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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한구의 한국 재벌사] LG그룹 편 2화

박정희 동기를 사장으로 내세워 제2정유 허가받으며 대확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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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nbnews 제288호 박현준⁄ 2012.08.20 13:00:11

1959년 3월에는 자본금 1억 환의 락희유지공업을 설립했다. 락희화학에서 생산하는 치약원료인 글리세린을 생산할 목적이었다. 공장건설자금은 1959년도 유지(油脂) 부문의 ICA 원조자금 34만 달러 등으로 충당했는데 배경은 다음과 같다. 글리세린은 비누의 부산물로 비누를 만들면 자동으로 글리세린이 생산된다. 당시 우지(牛脂)는 소맥, 원면 등과 함께 원조물자로 공급된 탓에 비누공장들은 호황을 누렸으나 글리세린은 애경유지가 독점공급하고 있어 원료확보에 어려움이 많았다. 차제에 락희화학은 값싼 우지를 이용해 비누도 만들고 부산물로 치약원료인 글리세린도 생산하고자 락희유지를 설립했던 것이다. 화학 중심 수직적 계열화 도모 1962년 8월에는 자본금 3000만 원의 락희비니루공업을 설립했다. 1960년대 초 비닐장판, 스폰지레저, 건축용 비닐타일 등이 국산화되는 등 향후 비닐제품 수요가 지속적으로 증가할 것으로 판단하여 부산 연지공장의 비닐 부문을 분리하여 설립한 것이다. 1963년 7월에는 락희화학과 허진구(許晉九)가 50:50 비율로 한국미공을 설립하고 서울 구로동에 공장을 건설했다. 락희화학 동래공장으로부터 비닐시트를 구입하여 인플레터블 토이를 생산, 수출하기 위해서였다. 1968년 3월 21일에는 미국 Continental Carbon Co.와 50:50의 비율로 합작하여 한국콘티넨탈카본(자본금 2700만 원)을 설립했다. 당시 국내에는 고무제품 보강재로 사용되는 카본블랙이 전혀 생산되지 않았다. 카본블랙은 고무에 탄력과 강도를 더해주는 보강재였기 때문에 고무공업, 특히 타이어 제조에는 필수적인 원료였다. 꿩 대신 닭이라고 충주비료공장의 연돌에서 채취되는 탄소알갱이로 고무신을 제조하는 수준이었다. 락희화학은 향후 카본블랙에 대한 수요가 점증할 것으로 예상하고 공장건설을 고려하던 중에 거래관계에 있던 미국 컨티넨탈 카본 사가 합작을 제의하여 설립한 것이다. 1968년 10월 15일 인천 갈산동의 1만1000여 평의 부지에 공장건설을 착수하여 1969년 9월에 연산 7500톤 규모의 공장을 완공하였다. 한편 1962년 5월에는 자본금 10억 환의 한국케이블공업을 설립했는데 배경은 다음과 같다. 1960년 4.19혁명과 함께 과거 이승만 정권하에서 탈세, 밀수, 정경유착 등으로 부정축재한 기업가들에 대한 처벌요구가 비등했는데 이병철(삼성), 정재호(삼호), 이정림(개풍), 설경동(대한), 이양구(동양), 남궁련(극동), 최태섭(한국유리) 등 유명 기업인 24명이 연루되었다. 구인회도 탈세액 3000만 환을 자진 신고했다. 부정축재자에 대한 단죄 움직임은 1961년 5.16 군사쿠데타와 함께 구체화되어 연루 기업인들이 줄줄이 투옥되면서 이병철, 정재호, 함창희(동립산업), 이정림, 최태섭, 설경동, 조성철(중앙산업), 남궁련 등은 전 재산을 국가에 헌납한다고 발표하기도 했다. 