이 작품의 콘셉트를 뭉크의 그림 ‘절규’에서 영감을 받아 ‘한 인간의 절규’로 잡았어요. 뭉크는 1차 대전 때 내적인 불안을 그림으로 나타냈는데, 저는 이 작품에서 헤다의 절규를 표현하고 싶어요. ‘무엇이 한 인간을 위협하는가’라는 질문으로 이 작품은 시작됩니다. 헤다의 욕망 뿐 아니라 헤다를 둘러싼 주변 인물들의 욕망과 그 이면들도 그려지죠. 주변 인물들의 욕망은 실제 삶을 살아가는 우리의 욕망과 크게 다르지 않아요. 한 인간이 어떻게 주변 인물들의 욕망에 위협받고 아파하는지 보여주는데, 크게 보면 가슴 아픈 이야기죠. 따뜻한 이야기는 아니지만 동시대에 살아가는 우리 모습을 보게 하는 작품이라 생각합니다.”
- 출연 소감은? 이혜영 “안녕하세요. 연극배우 이혜영입니다. 헤다 가블러를 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돼 감사할 따름이에요. 사람들이 제게 거는 기대를 알고 있어요. 거기에 부응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려고 합니다. 특히 저도 인식하지 못했던 제 무의식을 건드려준 박정희 연출과의 만남이 없었다면 이 연극에 출연하지 못했을 거예요. 타협하지 않는 불같은 근성을 가진 연극인들과의 작업을 통해 얻은 경험들이 제겐 너무 소중합니다. 어쩌면 방향을 상실해버렸을지도 모르는 한 여배우에게 이렇게 다시 목표와 방향을 잡을 수 있게 해줘서 감사합니다.” - 13년 만에 연극에 복귀한 이유는? 이혜영 “연극 관계자가 ‘이혜영 배우와 꼭 작업을 하고 싶다’고 했어요. 이혜영에게 가장 어울리는 역이 뭐가 있을까 고심하다가 헤다 가블러로 결정됐다고 하더군요. 처음에 이름을 듣고 깜짝 놀랐어요.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진 영웅이나 시인도 아니고 생소한 헤다 가블러라니…. 그런데 그 이름에 굉장히 매료되더군요. 일단 첫 번째로는 저를 위한 작품이라 해서 홀딱 반했고요(웃음). 그 다음에 출처를 알 수 없는 대본을 받았는데 불편한 신비감이 정말 좋았어요. 자기 자신의 욕망에 충실하게 사는 여인의 이름을 내건 작품이거든요. 또 박정희 연출은 사회에 전달하고 싶은 메시지가 분명한 사람이에요. 그런 사람이 할 수 있는 작품이라 생각했고 믿음도 있어서 기쁘게 출연을 결정했습니다.” - 해외에서 많이 공연된 헤다 가블러가 한국에서 뜸했던 이유는? 박정희 “제 생각에는 헤다 가블러를 맡을 여배우가 없었던 것 같아요. 전 그동안 번역극을 많이 해왔는데 어떤 인물이라든가 어떤 연극은 한국에서 표현하기엔 불가능하다고 생각될 때가 있어요. 헤다 가블러는 굉장히 당당한 여성인데 한국에서 이런 여성에 대한 인식이 낯설었던 것 같아요. 그래서 처음에 이 작품 섭외를 받고 고민을 했는데 솔직히 말하자면 제가 이혜영 씨 팬입니다(웃음). 그래서 이혜영 씨가 캐스팅 됐다고 들었을 때 겉으로 표현은 안 했지만 속으로는 ‘이 공연 할 만하다’고 생각했어요. 제 속에서 불꽃이 튀더라고요. 이제는 헤다 가블러를 우리나라에서도 할 시점이 됐다고 생각했어요. 다른 요인으로는 제작비 문제도 있었을 거예요. 이 연극은 부르주아 사회를 그리고 헤다 가블러는 상류층 사람이에요. 소품이며 의상이 고급스럽게 표현돼야 하니 부담스러운 점이 있죠. 연출하기에도 부담스러워요. 헤다 가블러는 정통 사실주의 작품인데 대본이 굉장히 촘촘해요. 이렇게 잘 쓰인 대본은 처음 봤어요. 부담스럽지만 굉장히 재밌고 흥미로워요.” - 배우 이혜영에게 무대는 어떤 의미인가요? 이혜영 “전 무대 위에서 배우 생활을 시작했어요. 81년부터 뮤지컬을 했고요. 이후 연극 ‘로미오 20’으로 서울연극제에서 신인상을 받았어요. 전 다른 장르에서 만나기 어려운 역할들을 무대 위에서 해왔어요. 좋아하는 역할들이 연극에 비교적 많았고요. 그래서 전 몸은 떠나 있을 때도 항상 제가 연극배우라고 생각해 왔어요.”
