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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한구의 한국 재벌사]현대그룹 편 3화

정부가 연출한 ‘주식회사 한국’의 주연배우로 못에서 선박까지 수직계열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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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nbnews 제284호 박현준⁄ 2012.07.23 11:52:34

현대는 중공업 진출에도 박차를 가했는데 최대 사건은 완성차 사업에의 진출이었다. 국내외 건설공사와 베트남에서의 세탁사업 등을 통해 확보한 거금으로 울산공업단지 내에 10만평의 부지를 확보하고 1967년에 자본금 5000만 원의 현대자동차를 설립한 것이다. 현대자동차는 미국 포드로부터 부품을 수입해 1968년에 국내조립 승용차 ‘코티나’를 출시했다. 이 무렵 선발기업인 신진자동차가 일본 도요다(豊田)자동차와 기술제휴한 ‘코로나’승용차를 ‘새나라’란 브랜드로 국내시장을 석권했는데 여기에 현대차가 도전했던 것이다. 중형세단 ‘코티나’는 출발부터 소비자들의 호평으로 점차 국내 시장을 잠식했다. 그 결과 현대자동차는 1972년 자동차산업 ‘4원화 방침’(현대, 기아, 신진, 아세아자동차로 완성차업체 4원화)이 확정될 때까지 급속하게 성장, 현대건설과 함께 그룹의 양 날개로 자리매김했다. 현대자동차, 독자개발로 ‘포니 신화’ 결실 이무렵 현대자동차는 또 하나의 대박을 터뜨렸는데 그것은 1974년에 현대가 독자기술로 생산한 ‘포니’ 승용차였다. 한국 최초의 고유모델로 미쓰비시의 1238cc 직렬 4기통 엔진을 얹은 후륜구동형이었는데, 이로써 한국은 아시아에서 일본에 이어 2번째로, 세계에서 16번째로 고유모델 자동차를 만든 국가가 되었다. 판매를 개시한 1976년에만 1만726대가 판매되어 포니의 시장점유율은 43.6%를 기록했다. 포니 신화가 탄생되는 순간이자, 한국이 장차 자동차 강국으로 도약하는 전조였던 것이다. 현대차의 양산이 본격화하면서 1974년 2월 26일에는 포니를 비롯한 전 차종의 사후관리를 위해 자본금 2500만 원의 현대자동차서비스를 설립했다. 급증하는 자동차수요를 충족시키기 위해 종합부품 생산공장을 건설하고 1977년 6월 25일에 자본금 2500만 원의 고려정공을 설립했다. 현대자동차서비스로부터 휠, 범퍼 생산시설과 1개 컨테이너 생산라인을 인수하여 출발한 고려정공은 그해 7월 1일에 자본금을 5000만 원으로 증자하고 현대정공으로 변경하였다. 현대정공은 자동차부품의 제조 판매, 운반기기 및 구조물과 부품제조판매, 주물제조판매 뿐만 아니라 밸브류와 주조품 양산에 돌입하였다. 또한 1970년대 중반부터 일기 시작한 수출경기 호조로 컨테이너 수요가 격증하자 현대자동차서비스로부터 인수받은 울산 제1공장에 육상용 및 조선용 밸브를 생산하는 밸브플랜트와 컨테이너 생산시설을 설치하였다. 현대정공은 월 1000대의 컨테이너와 150톤의 밸브 등 주조폼 생산을 본격화하였다. 이후 다양한 컨테이너와 자동차부품을 생산하는 등 사업규모 확대에 주력하는 한편, 1980년에는 현대자동차로부터 특장차량의 특장부문작업을 이관 받아 보냉차, 탱크로리, 더블 캡 등의 생산도 겸하였다. 1981년 4월에는 울산선재와 남목철재를 1982년 7월에는 경일요트산업을 각각 흡수했다. 현대의 자동차사업은 완성차공장에서 출발, A/S 및 자동차부품 제조로 다변화함으로써 현대차의 경쟁력을 점차 높여 나갔다. 조선업계 ‘명장’의 토대를 마련하다 한편 현대중공업은 1978년에 현대차량을 설립했다. 국내 중차량 공업은 1960년대에 기차바퀴와 대차(臺車)를 생산하기 시작하여 1970년대에는 객, 화차를 제작하는 정도였다. 현대중공업은 국방용 특수차량인 중기제품과 철도차량 제조사업을 추진하면서 전담 사업부서를 설치하고 1976년 3월에 방위사업체로 지정받았다. 그러나 현대중공업은 기관차 제작기술이 없어 1977년 5월 스웨덴 ASEA와 전기기관차에 대해, GE사와는 디젤기관차에 대해 각각 기술제휴하고 1977년 12월말 228억 원을 투입, 창원공단 내에 대지 15만평을 확보해서 건평 2만5000평의 기관차공장을 준공하고 1978년 10월에 자본금 5억 원의 현대차량을 설립했다.

