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88호 최영태⁄ 2012.08.23 14:43:56
하루가 멀다 하고 지하철-노상에서 무차별 칼부림이 이어지고 있다. 그 피해자는 지하철-거리를 이용하는 서민들이다. 많이 가진 자들은 승용차를 타고 다니지 전철을 타는 것처럼 격 떨어지는 행동을 싫어하기 때문이다. 익히 알려져 있듯 묻지마 범죄의 직접적 원인은 실업이다. 그리고 서구에서 실업률은 신자유주의가 위세를 발휘하기 시작한 80년대부터 높아지기 시작했다. 실업률이 높아지면 묻지마 범죄가 늘어난다. 그런 실적에 대한 자세한 데이터는 제임스 길리건 저 ‘왜 어떤 정치인은 다른 정치인보다 해로운가’에 나와 있다. 이 책의 저자 길리건은 의사다. 그는 미국의 자살-살인율 곡선을 연구하다가 아주 이상한 현상을 발견한다. 부자를 위한 정당인 공화당이 집권하면 자살-살인율이 전염병 수준으로 올라가고, 민주당이 집권하면 보통 수준으로 떨어지는 현상을 발견한 것이었다. 묻지마범죄가 미국의 보수당에 유리했던 이유 부자 정당 지지자에겐 실업률이 높아야 좋다. 그래야 임금 수준이 낮아지고, 직장에 있는 사람이나 실업자나 고용주에게 절대충성을 맹세하게 된다. 길리건의 분석에 따르면, 부자를 위한 정당(미국이라면 공화당)이 집권하면 실업률이 높아지고, 실업률이 높아지면 자살-살인이 늘어나고, 공화당이 선거에서 이긴다. 이상하다. 왜 자살, 살인, 범죄가 늘어나면 공화당에 유리할까? 이는 묻지마범죄가 사람들을 불안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묻지마범죄는 빈자가 보통사람을 상대로 일으키는 범죄다. 그러면 보통사람들은 빈자를 싫어하게 된다. 진보 정당을 지지해야 할 보통사람들과 빈자(실업자) 사이에 거리감이 생기고, 빈자(실업자)를 돕자는 정당 역시 싫어진다. 서민들 사이에 이런 분열이 생기면 분열통치(divide and rule)에 좋다. 전철간-거리의 사람들이 칼에 찔릴 때(즉, 실업률이 높을 때)이런 사태를 막지 못한 진보-개혁 세력은 자신의 가슴을 친다. 반면, 부자 정당은 이럴 때 소리를 높인다. “빈자에 동정적인 진보 정당은 안 된다. 우리만이 범죄자들을 때려잡을 수 있다”고. 그러면 분열된 서민들의 표는 보수 정당으로 몰린다. 물론 공화당이 집권하면 실업률은 높아지고 범죄율은 또 올라간다. 부자당이 집권하면 묻지마범죄 많아지고, 부자당은 더 많은 표 받고 이런 공식이 미국에서 그대로 실현됐다는 게 길리건 박사의 분석이다. 끔찍한 이야기다. 이런 공식이 깨질 때는 오로지 공화당이 장기집권해 부가 지나치게 한쪽으로 쏠린 뒤 공황이 일어날 때뿐이다. 공화당의 장기 집권 뒤 공황이 일어나 민주당이 정권을 물려받은 것은 모두 네 번(1913년, 1933년, 1961년, 2009년)이다. 반대로 민주당 집권에 따른 불황으로 공화당이 정권을 물려받은 것은 딱 한 번(1921년)뿐이다. 공화당이 일으킨 공황들은 1929년 대공황, 2008년 세계금융위기처럼 길고 지독했다. 부자 당에게 표를 몰아줘 공황이 일어나서야 “못살겠다, 갈아보자”며 진보당에 정권을 맡긴 뒤 다시 살만해지면 다시 보수당에 장기집권을 선사하는 미국 보통사람들의 선거 역사는 한 마디로 비극적이다. 한국의 개혁-진보는 성적표부터 만들어라 길리건 박사의 이런 분석을 보면서 가슴이 아픈 것은, 미국에는 길리건 박사가 밝혀낸 것처럼 “진보가 집권해야 서민이 산다”라는 분명한 데이터라도 있지, 한국에는 이런 데이터도 없다는 것이다. 이른바 ‘잃어버린 10년’이라는 개혁 세력의 집권 기간 중 이런 성적을 만들어내지 못했으니, 유권자들이 “이 놈이나 그 놈이나”라고 해도 할 말이 없다. 한국의 개혁-진보 세력은 지금이라도 정책 비전을 제시하고, 집권하면 반드시 실업-자살-살인-범죄율을 줄이는 성적을 보여줘야 한다. 그래야 설득력이 생긴다. 한국에서의 묻지마범죄 증가는 어느 당에 유리할까. “우리만이 해낼 수 있다”고 큰소리 칠 보수당에 유리할까, 아니면 이런 현실에 가슴을 치는 개혁-진보 정당에 유리할까. 오늘도 타야 하는 전철간이 무섭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