- 오랜 시간 공백기를 가진 이유는? 이혜영 “연극은 큰 에너지가 필요한 작업이에요. 자유롭고 창조적인 발상이 필요하죠. 하지만 그에 비해 제 삶은 너무 일상적·현실적이라 너무 다르다는 생각에 두려웠어요. 뭔가 다 바쳐야 할 것 같은데 그러지 못하는 부담감? 그래서 몇 번 무대 위에 설 기회가 있었지만 두려워서 피하기도 했어요. 하지만 이번에는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어요. 자신의 욕망에 충실해 모든 것을 내던져버리는 것이 현실에서는 가능하지 않잖아요. 그런데 이를 거침없이 해내는 헤다라는 캐릭터를 보고 이런 인물이 과거엔 없었다는 생각이 들었죠. 이번엔 꼭 기회를 잡으려고 해요.” - 관객과의 소통을 위해 공연의 주안점을 알려준다면? 박정희 “아마 직접 보면 공감을 하실 거예요. 저는 헤다보다는 주변 인물들에게 주력했어요. ‘이혜영 씨는 곧 헤다’라는 생각에 신경을 많이 안 썼고요(웃음). 주변 인물들이 가진 이면들에 주목해보세요. 생존을 위해 어쩔 수 없이 보이는 구차한 모습들이 누구에게나 다 있어요. 주변 인물들에서 이런 모습들을 찾을 수 있어요. 헤다 캐릭터는 공연을 하면서 점점 더 발전시킬 생각이에요. 지금은 헤다가 직접 나서서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주변 인물들로 인해 헤다라는 존재와 그녀가 무엇을 갈망하는지 저절로 보이게 하는 것이 관건이에요. 그 연출 방법을 강구하고 있어요.” - 헤다 가블러의 매력은? 이혜영 “그동안 많은 여배우들이 헤다를 연기한 사례를 봤는데 어떤 사람은 장군처럼 카리스마 있게, 어떤 사람은 팜므파탈처럼 매력적으로 표현하는 등 다양하더군요. 제가 생각하는 헤다는 매우 섬세하고 지적이고, 나약한 것 같으면서도 강한, 복잡한 감정을 지닌 인물이에요. 박정희 연출에게 헤다를 어떻게 표현하면 좋겠냐고 물어봤더니, ‘헤다에게 취약점이 있다면 터치인 것 같으니 피부자아라는 심리학 책을 읽어보라’고 권하더군요. 그런데 책을 보는데 정신병이 걸리겠어서 못 읽겠다고 하니 당장 그만 보라고 하더라고요(웃음). 저는 매우 지적이고 섬세한 스타일의 헤다를 연기하려고 해요.” - 공연의 관람 포인트는? 박정희 “누구나 가지고 있는 욕망과 그 욕망을 이루기 위해 들춰지는 사람의 이면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공연을 보면 공감하실 거예요.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이혜영 “삶이 지루하거나, 식상하거나, 가벼움에 지친 분들이 현실에 적응하지 못하고, 처음부터 그럴 생각도 없었던 헤다의 모습을 보면서 자신의 삶에 대해 진지하게 고찰해볼 수 있는 시간이 될 거라고 자신합니다. 자기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고, 진지함이 얼마나 좋은 건지 생각해볼 수 있는 연극입니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극은 총 4막으로 구성된다. 극이 진행되는 4막 내내 거의 무대를 떠나지 않는 헤다로 분한 이혜영은 1막에서 평온하게 등장했다가 점점 시간이 흐르면서 입체적으로 그려지는 주변 인물들의 욕망과 함께 4막에서는 전혀 다른 인물로 변신해 카멜레온 같은 매력을 드러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