1979년 1월부터 기관차 제작에 착수하여 출력 3300마력, 최고설계속도 155km/h의 GT-26CW형 기관차인 국산 1호기를 생산한 이후 특수중기의 생산판매, 디젤기관차, 전기기관차, 전동차, 객화차, 일반기계 제조업으로 사업영역을 점차 확대했다. 현대엔진도 이 무렵에 설립되었다. 국내의 엔진제조 사업은 1960년대부터 본격화하였으나 1970년대 중반까지 소형의 농, 공용 및 자동차용 디젤엔진을 외국 업체와 제휴하여 생산하는 정도였다. 선박용도 연근해 어선용 디젤엔진 정도만 생산하였을 뿐 대형 디젤엔진의 생산은 전무하였다. 1976년 7월 현대중공업 내에 엔진사업부를 신설하여 선박용 엔진생산을 전담하면서부터 현대는 새로 엔진사업에 참여했다. 현대엔진은 1976년 7월 중화학투자조정정책에 따라 6000마력 이상의 대형 디젤엔진 실수요자로 선정 받고 스위스의 Sultzer, 덴마크의 B&W, 독일의 MAN 등과 기술도입계약을 체결, 1977년 3월부터 현대중공업 인근 6만여 평의 부지에 엔진공장을 건설했다. 또한 일본의 고베제강(神戶製鋼), 영국의 Meehanite, 프랑스의 Pielstick 등과 기술도입계약을 체결하고 1979년 6월에 신한해운이 발주한 9380마력의 엔진 1호기와 사우디아라비아의 알코바 담수설비용 펌프 75대(1273만 달러)를 수주하여 선박용 엔진전문업체로 출범하였다. 당초의 내연기관 및 터빈, 축수, 동력전달장치, 금형, 주물의 제조에서 선박용 주기관, 보조기관, 의장품 제조, 산업설비 수출입업, 펄프 제조 등으로 다변화했으며 1981년에는 중전기 제조도 겸했다. 1970년대는 현대그룹 역사상 최대의 확장기. 건설 및 자동차, 조선, 중장비 등을 중심으로 총 33개 업체를 수직계열화 현대중전기 및 경일요트산업의 설립도 주목된다. 현대중공업의 중전기 사업은 1972년에 중공업 본사 내에 전기부와 전장부를 신설하면서부터였다. 이들 부서는 변압기의 수리, 설치, 전장품의 선박에 탑재업무 등을 수행하였다. 그 후 전기기기의 대형화, 고급화가 급속히 추진되어 1977년 2월에 현대중공업은 전기부를 중전기사업본부로 확대 개편하였다. 1977년 5월에 독일 Siemens와 중전기 전반에 대한 기술도입 계약을 체결, 6월에 3630평 규모의 배전반 공장을 건설하고 1978년 11월에 자본금 60억 원의 현대중전기로 발족되었다. 또한 1979년 1월에는 경일산업의 요트사업부를 분리하여 경일요트산업을 설립하였는데 요트 및 FRP어선 등을 건조하는 소규모의 조선회사였다. 또한 현대는 1960년대 후반부터 조선업에의 진출도 서둘렀다. 1969년 1월에 일본 미쓰비시와 합작으로 추진하면서 1970년 3월 1일 현대건설 내에 조선사업부를 설치한 것이었다. 그러나 일본과의 조선합작이 실패하자 1971년 9월에 영국 A&P Appledore와 기술협조 및 선박판매 협조계약을 체결하였다. 그해 10월 영국, 독일, 프랑스, 스페인 등으로부터 4천8백만 달러의 차관자금을 확보하고 1972년 3월부터 울산조선소 건설에 착수했다. 1973년 3월에 26만 톤급의 1호기를 완공하고 조선소를 정식으로 가동, 1973년 12월 28일에 자본금 1억 원의 현대조선중공업을 설립했다. 