이후 상황이 반전되어 정부는 부정축재 기업인들이 보유한 시중은행 주식을 전부 몰수하는 한편 14명의 기업가들에겐 별도로 비료, 화섬공장 등 5대 기간 사업체를 건설해서 국가에 헌납할 것을 명령했다. 구인회는 아세테이트 공장과 종합전기 공장을 건설하기로 하고 1962년 3월에는 서독의 Fuhrmeister 사와 295만 달러의 차관계약을 체결했다. 그러나 동년 4월 7일에 군사정부는 구인회에게 전선공장을 건설하도록 통보, 같은 해 5월 5일에 한국케이블공업을 설립했던 것이다. 그해 10월 경기도 시흥군 안양읍 호계리에 착공, 4년여 만인 1966년 4월에 완공했다. 그러나 건설 과정에서의 자금난에다 영업 전망까지 불투명해 1966년 9월에 금성사에 흡수합병되었다가 1969년에 금성전선으로 분리되었다. 1964년 5월에는 부산 국제신보를 인수하여 언론 사업에도 진출하였다. 1949년 9월 김형두 등에 의해 산업신문으로 설립되었다가 1950년 8월에 국제신보로 개칭되었다. 한국전쟁 중에는 다소 활성화되었으나 휴전 후 정부가 서울로 환도하면서 사세가 기울어 LG그룹에 인수되었던 것이다. 초대 사장으로 국회의원을 역임한 서정귀(徐廷貴)를 임명하였다. 이로써 LG그룹은 모기업인 락희화학 산하에 금성사와 한국케이블, 반도상사, 락희유지, 락희비니루, 한국미공, 국제신보 등을 두어 기업집단을 형성하였다. 이 무렵까지 LG그룹은 주로 화학 중심의 수직계열화를 도모했다. 치열한 각축전 끝에 호남정유 설립 1960년대에는 제 1, 2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의 추진으로 점차 경제규모가 확대되었다. 이에 따라 전기, 석유 등의 에너지 소비도 점증해서 정부는 에너지 정책을 종래 석탄 중심에서 열효율이 높은 석유 중심의 주유종탄(主油從炭) 정책으로 전환하고 정유시설의 확충에 관심을 기울였다. 국영기업인 대한석유공사(현 SK에너지)를 설립하고 1964년부터 가동했는데 1965년 한 해 동안에 20억 원의 이윤을 발생시켜 관심이 집중되었다. 차제에 정부는 제2 정유공장 건설을 구상했는데 이 공장은 처음부터 민간주도로 추진하기로 하였다. 소문이 나돌기 시작하자 가장 먼저 관심을 표명한 기업들은 LG, 롯데, 한국화약 등이었다. LG는 제2 정유공장의 실수요자로 선정받기 위해 1965년 가을에 가칭 한국석유화학공업을 설립하는 한편 사업계획서를 정부에 제출했다. “계획서에는 정유사업은 물론 납사분해, 폴리에틸렌 생산공장을 비롯한 석유화학공장을 망라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 계획은 연매출 30억 원에 불과한 락희화학으로서는 도저히 감당하기 힘든 프로젝트였으며 정부에 의하여 거부되었다.”(‘럭키40년사’, 34쪽)

LG는 재차 사업권을 얻기 위해 기존 사업계획서를 변경, 정유사업으로 사업범위를 한정하고 경영능력을 확충하기 위해 1966년 2월에 일본 미쓰이물산(三井物産)과 정유공장 건설을 위한 3000만 달러 차관계약을 체결했다. 또한 미국 Mobil 사와 원유공급 및 운영자금 500만 달러의 차관도입 계약을 체결하는 등 준비를 서둘렀다. 1966년 5월 정부는 제2 정유공장 실수요자를 공모한 결과 LG그룹의 호남정유를 비롯, 롯데그룹의 동방석유, 판본방직의 삼남석유, 한국화약의 삼양개발, 한양대재단의 한양석유 등 6개 기업이 응모했다. ‘해외 석유메이저들과 연결하여 합작공장을 설립한다’는 안을 제출하였는데 한화계열의 삼양개발은 미국 스켈리와 일본 스미또모(住友)를 합작선으로, 롯데의 동방석유는 일본의 이토추와, 판본의 삼남석유는 미국 썬오일 및 컨티넨탈 등과 연계했다. 