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 영양은 산나물과 고추로 이름 높은 청정의 땅이지만, 문화와 전통의 향기 또한 그윽하다. 조지훈의 주실마을과 이문열의 두들마을은 멋들어진 한옥을 배경으로 영양의 문향을 한껏 자랑하고 있다. 또한 영양은 여중군자(女中君子)로 불리며 전인적 완덕(完德)을 보인 장계향(張桂香, 1598~1680)의 절실한 삶의 자취가 새겨진 고장이기도 하다. 모든 지고한 것은 사대부의 전유물이 되어 있던 조선 중기 당대에, 희유하고도 희유하게 여성으로서 군자로 불린 장계향을 우리는 오늘 다시 만나기 위해 길을 떠나고 싶다. 이름하여 ‘여중군자 장계향 순례길’인데, 그 첫 작업으로 스토리텔링 기법을 활용하여 이 길을 형상화해 보기로 하자. ‘순례길’이라 하는 것은 여중군자 장계향의 거룩한 삶과 사유에 대하여 존념(尊念)의 의미를 담는 측면이 크다. 마치 대전의 한 아파트촌을 선비마을이라 하였더니, 광복절에 한 집도 빠짐없이 국기를 단 것과 같이, 적어도 여중군자에게는 순례길이 어울리는 이름이 아니겠는가! 장계향이 몸을 나툰 곳으로부터 세상을 여읜 곳까지 그 모든 행로를 대상으로 순례하되, 크게 영양권과 안동권과 영덕권으로 나누어 할 수 있을 것이다. 안동에서 나서 성장하였고, 19세에 영덕으로 시집을 가서 살았으며, 43세에 영양으로 분가하여 삶을 엮어 나갔다. 75세에는 다시 안동으로, 79세에는 영덕으로, 80세에는 영양으로 이거하면서 생애를 마무리해 나갔다. 그러니까 안동권에는 장계향의 1~19세, 75~79세의 삶이, 영덕권에는 19~43세, 79~80세의 삶이 있으며, 영양권에는 43~75세, 80~83세의 삶이 있는 것이다. 이들 연속적 시간과 그 상관된 구체적 공간을 동시에 형상화하면서 여중군자를 시공을 초월하여 만나보도록 하자.
두들, 이 아름다운 마을! 두들마을은 현재 영양군 석보면 면소재지인데, 이 마을을 개척한 당사자는 다름아닌 여중군자와 그 부군인 석계 이시명이다. 이 부부는 오늘날의 영덕군 창수면에 있는 본가인 충효당(운악 이함의 집, 인량리 소재)에서 여중군자가 43세 되던 1640년에 분가하여 두들마을에 입향하였다. 이 마을을 재령 이씨 집성촌이라 하는 것은 입향조가 석계 이시명인 까닭에서이다. 사실 이시명은 장계향이 34세가 되던 1631년에 석보로 분가하였으나, 아버지 운악공이 다음해인 1632년에 별세하는 바람에 본가로 돌아가 3년상을 포함해서 9년을 더 지낸 후 다시 석보로 온 것이었다. ‘두들’은 언덕이란 뜻이니, 두들마을은 언덕 위의 마을이란 의미를 지니고 있다. 행정지명이 ‘원리리’인 것은 조선시대 광제원이 있었던 연유로 원이 있는 마을이라 하여 원리이고, 이것이 다시 원리리가 되었다. 이 땅에는 아름다운 마을이 하늘의 별처럼 많다.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경주 양동마을과 안동 하회마을은 물론이고, 풍수지리적 안목으로 볼 때 어쩌면 우리 강산의 모든 마을이 아름다운 마을이라 하여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런데 두들마을에 들어서면 이 아름다움은 실감으로 다가온다. 무언가 평온한 분위기가 온몸을 감싼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수직적 전망감이 아닌 수평적 조망감이 아련히 살아 있다. 석계 종손(이돈)이 전하는 바에 따르면, 이 나라 자연마을들을 두루 탐사한 일군의 일본 학자들이 수년 전 두들마을을 방문해 본 뒤 최고라는 상찬을 아끼지 않았다고 한다. 빈 말이 아니라 할 것이다. 이시명과 장계향이 안동과 영덕을 오가면서 그 중간 지점에 자리잡은 이 빼어난 햇살(英陽)의 언덕에 마을을 일구고 싶었을 것이란 공감이 일어나게 하는 곳이다.
