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병철은 해방 이후 새로운 사업구상에 여념이 없었다. 만성적인 물자부족과 엄청나게 쏟아지는 외국으로부터의 원조물자를 어떻게 사용할지를 매일같이 고민했다. 당시 정부는 원조자금과 물자를 민생안정과 전재 복구에 우선 배정했는데 이병철은 이점을 간파했다. 궁리 끝에 이병철은 제당업에 진출했고, 그 결과 삼성 계열인 제일제당은 식품중심의 다변화에 착수하여 통조림사업, 제분업에도 진출했다. 제일제당, 제일모직, 삼성물산…트로이카체제 구축 또한 이병철은 모직업에도 진출을 모색했다. 원모(原毛) 또한 원조로 제공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한국전쟁 이후 긴급한 의료 수요를 충족시키기 위해 정부와 원조국들의 적극적인 지원 아래 섬유산업은 급속히 성장했다. 그러나 이는 주로 면방직 공업 위주의 성장이었으며, 모방직업은 상당히 낙후되어 있던 터라 모방직업에 진출할 경우 상대적으로 경쟁이 덜할 것으로 판단되었던 것이다. 1954년 9월 15일에 자본금 1억 환의 제일모직주식회사를 설립하는 한편, 대구 침산동 105번지 일대의 23만1000㎡(7만평)의 공장 부지를 확보했다. 산업은행에서 대출자금 5830만 환을 융자받아 일관기계설비(총 1만추)를 정부의 권고로 서독 슈핀바우(Spinbau) 사에 발주했다. 정부는 낙후된 국내모직공업을 진작시키고자 정부 직영의 모직공장을 건설하기로 확정하고 슈핀바우에 모방 5000주를 발주해 둔 상태였다. 그런데 이병철이 제일모직을 설립하자 정부가 슈핀바우를 추천한 것이다.
이병철은 1955년 1월 4일부터 소모(梳毛), 모방, 직포, 염색, 가공공장 등의 일관공장 건설을 서둘러 1956년 3월 15일에 완공하였다. 제일모직은 1956년 5월부터 본격가동에 들어갔는데 원료인 울 탑(wool top)은 영국 및 호주산을 도입하고, 자금은 주로 정부의 ICA자금을 사용했다. 정부는 소모방공업을 국가기간산업으로 삼고 지원했다. 생산 첫해에는 소모사 46만 7000파운드, 방모사(紡毛絲) 3만 6000파운드, 복지 8만 8000야드 등을 생산했다. 그러나 품질이 열악해서 소비자들이 외면하는 바람에 상당히 고전했는데 생산을 거듭할수록 적자가 누적되었다. 정부는 무리수를 둬가며 제일모직에 자금을 지원하는 한편 1958년에는 소모사를 제외한 모직물에 대한 수입금지 조치도 취했다. 이 조치로 말미암아 제일모직의 경영 상태는 점차 개선되어 1960년에는 자본금을 30억 원으로 증가하는 등 승승장구했다.
제일모직 또한 제일제당과 마찬가지로 불모지인 이 땅에 ‘공업입국’의 가능성을 확인해주었다. 그 결과 삼성물산은 제일모직, 제일제당과 함께 트로이카 체제를 구축했다. 은행에서 보험에 이르기까지 사업 확대 한편 이 시기 이승만 대통령은 미국에 체류하면서 시장경제 체제의 우수성을 몸소 체득하고 있었다. 따라서 휴전 이후 일련의 경제정책은 시장경제질서를 확립하는 방향으로 추진되었다. 전쟁의 상처도 회복되고 전후 부흥정책에 힘입어 순탄한 경제성장을 지속하자 1957년에 정부 소유의 시중은행들에 대한 민간불하를 획책하였다. 시중은행들이 광복 전 일본인 소유 기업체들에 제공한 대출금 20억 환이 전부 부실채권화 되었던 것이다. 또한 광복으로 약 291억 환에 달하는 일본인 기업들이 발행한 회사채로부터 발생하는 이자수입마저 끊어진 터에 저축률 둔화에다 살인적인 인플레 등으로 은행들이 파국 상태에 있었던 것이다. 정부는 금융자율화를 취지로 1950년 5월에 한국은행법과 은행법을 제정해서 시중은행 민영화를 획책하였다.
