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82호 최영태⁄ 2012.07.11 11:20:07
‘저녁이 있는 삶’이라는 손학규 민주당 상임고문의 대선 출마 구호를 생각하면 필자에게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텍사스의 눈부신 저녁 하늘 색깔’이다. 1998년 IMF 이후 13년간 재직했던 직장을 그만두고 미국행을 택했다. 현지에서 첫 출근한 직장의 퇴근 시간은 오후 5시. 말로만 듣던 ‘나인 투 파이브’(9시부터 5시까지)의 시작이었다. 사무실 문을 나와 퇴근하는 순간 세상은 온통 빛으로 가득 차 있었다. “아니, 퇴근 시간에 세상이 왜 이리 밝지?” 당황스러웠다. 한국에선 퇴근 때 이렇게 밝았던 적이 단 한 번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항상 밤늦게 퇴근하거나 아니면 해질녘에 퇴근해도 빌딩 숲에 가려진 서울 한복판은 항상 어두웠다. “아, 우리 머리 위에는 하늘이란 게 있구나”라는 사실을 미국 직장생활을 하는 첫 날 새삼 깨달았다. 저녁이 있어야 적절한 정치적 정보의 습득이 가능하다 오후 5시에 퇴근하면 집에 가서 뭔가 할 일을 만들지 않으면 심심해서 안 된다. 책도 읽게 되고, TV의 교양물도 챙겨보게 된다. TV를 보다보면 히스토리 채널에서 ‘예수는 마리아와 로마병정 사이에서 태어난 사생아일 수도 있다’는 도대체 한국에선 상상도 할 수 없는, 해괴망측한 주장을 해대는 학자가 나오고, 사이언스 채널에선 ‘어번 레전드’(urban legend, 잘못된 상식)들이 거짓말임을 속속들이 실험으로 증명하는 방송이 나온다. 이렇게 저녁이 있어야 민주주의가 가능하다. 논쟁이 되는 정치적 쟁점들을 TV 등 언론을 통해 익힐 수 있고, 투표 날이 되면 건강한 제 정신으로 투표장에 갈 수 있기 때문이다. 이와는 전혀 다른 장면을 보자. 지난 4.11 총선 때다. “투표장으로 가라”고 문자메시지를 날리는 필자에게 한 회답이 돌아왔다. “난 절대로 못가”란 대답이었다. 외식업에 종사하는 그는 꼭두새벽부터 해진 뒤까지 근무하기 때문에, 즉 사장이 투표장에 갈 시간을 안 주기 때문에 물리적으로 투표할 수 없다는 소리였다. “야, 그러면 부재자 투표라도 해야지”라고 말하는 내 목소리를 뒤쪽으로 갈수록 작아졌다. “투표도 안 하는 거지같은 것들”이라고 욕할 수만은 없는 게 바로 한국의 현실임을 새삼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피말리는 직장 현실로 민주화를 발본색원 하는 수구 세력들 현재 한국의 현실을 “너무 해피하다”고 여기는, 그래서 불만이 전혀 없이 '누리는' 사람들에게는, 자신보다 격이 낮은 보통 사람들에게 ‘저녁이 없는 삶’이 가장 좋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수면-출퇴근 시간 이외에는 개인 시간이 거의 제로여서, 적절한 정치적 정보를 얻을 시간도, 체력도 없는 상태, 투표 날에는 투표장에 갈 물리적 시간이 없는 상태가 지속돼야 자신들이 지금처럼 영원히 더욱더 누릴 수 있기 때문이다. ‘저녁이 있는 삶’이란 손학규 상임고문의 대선 캐치 프레이즈가 꽤 인기있는 모양이다. 속마음은 다르더라도 너나없이 겉으로는 경제민주화를 얘기하는 것만큼이나, 좋은 현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