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 박정희 대통령 시절의 ‘따뜻했던 경제의 기억’을 간직하고 있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 추억은 이런 거지요. “그래도 그 때는, 비록 재벌에게 돈을 몰아주긴 했지만, 다 전 국민이 잘 살자고 그러신 거고, 또 재벌들이 말을 안 들을 때는 쪼인트를 까서라도 말을 듣게 했는데…. 그래서 그때는 다 잘 살 수 있을 거라는 기대에 부풀었는데….” ‘그리운 박정희 경제’에 대한 향수는 이명박 대통령의 당선에도 기여했고, 그래서 현 정권은 엠비노믹스라는 걸 추진했지요. 그 핵심은 ‘대기업 중심의 수출 드라이브’여서 사실상 박정희 식 경제노선과 거의 완벽하게 일치합니다. 그러나 그 결과는? 내용은 같은데 결과는 완전히 딴판이지요. 박정희 때는 수출 드라이브가 국민의 배를 따스하게 만들었는데, 이제는 재벌만 떼돈을 벌고 서민은 죽을 지경이지요. 자살이 세계 최고인 게 바로 죽을 지경이라는 증거이지요. 대선을 앞두고 경제민주화 관련 논의가 한창인 요즘, 로버트 달 지음 ‘경제 민주주의에 관하여’를 읽어 봤습니다. 내용은 충격적입니다. 경제민주화에 대해 현재까지 국내에서 나온 논의들이 대부분 세법 강화, 불공정거래 엄단, 복지 강화 등 ‘사후처방적’ 성격이 강한 반면, 이 책에서 제시하는 내용은 차원이 완전히 다릅니다. "경제는 왕정시대로 놔두고 정치만 민주화하면 되나?" 저자는 이렇게 질문합니다. “국가통치에서 민주주의의 정당성이 인정된다면 당연히 기업 통치에서도 그 정당성이 인정돼야 하는 것 아닌가? 만약 기업 통치에서 민주주의의 정당성을 인정할 수 없다면 국가 통치에서도 그 정당성을 인정할 수 없어야 하는 것 아닌가?” 즉, 왜 정치는 1인 1표의 민주주의로 운영하면서, 경제는 1인 1표가 아니라 1달러 1표의 원리로(즉 돈 많은 사람이 모든 결정권을 쥐는 황제식으로) 운영되느냐는 질문입니다. 한국 기업은 현재 황제식으로 경영됩니다. ‘오너라야 경영할 수 있다’는 게고, 이런 순혈주의 덕분에 3세, 4세 승계가 온갖 비리 속에서 이뤄지고 있죠. 김일성으로부터 내려오는 백두혈통이라야 통치할 수 있다는 북한과 다를 바가 하나도 없습니다. 로버트 달은 한국인에게 이렇게 묻는 것 같습니다. “기업 운영에서 철인(오너) 통치가 최고라면 정치에서도 시끄럽고 느린 민주주의보다 철인통치를 선택해야 하는 것 아니냐?”고. 사실 박정희의 경제정책도 이런 ‘철인(哲人)주의’에 근거한 것으로 봐야 합니다. 박정희는 사실상 자신의 쿠데타를 ‘새 왕조 창건’ 정도로 생각했다는 증거가 꽤 있거든요. 정치심리학자 전인권 저 ‘박정희 평전’을 보면 이런 측면이 잘 분석돼 있습니다. 그래서 이제 한국인은 결정해야 할 단계에 온 것 같습니다. 기업 경영에서 황제주의를 인정하듯이 정치에서도 민주주의가 아닌 철인통치(귀족통치, 왕정)를 지향할 것인지, 아니면 정치민주화를 이뤘듯 이제 경제민주화를 향해 나아갈 것인지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