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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한구의 한국 재벌사]‘왕자의 난’으로 5분열 했지만 자동차·중공업은 굴지기업 성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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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nbnews 제285-286호 박현준⁄ 2012.08.06 15:06:07

1997년 외환위기 수습과정에서 국내 최대 재벌인 현대그룹도 엄청난 변화를 겪어야만 했다. 그룹의 주력이 건설, 자동차, 중공업 등 대규모 중화학공업이었던 탓에 극심한 경기불황을 견뎌내기 어려웠던 때문이었다. 김영삼 대통령 집권초기부터 진행된 경기침체는 집권후반기에 들어 더욱 심해지면서 대부분 기업들이 자금난으로 허덕이고 있던 터였다. 설상가상으로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이 1992년 대통령선거에 출마, 당선이 유력시 되던 김영삼 후보와 경쟁함으로서 현대그룹은 김영삼 대통령 집권기간 내내 위축된 세월을 보내고 있었다. 그러나 1998년 진보성향의 김대중 정부가 들어서면서 상황은 반전되는 듯했는데 계기는 정주영이 1998년 6월 500마리를 소를 몰고 판문점을 통과, 북한과의 물꼬를 튼 때문이었다. 그해 10월 2차로 방북 길에 오른 정주영은 27일에 북한의 김정일 위원장으로부터 향후 30년간 금강산 독점개발권을 선물로 받은 후 11월 18일에는 강원도 동해항에서 관광유람선인 현대금강호를 금강산으로 출범시켰다. 이를 계기로 1999년 3월에는 현대그룹의 북한사업을 총괄할 현대아산주식회사가 설립되었다. 이후부터 현대그룹은 주력사업을 대북사업으로 전환, 금강산관광단지를 개발하고 개성에는 대규모 공단조성계획을 세우는 등 막대한 자금을 대북사업에 쏟아 붙기 시작했다. 한편 김대중 정부는 ‘햇볕정책’을 내세우며 한반도의 냉전청산에 골몰하고 있었으나 드러내놓고 북한에 접근하기에는 한계가 있었다. 어느 정도 분위기가 무르익을 때까지 대리인이 필요했는데 현대야말로 가장 적합한 파트너였던 것이다. 그런 때문인지 정부주도로 추진된 빅딜에서 LG반도체를 현대전자(현 하이닉스반도체)에, 한화에너지의 정유부문을 현대정유에 넘기는 등 현대그룹에 유리하게 전개되었다. 외환위기로 그룹경영이 어려운 상황에서도 정주영은 대북사업을 더욱 확대했다. 그러나 1999년 6월 서해교전이 발발하면서 현대의 대북사업도 교착상태에 빠졌다. 그 와중인 2000년 3월과 5월, 두 차례에 걸쳐 2남 몽구와 5남 몽헌 형제간의 후계구도를 둘러싼 갈등이 표출되었다. 이를 계기로 현대그룹은 몽구계(현대자동차 및 기아자동차, 현대정공, 현대캐피탈, 현대오토넷 등), 몽헌계(현대건설, 현대상선, 현대전자, 현대아산, 현대엘리베이터, 현대기술정보, 현대종합상사, 현대증권, 현대물류 등), 몽준계(현대중공업, 현대미포조선 등) 등으로 계열분리가 완료되었다. 이로써 국내 최대 재벌인 현대그룹은 여러 개의 소그룹으로 완전히 분할되었다. 