최대건조능력 70만 DWT, 연 26만 톤급 선박 5척을 건조할 수 있는 울산조선소 완공에는 내자 114억 원과 외자 4000만 달러가 소요되었다. 완공초기 인력규모는 기술직 450명, 사무직 240명, 기능공 6000여 명 등이었다. 차제에 조선용 기자재(프랜지)의 국내제작에도 도전했다. 국내 조선경기 호황과 석유화학공업의 발전으로 프랜지가 대량으로 필요했으나 전량 수입에 의존하는 형편이었다. 이에 현대중공업은 1974년 7월 15일에 일본 프랜지 메이커인 스미토모, 세오, 마루다카 등과 합작해서 울산철공을 설립했던 것이다. 울산철공은 각종 규격의 프랜지를 제작해 그해 11월부터 국내 판매 및 일본 수출을 시작했다. 1976년 3월에 상호를 한국프랜지공업으로 변경했으며 1979년 4월에는 기계, 조선, 산업설비부문을 추가했다. 현대미포조선소는 1975년 2월 현대중공업이 일본 가와자키와 합작하여 자본금 12억 원으로 설립하고 울산 하전만에 수리조선 및 선박개조를 전문으로 하는 국제규모의 도크건설에 착수했다. 설립초기 수리전용 도크를 확보하지 못해 현대중공업의 건조도크를 이용했으나 1977년 3월에 40만DWT급과 15만DWT급 수리전용 도크 2기를, 1978년 12월에 15만 DWT급 도크 1기를 완성하여 선박수리 및 개조작업에 착수했다. 철강-조선-자동차-건설 분야 기반 확보 철강, 알루미늄 등 소재산업에도 진출했는데 현대가 소재산업과 인연을 맺은 것은 1978년 인천제철의 인수로부터 비롯되었다. 인천제철은 중일전쟁 중인 1938년 9월 23일에 진남포에서 일본 이화학흥업(理化學興業), 이연금속(理硏金屬), 주우금속(住友金屬) 등이 자본금 1300만 원을 출자하여 설립한 조선이연금속 인천공장으로 출발했다. 철강, 알루미늄, 마그네슘, 기타 각종 금속을 제조 판매하다가 해방 후 귀속재산화하여 1953년에 인천공장을 모체로 대한중공업공사로 재발족되었는데 당시 시설은 1200마력 압연기와 건물 4443평, 미가동 기계공작물 34점 등이었다. 연산 12만 톤의 평로(平爐), 15만5000톤의 분괴중형, 1만5000톤의 박판설비로 재가동한 대한중공업은 1962년 11월에 인천중공업으로 개명되었다. 인천중공업은 1964년 9월에 제철설비를 분리하여 선철 연산 12만 톤의 인천제철을 설립했다. 이후 두 회사가 경영난에 직면하자 정부는 1970년 4월에 인천중공업을 인천제철에 합병시켜 한국산업은행으로 하여금 관리케 하였다가 부실기업 정리차원에서 1978년 6월에 현대중공업에 인수되었다. 현대종합상사도 1978년 8월에 부실기업 인수전에 참여, 대한알미늄공업과 한국불화공업을 한꺼번에 인수하였다. 대한알미늄은 국내 최초의 알루미늄 제조업체로서 당초 한국알미늄으로 출발하였다. 한국알미늄은 원료인 보크사이트의 확보 곤란과 기술부족 때문에 경영이 어려워지자 1973년 7월 19일에 한국산업은행과 프랑스의 Pechiney사 간에 50:50의 비율로 합작투자하여 자본금 20억6900만 원의 대한알미늄공업으로 재발족되었다. 생산능력은 연산 1만7500톤으로 전해공장, 주조공장, 전극공장 외에 수전설비, 알루미나 저장설비 등 각종 중장비를 갖추었다.