대한증권의 삼양석유는 일본 일면(日綿)과, 한양대의 한양석유화학은 미국 스탠다드와 각각 연결했다. 호남정유(현 GS 칼텍스)는 LG그룹이 국제신보를 인수하면서 사장으로 영입한 서정귀를 전면에 내세워 정부를 상대로 설득전을 전개하였다. 그는 대구사범과 경성법전을 졸업한 후 4, 5대 민의원을 역임하고 재무부 및 정무차관을 거친 박정희 대통령의 대구사범 동기동창이었다. 실수요자 선정이 임박할 무렵 합작선인 미쓰이물산이 한비(韓肥) 사건에 연루되어 국내여론이 좋지 않자 호남정유는 합작선을 미국의 칼텍스로 전환하였다. 1966년 11월 17일에 제2 정유공장 실수요자로 호남정유가 지정되면서 치열한 각축전도 종료되었다. 1967년 5월 15일에 미국 칼텍스와 50:50의 비율로 합작, 호남정유를 설립함으로써 LG그룹은 최정상의 기업집단으로 부상하였다. 2대 구자경, 활발한 다각화로 계열사 수 2배 1969년 12월 창업주 구인회 사망 당시 LG그룹은 화학, 전기, 전자, 무역, 언론 등 총 11개 기업군을 거느리고 있었다. 삼성그룹은 물론이고 현대그룹에 비해서도 계열사수가 극히 적어 초라해 보였다. 이 무렵까지 LG그룹이 영위하는 업종은 주력인 화학과 전자 등 비교적 단순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무렵 금성사는 삼영수지(합성수지성형물), 성예사(목제 부품류), 성철사(철제 부품류), 성아사(정밀부품), 성요사(전자부품), 성주사(제품양산용 주물) 등 9개의 중소부품업체들을 설립해서 협력회사란 이름으로 경영했다. 구자경이 2대 총수로 등장한 이후 첫 다각화는 1970년 4월에 범한화재해상보험을 서정귀와 공동으로 인수한 것이다. 새로 가동한 호남정유의 원유 수송 시 발생할 수도 있는 위험분산이 주된 이유였다. 1972년에 락희화학을 (주)럭키로 상호를 변경하고 울주군 언양면 망양리 338 일대 11만평을 매입해서 1979년까지 하이타이, DOP, 솔비톨, 옥당 등 대단위 울산공장을 완성했다. 1974년 7월에는 울주군 웅촌면 대대리에 510평의 공장을 확보하고 럭키포장(주)을 설립했다. 편직기 50대를 설치하고 동래 공장의 레저에 사용되는 면(綿)메리야스를 월 300대씩 임가공했는데 당시 단일공장으론 국내 최대였다. 또한 럭키그룹은 전남 여천 제3석유화학프로젝트에 참여하기 위해 1978년 3월에 자본금 1억 원의 럭키석유화학을 설립했다. 그해 11월에 럭키석유화학이 나프타분해공장과 저밀도 폴리에틸렌공장 건설 실수요자로 선정되어 1979년 4월에 저밀도 폴리에틸렌사업을 전담할 목적으로 럭키폴리케미칼(주)을 설립했다. 한편 이 무렵에는 전기전자부문에 대한 다각화작업도 활발히 전개했다. 1970년 8월에 금성사는 일본 알프스전기와 합작해서 금성알프스전자를 설립하였으며, 12월에는 금성전기를 설립하였다. 금성전기는 금성사와 금성통신으로부터 반송통신장치, 무선통신분야의 시설 및 영업권을 인수받아 당시 미개척 분야였던 이 부문을 전문화시킨 것이었다. 1971년 2월에는 금성전공을 설립하여 전력 및 통신용 전선, 케이블 판매업을 영위하다가 1975년 2월에 희성산업으로 개명하고 사업종목에 구룡광산 운영을 추가하였다. 