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에서 은행을 만드는 작업을 한 적이 있었다. 부행장 출신의 미국인과 함께 캘리포니아 주정부로부터 은행 설립 패키지를 받아 검토했다. 설립 요건을 죽 읽어보면서 대부분의 조건을 맞출 수 있다고 생각하면서도 마지막으로 “이건 쉽지 않겠는데”라고 생각되는 부분이 있었다. 바로 경영진 구성이었다. 주정부의 서류는 분명히 밝히고 있었다. “은행 설립 요건 중 가장 중요하게 보는 것은 누가 경영진이 되느냐이며, 은행 설립이 허가돼도 경영진의 구성을 계속 지켜봐 문제가 있으면 제재를 가할 수 있다”고. 은행을 설립할 돈보다도 은행 경영진을 구성하는 게 더욱 힘든 과제임을 알 수 있게 하는 조건이었다. 미국에서 설립에 관여한 경험은 학교도 있었다. 은행 설립 조건과 비교하면 학교 설립 조건은 훨씬 간단했다. “학교 운영자가 누구인지를 지속적으로 지켜본다”는 문구도 없었다. 이런 차이는 금융업이 그만큼 무서운 분야이기 때문이다. 남의 돈을 만지는 일만큼 유혹에 빠지기 쉬운 일도 드물기 때문일 것이다. 최근 한국의 저축은행 사태에서 드러났듯 은행장이 고객 돈을 개인용도로 빼내기로 마음만 먹는다면 그 방법은 얼마든지 만들 수 있다. 금산분리법이라는 게 있어서 금융자본과 산업자본을 분리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금융업 운영자에게는 산업자본과는 다른 엄격한 도덕성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남의 돈 만지는 금융업은 무서운 분야인데… 지난 번 론스타 펀드의 외환은행 매각 때 이런 말이 있었다. “귀한 딸(금융업)을 내줄 때는 자격심사를 특별히 엄하게 하는 게 보통인데 아무한테나(산업자본인지 금융자본인지 아리송한 론스타 펀드한테) 내줬기 때문에 이런 사단이 일어난 것”이라는. 사위의 자격심사를 아무리 엄밀하게 해도 사위가 내 딸을 괴롭힐 가능성을 제로로 만들 수는 없다. 그러나 바로 그렇기 때문에 금융업처럼 경영진의 도덕성이 중요한 분야에서는 엄한 감독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한국의 저축은행을 보면 전과자, 사기꾼이 버젓이 은행을 설립하고 회장으로서 전횡을 휘둘러도 그 누구 하나 감독하는 당국이 없으니, “경영진이 누구인지를 끊임없이 지켜본다”는 캘리포니아에 비교한다면 정말로 은행하기 너무 좋은 나라인 것 같다. 비즈니스 프렌들리 한 나라니까 이제 금융업도 아무나 하게 놔두는, 그래서 부패에도 프렌들리한 나라가 돼가는 것 같다. ‘기업하기 좋은 나라, 부패해도 괜찮은 나라.’ 운이 딱딱 맞는 아주 좋은 구호다. 사회 지도층이 부도덕한 짓을 하면 몇 배로 처벌해 일벌백계로 삼아야 한다. 은행장이 100억 원을 해먹었다면 곱하기 3 해서 300억 원의 재산을 몰수하거나, 아니면 죽을 때까지 감옥에 가둬놔야 ‘후임 범죄 가능자’의 손이 오그라든다. 미국에서는 그런 처벌이 가끔 동원된다. 엔론 사태 같은 걸 봐라. 반대로 한국에선 100억을 해먹어도 징수액은 그에 훨씬 못 미치고, 요런 조런 이유를 대서 곧 범죄자가 밝은 세상으로 나온다. 이렇게 운영되는 국가가 얼마나 지속될 수 있을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