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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국, 굵은 선 안에 켜켜이 담긴 삶들

투박한 선을 춤추게 만드는 실존 감성의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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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nbnews 제280호 왕진오⁄ 2012.06.25 11:00:28

“우리는 너무 많은 것을 요구하는지 모릅니다. 너무나 큰 비약을 원하는지 모릅니다. 우리는 남이 내가 아님을 알고 있습니다. 여기 저의 조그만 분신이 있습니다. 그림이란 삶의 표현이라 생각됩니다. 진실을 표현하려 할 때 어려움이 생기고, 그 표현에서 무서운 전율을 경험합니다. 스스로가 맡겨놓은 자유를 되찾을 때가 되었다고 생각되어집니다. 여기, 저의 온통 벌거숭이 얻으면 좋겠습니다.”(1977년 이상국) 고도로 절제된 회화 세계로 시대의식과 실존적 감성, 현실적인 삶을 표현해 온 이상국 작가가 34년 전 자신의 전람회를 앞두고 작품의 책임감에 대해 밝힌 글이다. 이상국은 화단의 조류나 이념에 휩쓸리지 않는 주체적인 회화적 의지를 실현해 왔으며, 당대의 현실 속에서 사유하고 느낀 것들을 솔직히 드러내는 과정을 지속해 왔다. 지난 40여 년 동안 오로지 그림의 본질을 추구하며 탄탄한 조형성을 구축해온 작가의 힘은 인내와 절제 그리고 숙련으로 다져진 중후하고 단단한 내면의 힘을 펼쳐 보인다. 그는 70, 80년대 주변에서 늘 볼 수 있던 산동네나 공장지대를 통해 당시 개발지상주의의 흐름 속의 절박한 현실을 다루었다. 불의를 거부하지 못하는 민중의 안타까움, 좀 더 나은 사회를 갈구하는 심정 등 암울했던 시대를 표현한 것이다.

그는 “1979년 전시는 첫 전시와 상당히 다른 방식으로 만들었다”고 했다. 자기 나름의 방향을 좀 더 뚜렷이 선택하고 정리해야 할 필요성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추상적이고, 자기 독백적인 것을 정리하고, 토속적이고 서정적인 것과 현실적인 미감의 회복에 초점을 맞추면서 홍동지나 허수아비, 산동네와 공장지대 같은 것이 중심적인 소재로 드러나게 되었다. 황막한 시대상황, 고독감, 뜻 있는 사람들의 외로움 같은 걸 표현하고자 했다.” 시대를 넘어 내면의 성찰을 일궈낸 감동과 정서 이후 이상국은 90년대부터 현재까지 산이나 나무 등 자연을 해체한 뒤 재구성하는 작업을 통해 내면의 풍경을 구현하고 있다. 그는 가까운 주변의 이야기를 시작으로 산동네 풍경이나 사람, 나무, 산, 바다 등의 소재를, 대상이 지니는 생동하는 기운, 감추어진 형상을 반복을 통해 예리하게 표현했다. 이러한 감성들은 그가 홍제동에 살던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그 지역은 서울 여러 곳의 철거민들이 모여 살던 공간이었다. 그들의 삶은 처절하다 못해 기억하고 싶지 않다는 게 작가의 말이다. 대학 졸업 뒤 도심 또는 잘 가꾸어진 공간보다는 자연스럽게 공장 지대와 신흥 지역을 선호하게 된 것이 결국 시대를 기록한 결과가 됐기에 지금도 스스로에게 자랑으로 여기고 있다고 했다.

화가 이상국을 말할 때 그의 목판화를 빼 놓을 수 없다. 그가 처음 그림에 눈을 뜬 때부터 그림에 대해 얻은 자각은 “그림이란 늘상 자기를 선택해 가는 것이고, 선택의 기준이란 바로 자신이 체험하고 소화할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 이것이 나에게 일종의 도덕성을 담보해준다”는 것이었다. 단순히 회화적 모티브를 넘어 내밀한 삶에 깊이 닿아 있는 이상국의 회화는 구상적이면서도 동시에 추상적이고 추상적인 동시에 구상적이다. 이상국은 대상을 재현하는가 하면 그 대상의 본질을 추려나가고 가시적인 대상에서 비가시적 힘과 기를 찾는다. 그는 회화 작업과 더불어 목판화를 통해 다양한 감정들을 느끼게 해준다. 이는 그의 표현들이 작가 자신의 체험과 거기에서 연유하는 감정이나 감성을 설명적이지 않은 형상으로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70, 80년대 초기 목판화 작업이 대개 정치적 저항성과 풍자성, 신명을 필요로 했던 것과 달리 이 작가는 당대의 리얼리티와 서민들의 생활상을 자연주의 방식으로 포착했기에 중요한 작업으로 볼 수 있다. 질박한 정서, 그 진중한 삶의 의지 이런 방식은 화전, 응암동, 산동네, 공장지대, 산, 나무 연작 등에 이르는 풍경화에서도 한결같다. 자연과 이웃에 대한 그의 따듯한 시선은 그러나 작업 형식에 이르면 보다 엄격하고 견고한 태도를 보인다.

스케치를 거치면서 대상에 내재된 특성을 찾아내는 분석적인 조형성을 추구하면서도 표현 방식에 있어서는 대상의 왜곡, 구축, 해체 등의 방식을 자유분방하게 구사한다. 그 결과는 다소 진부하게 보일 수도 있는 서민적인 정서를 모던하고 주관적인 개성으로 드러내는 게 된다. 굵은 선으로 구획된 집들의 끝없는 집적에는 숱한 사람들의 삶과 거기에서 비롯하는 무수한 애환과 즐거움들이 버무려져 있다. 검은색과 흰 여백의 결합이 만들어내는 이미지는 처연하되 강하고 끈질기다. 굵은 먹 선이 조합되면서 빚어진 많은 언어들은 결국 하나의 형상으로, 덩어리로 응결된다. 청마의 시구처럼 이 그림들에서는 흑과 백의 선면과 여백이 내놓는 소리 없는 아우성이 들리는 것 같다. 화면의 동세가 움직일 듯 정지돼 있는 역설적 상황의 긴장이 더욱 그렇다. 선 하나하나는 어눌하고 굵고 힘차지만, 전체의 움직임은 유려하고 느린 부드러움이다. 이상국의 작업은 미리 설정해 놓은 미술의 이념을 따라가는 게 아니다. 살아가면서 느끼는 온갖 인간적인 천변만화의 감정들을 드러내는 것이다. 작업실에 박혀서 외출도 자주 하지 않고, 과묵한 데다 변화보다는 깊이 있게 집중하는 작업 스타일이다. 언변 또한 그의 목판화 작업처럼 느릿하다. 그러나 그의 작품이 소박하되 밋밋하지 않고, 힘이 넘치면서도 유연하고, 칼칼하면서도 부드러우며, 단조로우면서도 복합적인 이유는 아마 그 안에 내재된 감정들이 항상 충돌하면서도 마음과 신체와 질료가 하나 되는 통일된 프로세스를 형성하기 때문이라 생각된다. 2000년의 대규모 전시 이후 자신의 작업을 정리하고 있는 그는 “그간의 발전과 소화 과정으로 바라봐 주시길 바란다. 나는 소시민인 것 같다. 그래서 작업의 대상조차도 주변인을 그렸고, 사회로 진출하기 위해 특별한 관계를 만드는 것을 싫어했다. 사람이 처신을 잘하는 것처럼 그림에도 책임을 지고 싶다. 세상에 아무 생각 없이 작품을 내놓고 싶은 생각은 전혀 없다”고 말했다. - 왕진오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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