전해공장은 알루미나를 알루미늄으로 만드는 곳으로 120기의 전기로에서 연산 1만7500톤을 생산했다. 주조공장은 6톤 용해로 2기, 4톤 1기, 주조기 2기, 균열로 2기를 갖추고 전해공장에서 용탕(熔湯) 상태로 넘어오는 알루미늄을 제품별로 주조했다. 생산되는 제품은 일반 알루미늄괴인 ingot, 세시 재료인 압연 billet, 전선제조용 wire bar, slab 등이었다. 국내 알루미늄산업이 낙후된 것은 원료인 보크사이트가 전혀 생산되지 않는데다가 막대한 전력을 사용하기 때문이다. 대한알미늄은 여전히 생산부진 및 경영부실을 면치 못하다가 공기업 민영화방침에 따라 1978년 10월 18일에 현대종합상사가 산업은행으로부터 인수하였다. 현대가 건설, 중공업에 특화하면서 자체수요가 엄청난 강관의 직접조달도 시도, 1975년 3월에 현대강관을 설립했다. 현대강관은 자본금 2000만 원의 소규모 업체인 경일산업을 모체로 하여 출발했는데 경일산업은 철근, 못, 철선 등을 생산하여 현대 계열사들에 공급했다. 1977년에는 강관사업부를 신설했으며 압연공장을 선재공장으로 승격시키는 한편, 1978년에는 요트 제조 사업에도 진출하였다. 이 무렵은 국내외적으로 건설경기가 호조를 보여 철강재수요가 급증하였다. 그중에서도 철근 파이프류는 극심한 품귀현상이 야기되어 현대그룹 계열사들의 물량확보에 어려움이 많았다. 차제에 압연사업부는 남목철재로, 요트사업부는 경일요트로, 선재공장은 울산선재로 독립시키는 한편 경일산업은 강관사업만 전념하였다. 1978년 7월 7만6000평의 부지에 강관공장을 건설, 연산 26만 톤의 설비를 확보하고 외경 1/2~12인치의 강관제품을 생산하였다. 1980년 5월 13일에는 자본금 70억 원의 현대강관으로 개명했다. 건설, 중공업 특화 이어 연관산업 전방통합화 한편 현대그룹은 건설 및 자동차, 조선, 중공업 등에 기반을 확보하고 이들 사업일반의 성장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여타 산업을 중심으로 전방통합을 추구했으며 그 첫째는 고려화학의 설립이었다. 계열사들의 점증하는 안료, 도료의 수요를 충족시키기 위하여 1974년 7월 18일에 도료, 합성수지, 접착제, 안료의 제조판매를 목적으로 자본금 5000만 원의 고려화학주식회사를 설립했다. 또한 선박용 도료의 개발을 위해 1974년 12월에 덴마크의 Hempels Marine Paints와 기술도입계약을 체결하고 생산에 착수하였다. 이후 외국의 유수한 업체들과 기술제휴를 통하여 품질향상을 도모하는 한편, 제품을 다변화함으로서 그룹 내 각 계열사들의 페인트수요를 충족시키면서 지속적인 성장을 하였다. 둘째, 해운업에의 진출이었다. 아세아상선(현대상선의 전신)은 1976년 3월 25일에 자본금 2000만 원에 26만3500 DWT의 ‘코리아 선’ 호와 26만2821 DWT의 ‘코리아 스타’ 호. ‘코리아 베너’ 호 등 3척의 VLCC로 설립되었다. 1977년 5월에 곡물, 석탄, 광석물 등을 운반하는 살물선(Bulk Carrier) 아세아 1호, 2호를. 9월에는 청룡 1, 2, 3호 등 원양예인선단을 취항시켜 중동 건설현장까지 자재 운송을 전담케 했다. 아세아상선은 국내 해운불황 하에서도 투자를 확대하여 1977년에는 제3차 계획조선에 참여, 제 6차 계획조선까지 30만 GT에 달하는 15척의 선박을 발주하였다. 