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92호 최영태⁄ 2012.09.17 17:11:42
박근혜 새누리당 대선 후보의 인혁당 발언(9월 10일)에 이어 이한구 원내대표의 "다들 배가 부른가 보지?"(11일), 당 대변인들의 서로 엇갈리는 사과 발언들(12일), 김병호 당 대통령 후보 공보단장의 ‘사과 대상’ 발언(16일)까지 ‘인혁당사건 관련 박근혜 발언 시비'가 일주일을 넘기면서, 박 후보를 돌이킬 수 없는 궁지로 빠뜨리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나오고 있다. 이는 인혁당 사태 관련 발언의 여파가 앞으로 100일도 남지 않은 대선 날까지 유권자의 마음 속에 지워지지 않는 기억으로 남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한국인이 원하는 지도자는 ‘속으로는 착한’ 지도자인데… 한국인이 지도자의 품성 중에서 가장 눈여겨보는 한 가지가 있다고 문화평론가 문강형준은 자신의 책 ‘혁명은 TV에 나오지 않는다’에서 썼다. 그것은 바로 ‘착한 심성’이다. 한국인들이 얼마나 지배층의 착한 심성에 기대는지에 대해 문강형준은 한국 드라마를 예로 든다. 그는 “(한국 드라마에서) 언제나 착한 대중이 욕망하는 것은 바로 계급간 차이를 뛰어넘어 자신을 이해하고 위로하고 공감하고 도와주고 궁극적으로는 자신과 하나가 될 그런 착한 지배자다. 대중은 착한 지배자와 결합하는 것을 꿈꾼다. 지배자를 무너뜨리자고 말하는 사람을 과격하다고 여기며 쉽게 지지하지 않는 현상은 이런 이유 때문”이라고 썼다. 이런 심리는 드라마 초반에 아주 못된 것으로 나오는 재벌 회장, 회장 아들 등 지배층이 극의 중후반에 이르러서는 심리적으로 약한 면모(착한 바탕)를 드러내면서 피지배층과 화합하는 해피 엔딩을 맺는 데서 드러난다. 드라마를 보는 한국인이라면 인혁당사건의 스토리에 누구나 경악한다 처음부터 끝까지 나쁜 심성을 버리지 않는 지배층도 드라마에 나올 수 있지만, 그런 경우는 주연급이 될 수 없고, 결국 극 중에서 몰락하게 된다. 그런 ‘뼛속까지 나쁜’ 지도자를 한국인들은 용납할 수 없기 때문이다. 현재 대선 후보 3강을 형성하고 있는 박근혜, 문재인, 안철수 3명이 모두 '착한 지도자'로 이미지 구축이 돼 있다는 것도 마찬가지다. 심지어 박근혜, 안철수가 박다르크, 세인트찰스라는 별명을 얻은 것도 '착한 지도자'를 원하는 민중의 심성에 따른 현상으로 봐야 한다. 그런데, 인혁당 사건은 그 스토리가 아주 충격적이다. 정치나 시사 문제에 대해 무지한 사람이라도 “공안 사범들을 잡아 1년간 가족과 면회도 시키지 않은 채 사형 선고를 내리고, 선고 뒤 18시간도 안 돼 사형을 집행했으며, 대부분 시신을 가족들에게 넘겨주지 않았다”는 얘기를 들으면 공포정치에 대한 두려움으로 머리카락이 쭈뼛 선다. 그런데도 새누리당 관계자들은 벌써 일주일이 넘도록 인혁당사건 발언을 놓고 사과를 하는지 안 하는지 알 수 없는 태도를 취하고 있으며, 김병호 공보단장처럼 한 술 더 뜨는 발언까지 나오고 있는 것이다. 착한 지도자와의 심정적 일치를 원하는 한국인들에게, 이런 사태는 정말로 충격적일 수 있다. 박근혜 후보가 유신정권의 한 부분이었다고는 해도 근본적으로 고 박정희 대통령이 책임져야 하는 사건이었을 뿐, 박 후보 자신은 직접적으로 아무 관련도 없을 인혁당사건에 대해 새누리당이 이처럼 무기력하게 대처하고 있는 현상이 이해되지 않을 정도다. 지지율 견고하니 아무 문제 없다고? 인혁당사건은 ‘역사적 해석’의 문제이기 이전에 당장 ‘심정적 충격’이 더 큰 사건이다. 그만큼 유권자 깊숙이 파급력을 발휘할 수 있다. 사태를 이렇게 방치하는 박 후보 캠프의 속뜻이 무엇인지 알 수가 없다. 물론, 박 후보에게는 이른바 '콘크리트 지지율'이 있다. 그러나 박 후보가 승리하려면 이른바 '숙고하는 중도층'의 지지를 끌어와야 한다. 그런데 그 숙고하는 중도층에게 인혁당 사건만큼 뚜렷하게 뇌리에 남는 시비도 많지 않을 것 같다. 콘크리트 지지층만 믿었다가는 숙고하는 중도층은 완전히 박 후보를 떠날 수도 있다는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