희성산업은 1978년 4월부터 그룹 내 홍보, 선전을 전담하는 하우스 에이전시(House Agency)로 재출발하였다. 1971년 6월 22일에는 금성사의 투자로 설립된 부품공급 전담사인 성음사를 해체하고 대신 일본 포스터전기와 50:50의 비율로 합작하여 자본금 1억3000만 원의 금성포스터를 설립하였다. 라디오 및 TV용 스피커와 부품 등을 생산하여 미국, 일본 등지에 수출할 목적으로 설립하였는데 생산능력은 연 30만개였다. 1974년 6월에는 일본 후지(富士)전기와 합작하여 금성계전을 설립하였다. 산업용 전기기기사업의 전문화를 위해 금성통신에서 분리, 설립한 것이다. 1976년 1월에는 서울 중구 도동 1가 3에 있는 삼주빌딩을 대우그룹으로부터 매수하여 그룹사옥으로 활용하였으며 2월에는 금성정밀을 설립하여 정밀기계 분야에도 진출하였다. 1978년 5월에는 에스컬레이터 등 승강기류 및 전동공구를 생산하던 서통전기를 인수하여 신영전기로 개명하고 승강기를 비롯한 중전기기 분야에 참여하였다. 또한 금성사는 서통그룹의 서통전기를 비롯한 서통전자, 서통정밀 등 3사의 주식 316만7900주를 31억3500원에 매입하였다. 일본 미쓰비시(三菱)전기와 미쓰비시(三菱)상사가 서통전기 주식의 각각 25%와 9.31%를 보유하고 있었는데 금성사는 미쓰비시 측 지분을 그대로 유지한 채 인수하였다. 서통전자는 인수 직후 희성전자로 상호를 변경하여 1년간 운영하다가 1980년 7월 4일부로 해산하였고 서통정밀은 인수 직후 해체되었다. 1978년 6월 2일에는 금전등록기 전문생산업체인 서흥전기의 발행주식 중 45.2%인 14만2831주를 1억5639만9945원에 인수했다. 그러나 금전등록기 사업전망 불투명과 재무구조 악화로 1982년 12월에 해체하였다. 또한 1979년 9월에는 금성반도체를 인수하는 등 서서히 첨단산업 시대를 대비했다.

화학 및 전기전자 이외의 다각화 내역은 다음과 같다. 1971년 6월에는 한국광업제련을 대한전선과 공동으로 인수하였으며 10월에는 부산문화TV방송을 인수했으며 1973년 6월에는 국제증권을 설립하였다. 당시 재벌들의 증권업에 대한 참여가 점차 고조되기 시작하였는데 이는 1973년 ‘8.3 사채동결 조치’ 이후 정부 차원의 기업공개유도에 따른 증시활황에 대비한 사전포석이었다. 학교법인 연암학원도 그해에 설립했다. 연암학원은 1974년 3월에 연암축산고등기술학교를 설립하였는데 1977년 3월에는 연암축산전문학교(현 연암대학)로 승격되었다. 한편 중동건설 특수가 절정을 이루던 1977년 10월에는 뒤늦게 해외건설수주에 참여하기 위해 럭키해외건설을 설립했다. 1978년 2월에는 럭키개발이 세계산업을 인수-합병하여 국내건설업에도 진출하였다. 또한 1978년 10월에는 럭키엔지니어링을 설립함으로써 토건 관련 소그룹을 형성했다. 이때 LG그룹은 유통업에도 진출했다. 1974년 유통업 근대화 및 대형화를 목표로 한 대통령 지시각서에 의해 대기업들의 참여가 가능해짐에 따라 그해 12월에 럭키슈퍼체인(주)을, 1975년 9월에는 럭키체인스토아(주)를 각각 설립해서 소매상들의 연쇄점화를 도모했다. 1976년에는 럭키슈퍼체인과 럭키체인스토아를 통합해서 럭키체인(주)로 재발족해서 대형 슈퍼마켓과 소형연쇄점을 종합관리하게 했는데 서울과 안양, 의정부 등 총 11개의 대형슈퍼마켓과 체인점 20개소가 매출 1400억 원대를 기록했다. LG그룹은 구자경이 총수로 부상하면서 다각화에 박차를 가한 결과 1969년 현재 11개 계열사에서 1979년에는 23개로 증가하였다. 