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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화랑 김창실 회장의 1주기 맞아 한국 화랑 반세기를 돌아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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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nbnews 제274호 왕진오⁄ 2012.05.14 10:59:48

2011년 6월 18일 화랑계 대모 선화랑 김창실(76) 대표가 오후 7시 영면에 들어, 이제 곧 1주기를 맞는다. 1977년 개관 이후 수십 년 세월 동안 많은 화랑들이 명멸한 가운데 선화랑의 김창실 회장은 늘 한 자리에 머물면서 격동의 시절 미술인과 그들의 모습을 지켜본 대표적인 화랑인이다. 그는 생전에 “예술은 길고 인생은 짧다는 얘기도 맞아요. 그런데 저는 ‘예술은 인생의 오아시스’라고 생각해요. 그림을 대하면 지금도 마음이 흥분이 되거든요. 오랫동안 화랑에서 일할 수 있는 것도 다 그림 때문이에요”라며 그림에 대한 사랑을 털어놨다. 1주기를 맞아 한국 현대미술을 조망하는 대표적인 화랑의 하나로서, 짧지 않은 시간 동안 인사동을 지켜온 선화랑 김창실 회장과의 만남을 소개한다. 대한민국의 문화 메카 1번지로 평가되는 인사동이 현재의 모습으로 자리매김 한 것은 40여 년 전이다. 70년대 중반까지 인사동은 고서점이나 고미술상의 거리로 알려져 왔다. 이 지역에 1970년 현대화랑(대표 박명자)을 시작으로 74년 문헌화랑, 76년 경미화랑이 속속 문을 열면서 미술의 거리로 새롭게 알려지기 시작했다. 그 당시 개관한 이후 현재까지 명맥을 유지하는 화랑들은 이호재의 가나화랑, 박주환의 동산방 등이 있고 이 가운데 1977년 개관한 선화랑도 있다.

1977년 김창실 회장이 선화랑을 오픈한 이후 2003년 선아트센터가 신축·개관됐다. 국내외적으로 경제적 어려움이 큰 가운데 미술계의 처지도 별 다를 바 없는 상태에서 5층 규모의 대규모 전시관을 신축 오픈하면서 김 회장은 “문화 사업은 이윤 추구보다는 사람들의 마음을 윤택하게 만들어 주는 일이에요. 장사에 앞서면 오래 할 수가 없습니다. 어려운 시기에 작가들을 위한 공간을 만들어 줘야 합니다”라고 말했다. 살아 있는 문화예술의 영원한 동반자 김 회장의 며느리 원혜경 씨가 대표를 맞아 운영 중인 현재의 선화랑은 1977년 인사동 184번지 현재 위치에서 개관했다. 35년 동안 선화랑은 회화, 조각, 판화, 사진, 공예 분야에 걸쳐 작고 작가, 원로 작가, 중진 작가, 신진 작가, 외국 작가 등 다양한 작가들의 작품을 엄선해 전시를 개최해 오면서 한국 현대미술의 성장과 발전을 견인해온 명문 화랑으로 자리잡았다. 특히 샤갈, 부르델, 매그넘,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 랄프 깁슨 등 외국 거장의 작품들 외에도 많은 현대미술의 현역 작가 작품들을 국내에 소개하는 데 있어 남다른 노력을 기울여 왔다. 또한 외국의 유수한 아트페어에도 30회 이상 참여해 한국의 현대 미술을 전파 보급하는 데 일익을 담당했으며, 1980년대부터 국제 교류에도 선두적인 역할을 해왔다. 한편 선화랑은 1979년부터 1992년까지 13년간 미술문화 저변 확대 및 보급을 위해 계간 미술지 ‘선(選) 미술’을 발행했다. 1984년부터는 ‘선미술상’을 제정해 한국화, 서양화, 조각 등 세 분야의 만 35세에서 만 45세까지의 작가를 대상으로 수상하기 시작해 현재까지 21명의 수상 작가를 배출했다. 이들은 현재 한국 미술의 중추적 역할을 맡고 있다.

2005년 10월에는 종로구 소격동에 갤러리 선 컨템포러리를 새로 열었다. 30년 동안 예술에 대한 고집스러운 애정으로 한국 미술 현장을 지켜온 인사동 선화랑의 2세가 태어난 것이었다. 갤러리 선 컨템포러리는 김 회장의 셋째 딸 이명진 대표가 운영하고 있으며, 독창적인 한국 작가들을 세계에 알리고 한국 미술계에 자극과 격려가 될 세계 작가들의 작품을 국내에 소개하는 데 주력하고 있다. 작가와 화랑 간의 정당한 거래 관계를 재정립 고 김창실 회장은 1977년 개관 당시의 한 에피소드를 이렇게 말했다. “처음 미술과 인연을 갖게 된 것은 겸재의 작품이었고, 그 작품이 사고 싶어 끼고 있던 다이아 반지를 팔았어요. 당시 고미술품 하는 사람에게 건물을 세 줬었는데, 월세를 내지 않아 직접 개원을 하게 되었지요. 처음에는 그 동안 모았던 민화나 목기 등 작품으로 화랑을 운영했고 그 과정에서 자녀들과 남편의 성원이 가장 큰 힘이 됐어요.” 김 대표의 화랑 운영 원칙은 확고했다. 작가의 입장을 이해하고 많이 도와주지는 못하지만 상호간에 신뢰와 후원을 반듯이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런 방침이 있었기에 다른 화랑이 어렵게 발굴한 작가에 대해서는 상관례를 반듯하게 지켰고, 이런 태도는 기껏 발굴한 작가를 다른 화랑이 ‘돈질’을 해가면서 뺏어가는 당시의 관행에 일침으로 받아들여지게 된다. “화가들에게 지원을 하고 전시를 시켜주고 나면 배반감을 느낀 적이 많았어요. 특히 내가 발굴한 작가를 다른 화랑이 돈으로 몰래 데리고 가는 것을 볼 때는 정말로 이 일을 계속해야 하는지 회의를 느꼈죠”라고 말한 김 대표는 “그래도 신인을 발굴해 미술계에 등단시키는 것이 화랑 본연의 숙명”이라고 말했다.