또한 1978년 4월에는 자본금 100억 원으로 확대하고 6월에는 국내 처음으로 중동정기항로의 운항 사업면허를 취득함으로써 1979년 3월 12일 제 3회 ‘해운의 날’에 국내최초로 ‘1억불 운임의 탑’을 수상하는 등 대형선사로 도약했다. 셋째, 현대종합목재의 설립이었다. 현대건설은 1976년 12월말부터 중동건설현장용 제재목을 생산하기 위해 울산에 제재소를 마련, 1977년 7월부터 수출가구공장을 가동하면서 1978년 1월에 금강목재공업을 설립했다. 1979년부터 ‘리바트가구’를 국내외에 공급을 개시하면서 점차 가정용 및 선박용 가구, 인테리어, 제재업으로 영업종목을 다변화하여 1980년 1월에 현대종합목재산업으로 변경하였다. 정부 주도의 압축성장 시대를 맞아 건설에서 중공업으로, 하찮은 못에서 대형 선박까지 수직계열화 작업을 통해 국내 정상의 건설기계 기업집단으로 부상 넷째, 현대종합상사의 설립이다. 1973년 벽두부터 국내 중화학공업화가 본격화되었다. 막대한 외화자금이 소요되어 수출 중요성이 한층 제고되었다. 그러나 연말에 불거진 제1차 오일쇼크로 채산성이 급격하게 나빠지는 등 수출전선에 먹구름이 드리웠다. 정부는 수출을 획기적으로 늘리고자 1975년 1월에 일본의 총합무역상사를 벤치마킹한 종합무역상사제를 실시했다. 지정요건은 해외지사 10개 이상, 자본금 10억 원 이상, 50만 달러 이상을 수출하는 7개 품목 이상을 보유하고 있을 것 등이었다. 또한 종합무역상사에게는 국내업체들 간 국제 입찰시 우선 지원은 물론 원자재수입에 대해서도 우선권을 부여했으며 파격적인 수출금융을 제공하는 등 당근을 제공했다. 1975년 5월 삼성물산이 제1호로 지정된 이후 대우실업, (주)쌍용, 국제상사, 한일합섬, 효성물산, 반도상사, SK, 삼화, 금호실업이 종합무역상사로 변신했다. 1976년 현재 현대그룹의 전체 수출실적은 5억4368만 달러로 그해 12월에 자본금 5000만 원의 현대종합상사를 설립했다. 선박부품과 철구제품, 각종 기계, 공산품 원료와 제품, 건축자재와 화학제품, 운반용 기계 등 주로 현대그룹 생산제품과 직물, 편물, 봉제품, 피혁제품의 판매와 수출대행을 위해서였다. 1977년 10월에 기업공개를 단행하고 1978년 2월 11일에 종합무역상사로 지정받았다. 1970년 4월에는 강원은행을, 1972년 2월에는 선일상선을 각각 인수하였고 1973년 12월에는 현대정유판매를 설립하였다. 1977년 7월에는 아산문화복지재단을, 10월에는 금강항공을 각각 설립하였다. 또한 1976년 12월에는 시설대여 및 유가증권 매매를 목적으로 한 현대종합금융도 설립했다. 1970년대는 현대그룹 역사상 최대의 확장기로 평가된다. 이 기간 중 현대그룹은 총 33개 업체를 새로 계열사화하였다. 건설 및 자동차, 조선, 중장비 등을 중심으로 철저한 수직계열화가 특징이다. 현대그룹은 미국 경제전문지 ‘포춘’이 1978년에 세계 500대 기업 중 98위로 선정할 정도로 규모가 확대되었다. 현대건설은 1960~70년대 정부주도의 압축성장 시대를 맞아 건설에서 중공업으로, 하찮은 못에서 대형 선박에 이르기까지 끊임없는 수직계열화작업을 통해 국내정상의 건설기계기업집단으로 부상했다. 정부가 기획하고 연출한 ‘주식회사 한국’ 드라마에 현대는 주연배우 역할을 충실하게 수행했던 것이다. - 이한구 수원대학교 경제금융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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