1970년대는 LG그룹 창업 이래 가장 활발한 다각화 시기였다. 이 시기 LG그룹은 기존의 화학 및 전기전자 외에도 보험, 언론, 건설, 유통 등으로 다각화함으로서 복합기업집단으로 전환하고 있다. 이한구 수원대학교 경제금융학과 교수 1959년 3월에는 자본금 1억 환의 락희유지공업을 설립했다. 락희화학에서 생산하는 치약원료인 글리세린을 생산할 목적이었다. 공장건설자금은 1959년도 유지(油脂) 부문의 ICA 원조자금 34만 달러 등으로 충당했는데 배경은 다음과 같다. 글리세린은 비누의 부산물로 비누를 만들면 자동으로 글리세린이 생산된다. 당시 우지(牛脂)는 소맥, 원면 등과 함께 원조물자로 공급된 탓에 비누공장들은 호황을 누렸으나 글리세린은 애경유지가 독점공급하고 있어 원료확보에 어려움이 많았다. 차제에 락희화학은 값싼 우지를 이용해 비누도 만들고 부산물로 치약원료인 글리세린도 생산하고자 락희유지를 설립했던 것이다. 화학 중심 수직적 계열화 도모 1962년 8월에는 자본금 3000만 원의 락희비니루공업을 설립했다. 1960년대 초 비닐장판, 스폰지레저, 건축용 비닐타일 등이 국산화되는 등 향후 비닐제품 수요가 지속적으로 증가할 것으로 판단하여 부산 연지공장의 비닐 부문을 분리하여 설립한 것이다. 1963년 7월에는 락희화학과 허진구(許晉九)가 50:50 비율로 한국미공을 설립하고 서울 구로동에 공장을 건설했다. 락희화학 동래공장으로부터 비닐시트를 구입하여 인플레터블 토이를 생산, 수출하기 위해서였다. 1968년 3월 21일에는 미국 Continental Carbon Co.와 50:50의 비율로 합작하여 한국콘티넨탈카본(자본금 2700만 원)을 설립했다. 당시 국내에는 고무제품 보강재로 사용되는 카본블랙이 전혀 생산되지 않았다. 카본블랙은 고무에 탄력과 강도를 더해주는 보강재였기 때문에 고무공업, 특히 타이어 제조에는 필수적인 원료였다. 꿩 대신 닭이라고 충주비료공장의 연돌에서 채취되는 탄소알갱이로 고무신을 제조하는 수준이었다. 락희화학은 향후 카본블랙에 대한 수요가 점증할 것으로 예상하고 공장건설을 고려하던 중에 거래관계에 있던 미국 컨티넨탈 카본 사가 합작을 제의하여 설립한 것이다. 1968년 10월 15일 인천 갈산동의 1만1000여 평의 부지에 공장건설을 착수하여 1969년 9월에 연산 7500톤 규모의 공장을 완공하였다.

한편 1962년 5월에는 자본금 10억 환의 한국케이블공업을 설립했는데 배경은 다음과 같다. 1960년 4.19혁명과 함께 과거 이승만 정권하에서 탈세, 밀수, 정경유착 등으로 부정축재한 기업가들에 대한 처벌요구가 비등했는데 이병철(삼성), 정재호(삼호), 이정림(개풍), 설경동(대한), 이양구(동양), 남궁련(극동), 최태섭(한국유리) 등 유명 기업인 24명이 연루되었다. 구인회도 탈세액 3000만 환을 자진 신고했다. 부정축재자에 대한 단죄 움직임은 1961년 5.16 군사쿠데타와 함께 구체화되어 연루 기업인들이 줄줄이 투옥되면서 이병철, 정재호, 함창희(동립산업), 이정림, 최태섭, 설경동, 조성철(중앙산업), 남궁련 등은 전 재산을 국가에 헌납한다고 발표하기도 했다. 이후 상황이 반전되어 정부는 부정축재 기업인들이 보유한 시중은행 주식을 전부 몰수하는 한편 14명의 기업가들에겐 별도로 비료, 화섬공장 등 5대 기간 사업체를 건설해서 국가에 헌납할 것을 명령했다. 구인회는 아세테이트 공장과 종합전기 공장을 건설하기로 하고 1962년 3월에는 서독의 Fuhrmeister 사와 295만 달러의 차관계약을 체결했다. 