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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준모 문화 칼럼]공장에서 문화를 만든다고?

‘문화공장; 오산’이 지향하는 ‘수용과 작용의 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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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nbnews 제274호 박현준⁄ 2012.05.14 11:03:19

“세상 많이 바뀌었다”는 말은 세상은 변화했고 또 변화할 것이라는 사실을 의미한다. 하루하루의 변화를 알아채기는 어렵지만 어느 날 문득 돌아보면 모든 것이 변화하고 있다. 목련이, 개나리가 한창이더니 어느새 한 여름인 요즘 날씨처럼. 돌아보면 그저 변하지 않은 것은 나 밖에 없는 것 같지만 이내 내 몸도 전과 같지 않다는 사실에 지나가는 시간의 무게를 실감한다. 이렇게 우리의 삶과 살림도 나날이 변화하고 있다. 달라지지 않으면 ‘삶의 전쟁’에서 낙오한다는 절박감에 스마트 폰 익히랴, 셔플댄스 배우랴 모두 악전고투 중이다. 하지만 굳건히 우리를 지배하는 변하지 않는 것이 있다. 다름 아닌 미술이다. 그런데 최근 경기도 오산에 ‘문화공장; 오산’이 개관한다고 해서 모두들 의아해한다. 아니 이제 문화를 공장에서 만들어낸다고? 하지만 이것은 사실이다. 구식 다이얼 전화기에 익숙한 사람들에게 스마트 폰이 영 불편하듯 사실적으로 그린 그림에 익숙한 사람들에겐 영 생소하고 불편한 개념이다. 미술, 그 변화의 여정 사실 그림에 대한 우리의 개념은 여전히 모방과 재현이 중심이다. 원래 그림은 ‘신의 세계를 그린’ 기도와 숭배의 대상에서 출발해 르네상스 시대에는 ‘세상의 모든 것을 닮게, 즉 재현해 놓은 것’으로 변화했다. 현실의 충실한 모방과 객관적 정확성이라는 틀을 통해 나와 나 이외의 세상을 구분하면서 화가의 눈을 통해 세상을 보게 되었다. 따라서 “묘사 대상과 가장 정확하게 일치하는 그림이 가장 칭찬할 만한 것“이라는 다빈치의 예술론이 탄생한다. 이 시기 화가들은 기술자였다. 하지만 화가들은 모방이 아니라 조화와 비례를 통해 미를 추구하는 교양적 활동이라고 자신들의 활동을 자부했다. 독일의 화가 뒤러 같은 이가 여기에 속한다. 하지만 여전히 그림은 모방이며 시는 창의적인 것이었다. 17세기에 미술의 창의성이 인정받으며 순수예술이 등장했고, 계몽주의 시대를 통해 인간의 자유와 자율이 중시되는 이성주의가 등장한다. 칸트의 ‘천재’가 나타나 예술을 창조하기에 이른다. 천재는 예술을 창조하는 타고난 소질로, 자연은 천재를 통해 예술을 창조하도록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름다움이란 미적 판단의 대상이기 때문에 이성적·논리적이기보다는 감성적이다. 따라서 “논리적 인식과 미적 인식은 다르다”는 것이 칸트의 견해다. 즉 “꽃에 대해 모른다고 그 꽃의 아름다움조차 느끼지 못 하는 것은 아니다”라는 말이다. 즉 아름다움을 느끼는 것은 보는 사람의 마음에 달려 있다는 것이다. 계몽주의 시대의 신고전주의와 낭만주의 그리고 사실주의와 인상주의를 거치면서 사람들은 근대적인 삶을 구가하기 시작했다. 산업혁명 이후 근대 도시가 탄생하고 경제적으로 물질적으로 살만해지면서 인상주의 회화가 등장한다. 인상주의는 한 마디로 축제였다. 도시민들이 근대적 주체로 재탄생하면서 삶은 활력에 넘쳤고 너나없이 교양인이 되고자 했다. 그림에 파티 장면이나 독서하는, 악기를 다루는, 발레를 배우는 주제가 많아 다뤄진 이유다. 비로소 합리적이며 개인적이고 이기적인 근대적 인간이 탄생한 것이다. 동시에 절대불변의 진리라 생각했던 미의 본질은 ‘미적인 것’을 대상으로 하는 근대 미학에 자리를 내준다. 미적인 것은 이념이나 개념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보는 사람의 의식에 비쳐진 미이다. 따라서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상대적인, ‘그대 있음에 내가 있는 것’과 같은 것이다. 이후 이런 미학적 개념은 실험미학, 사회학적 미학, 분석미학 등으로 다종다기하게 분화했다. 또한 20세기 초 모더니즘이 나오면서 이성과 이상 그리고 시각을 우선하는 미술이 등장하고 새로운 것이 모든 것에 우선하는 가치가 된다. 관계의 미학 우리가 미술관에만 가면 한없이 작아지는 이유는 바로 이런 미술의 변화를 따라가지 못하기 때문이다. 지금까지의 미술이 절대적·계몽적·지시적이었다면 오늘의 미술은 보는 이의 몫이다. 따라서 똑같은 그림을 보아도 보는 사람에 따라 달라 보인다. 각자의 경험과 환경에 비춰보고 상상하기 때문이며 생각의 차이에서 비롯된다. 이는 마치 중학생 때 읽은 소설을 어른이 되어 다시 읽을 때 그때의 감상과 의미가 다른 것과 같다. 마치 같은 음식이라도 배고플 때와 배부를 때 그 맛이 달라지는 것과 같은 이치다.