정주영의 대북사업으로 현대그룹 자금난에 그러나 현대그룹의 계열분리는 몽헌계 계열사들의 몰락을 가속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현대그룹 전반에 대한 시장의 불신이 쌓인 데다 건설경기 침체까지 겹쳤기 때문이었다. 또한 1억5000만 달러나 북한에 지원금을 보낸 상황에서 형제기업들의 지원을 받을 수 없었던 점도 한 요인이었다. 현대그룹의 해체위기가 고조되자 “2000년 4, 5월 두 달간 삼성카드 2000억 원을 포함, 금융기관들이 현대건설의 돈줄이었던 현대상선에서 회수한 자금만 4151억 원에 달해 단기차입금이 많았던 현대건설 계열은 자금난에 허덕일 수밖에 없었다.”(동아일보 2003년 8월 6일 자 ‘秘話 국민의 정부’<31> ⑤ 현대家 왕자의 난 - 下)

현대그룹의 부도위기로 2000년 5월 26일에는 종합주가지수가 하루 동안 무려 42.87포인트가 빠지기도 했다. 이후부터 현대건설, 현대증권 등은 하한가 행진을 계속했다. 시장의 신뢰를 잃었다는 반증이었다. 현대건설은 2000년 10월 29일에 만기가 돌아온 어음 260억 원을 결제하지 못하는 등 점차 한계상황으로 빠져들었다. 이듬해 3월 27일 현대 관련 경제장관 간담회에서 현대그룹의 지배구조를 바꾸는 것을 조건으로 유동성을 지원해 출자전환과 함께 현대건설을 살리기로 결정했다. 그 동안 정주영, 몽헌 부자는 채권단의 우량 계열사 매각을 통한 자구책 강구요청을 거절했다. 그해 5월 18일 현대건설 주주총회에서 당초 채권단의 구상을 안건으로 통과시킴으로써 모 기업인 현대건설은 현대그룹으로부터 떨어져 나갔다. 한편 정부는 2000년 11월 3일에 부실기업 퇴출조치와 관련, 회사채 신속인수제를 마련했다. 현대그룹의 도산이 초래할 최악의 상황을 고려, ‘시장이 납득할만한 수준의 자구노력’을 전제로 현대건설을 살리기로 결정했던 것이다. 내용은 만기가 도래한 회사채를 발행한 기업이 제때 상환하지 못할 때에는 해당기업이 만기도래분 20%만 상환하기로 하고 나머지 80%는 산업은행이 대신 신속하게 갚게 하는 것이었다. 이 제도는 현대그룹을 위해 존재하는 것처럼 보였다. 2000년 5월부터 2002년 9월까지 국책기관과 금융권이 현대그룹에 지원한 금액은 총 33조6000억 원에 달했는데 이 자금을 주로 현대건설(하이닉스)과 현대전자에 쏟아 부었음에도 끝내 현대건설과 현대전자의 소유권은 채권단으로 넘어갔다. 2001년 현대건설은 채권단에 의해 현대그룹에서 분리되어 현대엔지니어링 등과 함께 별도의 현대건설그룹을 이루었다. 그 와중인 2001년 3월 21일에 정주영이 사망했다. 항간에는 정주영이 인생말년의 향수병 때문에 추진했던 대북사업이 현대건설그룹을 붕괴시키고 말았다는 설이 떠돌았다. 현대상선 역시 대북송금을 위해 산업은행에서 빌린 4000억 원을 갚느라 알짜 사업체인 자동차 운반선을 분리, 매각했다. 현대아산은 사업시작 이래 2000년 말까지 북한에 공식적으로 3억3000만 달러를 지급하는 등 누적적자만 3억 달러에 이르고 있다. 이런 연유로 현대아산은 자본금 4500억 원을 전부 소진한 상황에서 2003년 8월 4일에 정몽헌마저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정몽헌의 사망 직후에는 재계서열 15위였던 현대그룹(정몽헌 계)이 경영권분쟁에 휘말렸다. 현대그룹의 지주회사 역할을 하던 현대엘리베이터의 경영권을 두고 정몽헌의 장모이자 대주주인 김문희와 정몽헌의 삼촌 정상영 금강고려화학(KCC) 회장간의 다툼이었다. 