그러나 동년 4월 7일에 군사정부는 구인회에게 전선공장을 건설하도록 통보, 같은 해 5월 5일에 한국케이블공업을 설립했던 것이다. 그해 10월 경기도 시흥군 안양읍 호계리에 착공, 4년여 만인 1966년 4월에 완공했다. 그러나 건설 과정에서의 자금난에다 영업 전망까지 불투명해 1966년 9월에 금성사에 흡수합병되었다가 1969년에 금성전선으로 분리되었다. 1964년 5월에는 부산 국제신보를 인수하여 언론 사업에도 진출하였다. 1949년 9월 김형두 등에 의해 산업신문으로 설립되었다가 1950년 8월에 국제신보로 개칭되었다. 한국전쟁 중에는 다소 활성화되었으나 휴전 후 정부가 서울로 환도하면서 사세가 기울어 LG그룹에 인수되었던 것이다. 초대 사장으로 국회의원을 역임한 서정귀(徐廷貴)를 임명하였다. 이로써 LG그룹은 모기업인 락희화학 산하에 금성사와 한국케이블, 반도상사, 락희유지, 락희비니루, 한국미공, 국제신보 등을 두어 기업집단을 형성하였다. 이 무렵까지 LG그룹은 주로 화학 중심의 수직계열화를 도모했다. 치열한 각축전 끝에 호남정유 설립 1960년대에는 제 1, 2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의 추진으로 점차 경제규모가 확대되었다. 이에 따라 전기, 석유 등의 에너지 소비도 점증해서 정부는 에너지 정책을 종래 석탄 중심에서 열효율이 높은 석유 중심의 주유종탄(主油從炭) 정책으로 전환하고 정유시설의 확충에 관심을 기울였다. 국영기업인 대한석유공사(현 SK에너지)를 설립하고 1964년부터 가동했는데 1965년 한 해 동안에 20억 원의 이윤을 발생시켜 관심이 집중되었다. 차제에 정부는 제2 정유공장 건설을 구상했는데 이 공장은 처음부터 민간주도로 추진하기로 하였다. 소문이 나돌기 시작하자 가장 먼저 관심을 표명한 기업들은 LG, 롯데, 한국화약 등이었다. LG는 제2 정유공장의 실수요자로 선정받기 위해 1965년 가을에 가칭 한국석유화학공업을 설립하는 한편 사업계획서를 정부에 제출했다. “계획서에는 정유사업은 물론 납사분해, 폴리에틸렌 생산공장을 비롯한 석유화학공장을 망라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 계획은 연매출 30억 원에 불과한 락희화학으로서는 도저히 감당하기 힘든 프로젝트였으며 정부에 의하여 거부되었다.”(‘럭키40년사’, 34쪽) LG는 재차 사업권을 얻기 위해 기존 사업계획서를 변경, 정유사업으로 사업범위를 한정하고 경영능력을 확충하기 위해 1966년 2월에 일본 미쓰이물산(三井物産)과 정유공장 건설을 위한 3000만 달러 차관계약을 체결했다. 또한 미국 Mobil 사와 원유공급 및 운영자금 500만 달러의 차관도입 계약을 체결하는 등 준비를 서둘렀다. 1966년 5월 정부는 제2 정유공장 실수요자를 공모한 결과 LG그룹의 호남정유를 비롯, 롯데그룹의 동방석유, 판본방직의 삼남석유, 한국화약의 삼양개발, 한양대재단의 한양석유 등 6개 기업이 응모했다. ‘해외 석유메이저들과 연결하여 합작공장을 설립한다’는 안을 제출하였는데 한화계열의 삼양개발은 미국 스켈리와 일본 스미또모(住友)를 합작선으로, 롯데의 동방석유는 일본의 이토추와, 판본의 삼남석유는 미국 썬오일 및 컨티넨탈 등과 연계했다. 대한증권의 삼양석유는 일본 일면(日綿)과, 한양대의 한양석유화학은 미국 스탠다드와 각각 연결했다. 호남정유(현 GS 칼텍스)는 LG그룹이 국제신보를 인수하면서 사장으로 영입한 서정귀를 전면에 내세워 정부를 상대로 설득전을 전개하였다. 