같은 것을 함께 보면서도 각각 다른 생각을 하며 서로 간의 다름을 인정하고 그 차이를 인식하고 존중할 때 상호이해와 배려, 공존이 가능해진다. 즉 남의 생각을 배려하고 수용하며 미술을 통해 다른 것이 틀린 게 아니라 사람들 간에 존재하는 차이 때문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민주시민으로서의 자세를 학습하게 되고, 미술관에서의 만남을 통해 모두가 공존하는 관용의 삶을 경험하게 된다. 그런 점에서 작품과 나의 관계, 즉 보는 사람과의 관계가 중요하다. 작품의 아우라는 작품 자체나 작가에 의해서만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작품이 관객과 만나는 바로 그 장소에서 형성된다. 이제 “예술 작품은 복잡한 사회에서 새로운 ‘정지의 영역’을 만들어내는 사회적 틈으로 기능하며, 그것은 관객과의 만남을 통해 형성된다. 현대 예술의 아우라는 자유로운 연합이다”라는 니콜라 부리요의 지적처럼 관객은 자신을 향해 열린 작품과 놀고, 연대하며 새로운 관계들을 창조적으로 만들어낸다. 이것이 바로 부리요가 생각했던 예술의 역할이자 목표이며, 오늘날의 예술에도 유효한 형식이다. 그리고 이러한 형식의 실천이 바로 모두가 창조자인 동시에 모두가 감상자인 '문화공장'의 개념이다. 예술은 반제품? 따라서 오늘날의 예술은 천재 또는 영감이나 우월한 예술가가 일방적으로 지시하는 예술이 아니라 감상자의 요구에 따라 만들어진다. 즉 주어진 음식을 그대로 먹는 것이 아니라 고객이 양념도 넣고 향신료도 추가함으로써 자신의 입맛에 맞는 음식을 만드는 것처럼 우리 앞의 작품은 예술가에게는 완성작이지만 관객에게는 반제품인 셈이다. 따라서 그 작품을 완성할 의무와 책임은 보는 사람의 몫으로 남는다. 예술의 나라에서는 재현의 시대도 천재의 시대도 갔다. 교양과 계몽의 예술도 역사가 되었다. 이제 미술관에 모여든 모든 이는 천재인 동시에 생산자이며 소비자이다. 그런 점에서 현대 예술은 참여하고 관계를 맺는 것을 전제로 한다. 그리고 참여하는 순간 모두가 예술가가 된다. 어떤 의미에서 예술가는 창조의 단서를 제공할 뿐 그것을 완성시키는 과정에 참여하는 사람들이 진정한 작가인 셈이다. 그리하여 작품이란 관객 또는 독자들이 그것을 수용하고 향수하고, 판단하는 경험을 통해 비로소 구체적으로 소통한다. 이에 따라 종래 작가와 작품이 중시되던 이른바 ‘생산의 미학’에서 작품과 독자의 역동적인 수용 또는 만남의 과정을 중시하는 ‘수용과 작용의 미학’으로 전환한다. 따라서 작품의 향수와 평가는 작품이 만들어진 시대와 상황에 따라 일치와 어긋남이라는 상호작용을 통해 새로운 작품으로 탄생한다. 즉 현대 미술은 알아먹거나 작가의 의도를 아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내가 그것을 만나 어떻게 반응하느냐가 중요한 것이다. 그런 점에서 ‘문화공장; 오산’은 만나고 반응하는 일차적 예술 행위가 일어나는 가장 선진적인 개념의 미술관인 동시에 창조적 사유와 행동이 일어나는 공간인 셈이다. 즉 각각의 관객의 창의성을 살리고 이를 통해 새로운 세계를 발견하고 제안하는 새로운 형태의 공간이다. 그리고 예술가뿐 아니라 시민들 모두가 문화 생산자 또는 문화 노동자가 되는 동시에 예술가, 창조자로 거듭나게 되는 것이다. - 정준모 전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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