유명 작가의 작품을 보여주는 게 아니라 실력 있는 작가들을 발굴해 세상에 보여줘야지, 다른 화랑이 힘들여 발굴해 키워낸 작가를 뺏어가는 것은 노력하지 않고 공짜로 얻으려는 심성이며, 그래서 자신은 “화랑과 작가 사이에 기본적인 도리와 배려하는 마음이 형성되도록 한 길을 가려 했다”는 설명이었다. “화랑은 문화 예술품을 다루는 공간이에요. 또한 예술가들은 순수합니다. 그래서 도와주고 후원해줘야 합니다. 남에게 피해 주지 않고 도와주는 삶을 살려 노력했어요”라며 그녀는 화랑 경영자들을 장사치로 보는 일각의 잘못된 시선에 대한 화랑계의 자성을 촉구하기도 했다. 건전한 미술시장 질서 및 풍토 정착에 앞장 김 대표는 전문 기획 화랑인 선화랑을 1977년부터 운영해 오면서 ‘정도 경영’을 목표로 미술시장 질서를 바로잡는 데 적지 않은 역할을 해 왔다. 1997년 외환 위기 때 많은 화랑들이 폐업하거나 작품을 함부로 투매하는 상황에서도 그는 작가 보호를 위해 여러 노력을 했으며 오히려 적극적으로 전시 횟수를 더 늘리기도 했다. 또한 가짜 작품 사건 등이 일어났을 때 “미술계가 대중들의 신뢰를 받는 일에 앞장서야 한다”는 신념으로 자신의 사업체 경영마저 희생시키며 이해 당사자들을 설득하고 거중 조정하는 일에 앞장섬으로써 미술계의 어른 역할을 묵묵히 수행해온 점도 지금까지 칭송되고 있다. 출판 및 저술을 통한 미술 전도사 역할 1979년부터 1992년까지 14년 동안 발간된 미술지 ‘선(選) 미술’은 이론가들에게는 연구 발표의 장이 됐고, 일반인이나 작가들에게는 정보의 장으로 중요한 역할을 했다. 누적 적자가 적지 않은 상황에서도 발행에 힘을 쓴 것은 “문화로 번 것은 문화로 환원해야 한다”는 신념 때문이었다.

탁월한 문장력을 가진 문화 칼럼니스트로서의 활약도 두드러졌다. 미술계에 몸담은 뒤 일간지, 잡지 등을 통해 수많은 칼럼을 연재해 미술 정책, 제도 개혁, 문화 교양 등의 측면에서 미술계의 입장과 논리를 전파하는 데 앞장섰다. 일반인들이 쉽게 미술을 이해하고 애호하는 마음을 갖도록 하는 글들이었다. 특히 1996년에는 저서 ‘달도 따고 해도 따리라’(김영사 출간)를 펴내 아내로서, 어머니로서, 문화사업가로서, 사회지도자로서, 미술 현장의 일선에 있는 화랑 경영자로서 몸소 겪은 체험과 사색을 섬세하고도 감각이 넘치는 문장으로 기술해 많은 사람들에게 기쁨, 감동은 물론 미술에 대한 깊은 이해를 줬다. 화랑 경영인 최초로 옥관 문화훈장 받아 김 대표는 한국화랑협회 회장에 두 차례(85~87년, 90~93년) 재임했으며, 이 기간 중 지도적 역할을 잘 수행해 냈다. 첫 번째 회장 재임 중인 86년부터 화랑협회 주관으로 ‘화랑 미술제’를 처음 제정 및 개최하고 이를 전국적으로 확장시켜 미술대중화의 기틀을 다졌다. 작고 전까지도 화랑협회의 원로로서 고문 역할을 맡으면서 미술계가 위기에 직면할 때마다 미술계의 위상을 높이는 데 합리적이고 비중 있는 역할을 도맡았다. 이밖에도 국립현대미술관 자문위원(91~93년), 문화체육부 산업미술개발위원회 자문위원(93~94년), 예술의 전당 후원회 발기인 및 이사, 세종문화회관 후원회 부회장(미술계 대표) 등을 역임했다. - 왕진오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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