그는 대구사범과 경성법전을 졸업한 후 4, 5대 민의원을 역임하고 재무부 및 정무차관을 거친 박정희 대통령의 대구사범 동기동창이었다. 실수요자 선정이 임박할 무렵 합작선인 미쓰이물산이 한비(韓肥) 사건에 연루되어 국내여론이 좋지 않자 호남정유는 합작선을 미국의 칼텍스로 전환하였다. 1966년 11월 17일에 제2 정유공장 실수요자로 호남정유가 지정되면서 치열한 각축전도 종료되었다. 1967년 5월 15일에 미국 칼텍스와 50:50의 비율로 합작, 호남정유를 설립함으로써 LG그룹은 최정상의 기업집단으로 부상하였다. 2대 구자경, 활발한 다각화로 계열사 수 2배 1969년 12월 창업주 구인회 사망 당시 LG그룹은 화학, 전기, 전자, 무역, 언론 등 총 11개 기업군을 거느리고 있었다. 삼성그룹은 물론이고 현대그룹에 비해서도 계열사수가 극히 적어 초라해 보였다. 이 무렵까지 LG그룹이 영위하는 업종은 주력인 화학과 전자 등 비교적 단순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무렵 금성사는 삼영수지(합성수지성형물), 성예사(목제 부품류), 성철사(철제 부품류), 성아사(정밀부품), 성요사(전자부품), 성주사(제품양산용 주물) 등 9개의 중소부품업체들을 설립해서 협력회사란 이름으로 경영했다.

구자경이 2대 총수로 등장한 이후 첫 다각화는 1970년 4월에 범한화재해상보험을 서정귀와 공동으로 인수한 것이다. 새로 가동한 호남정유의 원유 수송 시 발생할 수도 있는 위험분산이 주된 이유였다. 1972년에 락희화학을 (주)럭키로 상호를 변경하고 울주군 언양면 망양리 338 일대 11만평을 매입해서 1979년까지 하이타이, DOP, 솔비톨, 옥당 등 대단위 울산공장을 완성했다. 1974년 7월에는 울주군 웅촌면 대대리에 510평의 공장을 확보하고 럭키포장(주)을 설립했다. 편직기 50대를 설치하고 동래 공장의 레저에 사용되는 면(綿)메리야스를 월 300대씩 임가공했는데 당시 단일공장으론 국내 최대였다. 또한 럭키그룹은 전남 여천 제3석유화학프로젝트에 참여하기 위해 1978년 3월에 자본금 1억 원의 럭키석유화학을 설립했다. 그해 11월에 럭키석유화학이 나프타분해공장과 저밀도 폴리에틸렌공장 건설 실수요자로 선정되어 1979년 4월에 저밀도 폴리에틸렌사업을 전담할 목적으로 럭키폴리케미칼(주)을 설립했다. 한편 이 무렵에는 전기전자부문에 대한 다각화작업도 활발히 전개했다. 1970년 8월에 금성사는 일본 알프스전기와 합작해서 금성알프스전자를 설립하였으며, 12월에는 금성전기를 설립하였다. 금성전기는 금성사와 금성통신으로부터 반송통신장치, 무선통신분야의 시설 및 영업권을 인수받아 당시 미개척 분야였던 이 부문을 전문화시킨 것이었다. 1971년 2월에는 금성전공을 설립하여 전력 및 통신용 전선, 케이블 판매업을 영위하다가 1975년 2월에 희성산업으로 개명하고 사업종목에 구룡광산 운영을 추가하였다. 희성산업은 1978년 4월부터 그룹 내 홍보, 선전을 전담하는 하우스 에이전시(House Agency)로 재출발하였다. 1971년 6월 22일에는 금성사의 투자로 설립된 부품공급 전담사인 성음사를 해체하고 대신 일본 포스터전기와 50:50의 비율로 합작하여 자본금 1억3000만 원의 금성포스터를 설립하였다. 라디오 및 TV용 스피커와 부품 등을 생산하여 미국, 일본 등지에 수출할 목적으로 설립하였는데 생산능력은 연 30만개였다. 1974년 6월에는 일본 후지(富士)전기와 합작하여 금성계전을 설립하였다. 