발단은 정상영이 사모펀드(신한BNP파이라투신운용 등)를 이용, 10월부터 지분을 사들여 현대엘리베이터의 경영권을 확보하려는 데서부터 비롯되었다. 그러나 금융감독위원회가 2004년 2월 11일에 KCC에 대해 현대엘리베이터 지분 전량을 처분할 것을 명령하면서 경영권분쟁은 종식되었다. 외환위기로 쪼개졌으나 차·중공업은 약진 거듭 현대그룹은 외환위기를 거치면서 여러 개의 중견기업집단으로 재편성되었는데 이후 현대차와 현대중공업은 약진을 거듭해서 2011년 4월 현재 상호출자제한 기업집단 55개 그룹 중 현대차그룹은 4위에, 현대중공업그룹은 6위에 각각 랭크되었다. 국내 최대 건설업체인 현대건설은 산하 비상장 자회사인 현대엔지니어링과 철구조물 전문 제작업체 현대스틸산업, 그리고 광주원주고속도로 건설, 관리 및 운영을 위한 제2 영동고속도로 외에도 현종설계, 부산정관에너지, 현대서산농장, 현대씨엔아이, 경인운하, 현대건설인재개발원 등을 묶어 2010년에 재매각이 추진되었는데 인수에 가장 적극적인 업체는 현대그룹(현정은)과 현대차그룹(정몽구)이었다. 현대그룹은 기존의 연고를, 현대차는 장자로서의 적통성을 각각 인수명분으로 내놓은 것이다. 인수가격을 현대그룹은 5조5000억 원에, 현대차는 5조1000억 원에 응찰했으나 결과는 인수대금을 더 많이 써낸 현대그룹이 우선협상대상자로 결정되었다. 그러나 현대그룹은 자금출처 문제로 시달렸다. 프랑스 나티시스은행으로부터의 차입금 1조2000억 원 등 대출금 세부계획을 제출하라는 채권단의 소명요구에 현대그룹은 MOU가 체결된 상황에서 대출관련 세부상황을 제공할 의무가 없다며 버틴 한편, 현대자동차그룹은 외환은행이 MOU를 체결하는 과정에서 법률적 권한 범위 내에서 적정하게 행동했는지 감독당국에 조사를 요청함과 아울러 현대그룹 2개의 핵심 자회사인 현대상선 및 현대증권을 명예훼손과 무고혐의로 고발조치까지 했다. 결국 채권단은 현대그룹의 우선협상대상자 지위를 박탈하고 현대자동차그룹을 우선협상대상자로 선정, 2011년 4월 1일 현대건설의 인수대금을 완납함으로서 현대자동차그룹의 계열사로 편입되었다. 2011년 8월 현재 현대자동차가 현대건설의 최대주주이다. 이를 포함, 현대모비스, 기아자동차 등의 지분을 모두 합치면 약 35%이다. 현대차가 모태인 현대건설을 인수한 것이다. 그러나 그 와중에서 정몽구, 의선 부자는 소규모 물류업체인 현대글로비스를 창업, 계열사들의 일감몰아주기로 덩치를 키운 후 글로비스로 하여금 계열사 주식을 취득케 해서 현대차그룹의 경영권을 상속하는 편법을 구사함으로써 여론의 호된 비판을 받기도 했다. 이 사건은 세금 한 푼 물지 않고 그룹을 통째로 세습한 대표적 사례로 평가된다. 2011년 4월 현재 계열회사수 9개 업체에 자산총액 16조1440억 원으로 상호출자제한 기업집단 23위의 현대전자(하이닉스)는 2011년 11월 11일 단독인수의향을 밝힌 SK텔레콤에 3조4267억 원에 인수되었다. 창업자 정주영 사후 현대그룹은 재벌서열 2위의 현대기아차그룹(정몽구), 6위의 현대중공업그룹(정몽헌), 17위의 현대그룹(현정은), 24위의 현대백화점그룹(정지선)과 현대산업개발(정세영의 장남 정몽규) 등 5개 그룹으로 분리되었다.<다음 회에는 LG그룹 1화를 싣습니다> - 이한구 수원대학교 경제금융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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