1954년 6월 이중재 재무부장관과 김영찬 차관이 입각하면서 지지부진했던 시중은행의 민간불하사업이 본격화되었다. 1957년 8월에 조흥은행, 상업은행, 흥업은행(한일은행의 전신), 저축은행, 신탁은행 등 5개 은행에 대한 정부귀속주식 매각작업을 단행하자 삼성, 삼호, 개풍, 조선제분 등이 불하경쟁에 참여했다. 삼성은 흥업은행주 83%와 조흥은행주 55%를 각각 매입해서 최대주주가 되었다. 상업은행은 당초 합동증권의 진영득을 명의인으로 등장시킨 이한원이 최대주주였다. 그러나 이병철이 최대주주가 된 흥업은행 신탁부가 상업은행 지분율 33%를 확보하고 있었던 탓에 상업은행 또한 이병철이 최대 주주가 되었다. 그 결과 이병철은 4개 시중은행 주식의 거의 절반을 소유하여 국내 최대의 은행 소유주가 되었다. 삼성이 4대 시중은행을 장악하면서 다각화가 급속히 진행되었다. 당시 삼성의 다각화 전략은 과도한 은행 부채로 경영난에 시달리는 부실기업 인수였다. 삼성이 4대 시중은행의 최대 주주였기 때문에 해당 은행들의 관리 하에 있던 부실기업들 중 시장성이 양호하고 회생가능성이 있는 기업을 인수하는 데 있어 유리한 입장에 있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1958년 삼성은 은행부채로 부실해진 한국타어어를 이양구, 배동환과 공동으로 인수하였다. 처음 주식지분은 3인 공히 33%였으니 이양구가 후일 손을 떼면서 삼성의 지분은 49.5%로 늘어났다. 한국타이어는 일제하에서 일본인들에 의해 설립된 조선타이어의 후신으로써 광복 후 정부에 귀속되었다가 민간에 매각된 기업으로 1957년 ICA원조 35만 달러를 들여 시설보수를 완료했다. 그러나 협소한 국내시장을 감안하지 않은 과잉투자가 원인이 되어 부실기업이 된 것이다.
삼성은 또 경영미숙으로 부실해진 삼척시멘트를 이양구와 50%씩 투자, 1958년 1월에 인수하였으며 1957년 8월에는 천일증권을, 1958년 12월에는 동일방직을 그리고 같은 시기에 호남비료공업 주식 45%를 매입했다. 1958년 2월에는 안국화재보험을 인수했다. 안국화재는 일제하에서 설립된 조선생명 후신으로 화신그룹 창업자인 박흥식과 한국은행 총재를 역임한 민병도 등이 재건에 착수, 1956년 4월 26일에 자본금을 1억 환으로 증액하고 손해보험으로 업종을 변경했으나 경영미숙과 손해보험사의 난립 등으로 적자를 면치 못해 경영난에 직면했던 것이다. 군사정부 하에서 강도 높고 명시적인 재벌 육성 1957년 2월에는 효성물산을, 1958년 12월에는 근영물산을 각각 설립하였는데 배경은 다음과 같다. 당시 무역업은 수입무역 중심으로써 수입에는 다량의 외화가 필요했는데 무역회사의 달러화 주공급원은 AID원조불이었다. 그런데 정부는 1개 무역상사 당 품목별로 20%씩 배정, 더 많은 외화를 배정받기 위해서는 여러 개의 무역회사가 필요했다. 삼성은 달러화를 더 많이 배정받을 목적으로 효성물산과 근영물산을 설립했던 것이다. 1950년대 후반 삼성그룹의 기업 인수는 어지러울 정도로 엄청났다. 그 결과 1950년대 말 삼성은 상업, 조흥은행 등 4대 시중은행을 소유함은 물론 산하에 16개 계열기업군을 거느린 국내 최대의 금융콘체른을 형성한다. 그 와중에서 삼성은 수평적 다각화에 치중, 국내 최대의 복합기업집단으로 변모했다. 삼성그룹이 재계 선두주자로 급부상한 것이다. ‘호사다마’라 하던가. 1950년대에 급성장하던 삼성에 1960년대 벽두부터 광풍이 휘몰아친 것이다. 1960년 4.19혁명을 계기로 과거 이승만 독재정권하에서 부당이득을 취한 정치인, 관료, 기업가들에 대한 사회적 단죄 요구가 비등했는데 이병철도 연루되었던 것이다. 이런 분위기는 1961년 5.16군사정변 이후에도 계속되어 부패기업인들에 대한 국민적 단죄요구는 군사정부가 해결해야할 최우선과제였다. 구인회, 이정림 등 전국에서 내로라하는 기업가들이 부정축재자로 지목되어 투옥되는 등 살벌한 분위기가 연출되었다. 그러나 군사정부는 이들에게 일벌백계 대신 기간산업체 1개씩을 설립해서 국가에 헌납하도록 하는 이른바 ‘투자명령’으로 대신했다. 이렇게 해서 군사정부는 과거 자유당 정부 하에서 성장한 재벌들과의 강한 연결고리를 형성했다. 이후부터 군사정부는 경제개발이란 슬로건 하에서 강도 높게 그리고 명시적으로 재벌들을 육성하였던 것이다. 창업 이래 최대의 시련, 한비밀수사건 터져 이병철은 부정축재액 80억 환을 비료공장을 지어 헌납할 것을 지시받았다. 당시 국내에는 충주비료, 호남비료, 삼척산업, 경기화학 등에서 화학비료를 생산하였으나 국내 비료 수요의 20%만 충당할 수 있었다. 1964년 연산 33만톤 규모의 요소비료를 생산할 목적으로 한국비료공업주식회사(삼성정밀화학의 전신)가 설립되었다. 공장건설에는 미쓰이물산 계열인 동양엔지니어링 외에 국내의 현대건설, 대림산업 등이 참여하였다. 그러나 건설에 착수한 지 1년 여 만인 1966년 중순 소위 ‘한비밀수사건’이 터졌다. 공장완공 직전에 사카린(당원) 밀수사건이 터짐으로써 삼성은 창업 이래 최대의 위기에 직면하였던 것이다. 이 사건을 계기로 1967년 10월 11일 한국비료는 국가에 헌납되었다. <다음 호에 계속> -이한구 수원대학교 경제금융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