산업용 전기기기사업의 전문화를 위해 금성통신에서 분리, 설립한 것이다. 1976년 1월에는 서울 중구 도동 1가 3에 있는 삼주빌딩을 대우그룹으로부터 매수하여 그룹사옥으로 활용하였으며 2월에는 금성정밀을 설립하여 정밀기계 분야에도 진출하였다. 1978년 5월에는 에스컬레이터 등 승강기류 및 전동공구를 생산하던 서통전기를 인수하여 신영전기로 개명하고 승강기를 비롯한 중전기기 분야에 참여하였다. 또한 금성사는 서통그룹의 서통전기를 비롯한 서통전자, 서통정밀 등 3사의 주식 316만7900주를 31억3500원에 매입하였다. 일본 미쓰비시(三菱)전기와 미쓰비시(三菱)상사가 서통전기 주식의 각각 25%와 9.31%를 보유하고 있었는데 금성사는 미쓰비시 측 지분을 그대로 유지한 채 인수하였다. 서통전자는 인수 직후 희성전자로 상호를 변경하여 1년간 운영하다가 1980년 7월 4일부로 해산하였고 서통정밀은 인수 직후 해체되었다. 1978년 6월 2일에는 금전등록기 전문생산업체인 서흥전기의 발행주식 중 45.2%인 14만2831주를 1억5639만9945원에 인수했다. 그러나 금전등록기 사업전망 불투명과 재무구조 악화로 1982년 12월에 해체하였다. 또한 1979년 9월에는 금성반도체를 인수하는 등 서서히 첨단산업 시대를 대비했다. 화학 및 전기전자 이외의 다각화 내역은 다음과 같다. 1971년 6월에는 한국광업제련을 대한전선과 공동으로 인수하였으며 10월에는 부산문화TV방송을 인수했으며 1973년 6월에는 국제증권을 설립하였다. 당시 재벌들의 증권업에 대한 참여가 점차 고조되기 시작하였는데 이는 1973년 ‘8.3 사채동결 조치’ 이후 정부 차원의 기업공개유도에 따른 증시활황에 대비한 사전포석이었다. 학교법인 연암학원도 그해에 설립했다. 연암학원은 1974년 3월에 연암축산고등기술학교를 설립하였는데 1977년 3월에는 연암축산전문학교(현 연암대학)로 승격되었다. 한편 중동건설 특수가 절정을 이루던 1977년 10월에는 뒤늦게 해외건설수주에 참여하기 위해 럭키해외건설을 설립했다. 1978년 2월에는 럭키개발이 세계산업을 인수-합병하여 국내건설업에도 진출하였다. 또한 1978년 10월에는 럭키엔지니어링을 설립함으로써 토건 관련 소그룹을 형성했다. 이때 LG그룹은 유통업에도 진출했다. 1974년 유통업 근대화 및 대형화를 목표로 한 대통령 지시각서에 의해 대기업들의 참여가 가능해짐에 따라 그해 12월에 럭키슈퍼체인(주)을, 1975년 9월에는 럭키체인스토아(주)를 각각 설립해서 소매상들의 연쇄점화를 도모했다. 1976년에는 럭키슈퍼체인과 럭키체인스토아를 통합해서 럭키체인(주)로 재발족해서 대형 슈퍼마켓과 소형연쇄점을 종합관리하게 했는데 서울과 안양, 의정부 등 총 11개의 대형슈퍼마켓과 체인점 20개소가 매출 1400억 원대를 기록했다. LG그룹은 구자경이 총수로 부상하면서 다각화에 박차를 가한 결과 1969년 현재 11개 계열사에서 1979년에는 23개로 증가하였다. 1970년대는 LG그룹 창업 이래 가장 활발한 다각화 시기였다. 이 시기 LG그룹은 기존의 화학 및 전기전자 외에도 보험, 언론, 건설, 유통 등으로 다각화함으로서 복합기업집단으로 전환하고 있다. - 이한구 수원대학교 경제금융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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