정감적으로 아름다운 것만이 아니다. 두들마을의 자랑은 많은 인재를 배출해냈다는 점이다. 우리 시대의 대표적인 작가 중의 하나인 이문열을 배출한 마을로 잘 알려져 있지만, 그 이전에 항일시인인 이병각과 이병철도 이 마을 출신이다. 어디 문인뿐이겠는가! 의병장 이현규, 독립운동가 이돈호, 이명호, 이상호도 이 마을의 기운을 받은 의인들이다. 장계향의 일대기를 소설 ‘선택(1997)’으로 형상화한 이문열은 장계향의 넷째 아들인 항재 이숭일의 후손이다. 이숭일은 애민심이 커서 ‘이불자(李佛子)’로 불리웠는데, 장계향이 별세할 때 모신 아들이다. 두들마을 어귀에는 이숭일이 부모의 가르침을 받아 새긴 세심대(洗心臺)와 낙기대(樂饑臺)가 있는데, 세심은 치심수행(治心修行)을, 낙기는 안빈수도(安貧守道)를 사상적으로 나타낸다. 두들마을에 있는 장계향 관련 문화유적으로는 석천서당과 석계고택이 있다. 석천서당은 이시명과 이숭일이 강학하던 석계초당을 후손들이 순조대에 격을 높인 것이다. 석계고택은 여중군자 내외가 살던 옛집인데, 이숭일이 만년의 어머니를 모시고 임종한 현장이기도 하다. 장계향의 정신을 반영하듯 일자집 두 채로 이루어진 검박한 한옥이다. 이 외에도 두들마을에는 정부인 안동장씨 유적비, 정부인 안동장씨 예절관, 음식디미방 체험관, 주곡고택, 유우당, 전통한옥 체험관, 광산문학연구소, 북카페 두들책사랑 등이 있어 길손들을 반겨준다. 두들마을에서 음식디미방 체험을 하려면 반드시 사전예약을 하고 가야 한다. 눈썰미 있게 볼 것은 유적비 옆에 줄지어 서있는 3백 년 넘은 도토리나무들이다. 여중군자의 애민과 구휼의 정신을 잘 보여준다. 이 나무들에서 나온 도토리로 죽을 쑤어 전란과 흉년에 지친 민생들을 돌보신 분이 장계향이다. 두들마을에서 조금 떨어진 곳(주남리)에 남악정(남악초당)이 있는데, 여중군자의 셋째 아들로 영남사림을 대표하여 이조판서를 한 갈암 이현일이 학문하고 생활하던 공간이다. 갈암을 남악선생이라 한 것은 여기서 유래한다. 입구의 홍도문(弘道門) 글씨는 숙종의 친필이라 전해진다. 남악정이 의미깊은 것은 이현일이 이곳에서 불멸의 경세서인 ‘홍범연의(1686)’의 편찬을 마무리한 연유에서이다. 두들마을은 유교 문화권사업(국민의 정부 때)으로 한옥들이 잘 정비되었고, 3대 문화권사업(이명박 정부)으로 푸드 스쿨을 큰 규모로 짓기 시작했다. 마을이 번창하는 것은 건물에 있지 아니할 것이다. 전통과 문화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마을 구석구석을 정성스럽게 매만지는 손길에 있는지도 모른다.
이 땅의 수양산 수비(首比) 장계향이 56세 되던 1653년에 내외는 권속들과 함께 영양의 더 깊은 곳인 수비로 들어갔다. 두들마을에서 북쪽으로 50여 리 떨어진 곳이다. ‘수비’라는 이름은 수양산(首陽山)에 비견(比見)된다고 하여 이시명이 붙인 것이라 한다. 스스로 백이와 숙제를 지향한 삶의 자취라 할 것이다. 오랑캐로부터 당한 나라의 수모를 자신의 것으로 한 선비의 선택이었으며, 뜻을 펴지 못한 절의 높은 지사의 은둔이기도 했다. 현재 지명은 영양군 수비면인데, 지금은 수산유허비(신원리 소재)만 남아 있다. 이 비 옆에 아주 커다란 노거수 느티나무가 있다. 노거수와 벗하여 장계향의 삶의 터전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장계향 내외는 수비에서 20년을 살았다. 자녀들은 이곳에서 부모와 함께 개간하고 학문하는 충만의 시간을 보냈다. 이 시기에 쓴 이시명의 시 한 수가 내외의 심경을 말해준다. 73세(1662년) 생일을 맞은 이시명이 자녀들을 앞에 두고 노래한 것이다. 이 때 장계향은 65세였다. 아침 일찍 일어나 옷을 단정히 하여 집에 앉았노라니, 문득 마음이 온통 고요해짐을 깨닫노라. 양기(陽氣)가 동지 후 은밀히 자라니, 눈 덮인 산도 북풍이 불기 이전에 완연히 바뀌누나. 세상이 오랑캐를 받아들였단 말 들으니 근심되고, 사람들이 성현의 가르침을 소홀히 하니 걱정이구나. 아이에게 술 한 잔 따르게 하고, 시 읊어 금일이 태평하길 비누나. 더 순례할 유적 ·영산서원터: 영양에서 더 순례할 유적은 장계향과 관련해서는 영산서원터가 있다. 영양군청이 있는 영양읍내에서 가까운 현리에 있다. 지금은 터만 남았는데, 복원예산을 확보하여 곧 복원에 들어갈 것이라 한다. 1655년(효종 6년)에 지방 유림의 공의로 퇴계 이황의 학덕을 기리기 위하여 창건되어 퇴계의 위패를 모셨다. 1694년(숙종 20년)에 ‘영산(英山)’이라고 사액되었으며, 그 뒤 학봉 김성일을 추가배향하였다. 이로 보면 이시명의 스승인 경당 장흥효(장계향의 아버지), 경당의 스승인 학봉, 학봉의 스승인 퇴계로 연원되므로, 영양을 대표하는 선비 이시명의 훈향 속에 있음을 알 수 있다. ·남자현 생가: 영양에는 여성 독립운동가로 뚜렷한 자취를 남긴 남자현 생가와 유적비가 있다. 두들마을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자리잡고 있는데, 단지맹세(斷指盟誓)한 이 여장부를 영양에 가서 어찌 순례하지 않을 것인가! 영양에는 여중군자 장계향과 더불어 또 한 분의 훤칠한 여성리더가 있었음이니. - 박희택 경북여성정책개발원 객원연구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