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91호 최영태⁄ 2012.09.10 16:44:18
묘한 시기에 묘한 영화가 개봉했다. 프랑스-영국 합작으로 만들어진 영화 ‘더 레이디(The Lady)’다.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미얀마의 아웅산 수치 여사를 그린 영화다. 이 영화 속 여주인공 수치(양자경)의 모습에는 묘하게 박근혜 새누리당 대통령 후보의 모습이 겹쳐진다. 미얀마(과거 버마)의 독립을 거의 이룰 듯 했던 아버지 아웅산 장군은 구데타 세력의 총에 난사당해 비명 속에 숨지고, 어머니는 병마 속에서 고통스럽게 죽어간다. 명문일족의 딸이지만, 영국인과 결혼해 미얀마를 떠났던 수치 여사는 그러나 군부독재에 신음하는 미얀마의 민주화를 위해 도와달라는 동포들의 요청을 거부할 수 없어, 군부독재의 총칼 앞에 자신의 가냘픈 몸을 아무 방어막 없이 내놓는다. 비명에 부모 잃은 ‘장군의 딸’의 고독한 고뇌 보여주는 영화 부모를 비명에 잃은 천애고아 딸이 불퇴전의 의지로, 남자들도 해낼 수 없는 일을 해낸다는 아웅산 수치의 스토리는 거의 비슷한 인생역로를 거친 박근혜 후보를 떠올리게 만든다. 이런 연상 작용은, 후보의 정책보다는 ‘이미지’를 주요 선택 포인트로 삼는 한국 유권자의 특성을 볼 때, 이 영화 관람자를 더욱 박 후보에 끌리게 만드는 효과를 발휘할 수 있을 것 같다. 영화를 보고 나오는 한 50대 여자는 “박근혜 도와주려고 수입한 영화야”라고 평했다. 그러나, 이 영화에서 또 하나 두드러지는 점이 있으니 그것은 군부독재의 극악무도함이다. 가녀린 여자의 인생을 산산조각 내는, 잔인무도한 군부독재자들의 면모는, 70-80년대 한국의 군부독재를 기억하는 사람에게는 등골 오싹한 경험이다. 영화 ‘더 레이디’의 대립구도가 대단한 장군의 딸 대 군부독재라면, 한국의 박근혜는 이 두 세력을 모두 한 몸에 구현하고 있는 듯한 상황이니, 기묘한 느낌을 주는 영화가 아닐 수 없다. 만약 박 후보가 전자(고난을 이겨낸 장군의 딸이라는 측면)을 더 부각시키면서 후자(군부독재의 후손 이미지)를 누를 수 있다면, 영화 ‘더 레이디’는 박 후보에 대한 심정적 공감도를 높여줄 수 있을 것 같다. 영화 속 적대세력을 한 몸에 체현한 듯한 박근혜 후보의 선택은? 반대로 박 후보가 현재처럼, 이미 역사적 평가가 완전히 끝난 유신체제에 대해 “아직도 역사적 판단이 남아 있다”는 식의 발언을 계속할 경우, 섬뜩한 군부독재의 이미지가 그녀를 더욱 감싸게 될 것 같다. 박 후보가 고 박정희 대통령을 “아버지”라고 그만 부르고, “박정희 전 대통령은…”이라고 객관적으로 호칭하기 시작하는 순간, 그를 둘러싼 군부독재의 음습한 이미지는 벗겨질 것이다. 그러나 박 후보가 계속 “제 아버지는…”이라고 부르면서 인혁당 사건 등에 대해 “역사적 평가가 엇갈린다”는 무서운 말을 한다면, 박 후보에 대한 견고한 반대층은 더욱 똘똘 뭉칠 것 같다. 작년 말 개봉된 영화 ‘더 레이디’에 대해, 군부독재의 추억이 아직도 생생한 아시아권에서는 대체적으로 호평이 나왔다. 반면 군부독재의 추억이 없는 미국과 유럽의 비평가 사이에서는 “아시아 경치와 바흐의 음악이 아주 좋은 영화”라는 기술적 평가들이 더 많이 나왔다. CGV 관객의 평점은 10점 만점에 무려 9.1점을 받았다. 한국 관객에게는 아주 인상적인 영화란 의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