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 모든 남녀 사이에 빠질 수 없는 것이 바로 연애다. 알콩달콩한 사랑은 핑크빛으로 피어나 마음을 들뜨게 하지만 잔인한 이별은 가슴을 시리게 만든다. 정진국(37) 연출은 이처럼 단순하지만 그렇기에 모든 사람이 공감하기 쉬운 연애를 달콤하고도 살벌(?)하게 무대 위에 올렸다. 정 연출이 연출한 창작극 ‘애정빙자 사기극’이 올해 초연에 이어 시즌 2번째를 맞이하며 대학로 상명 아트홀 2관에서 활발히 공연을 이어가고 있다. ‘애정빙자 사기극’은 제목에서 유추할 수 있듯 남녀 사이의 애정에 얽힌 이야기를 그린다. 하지만 달달한 이야기만은 아니다. 이별의 아픔으로 극단적인 생각을 하던 작가 지망생 여진은 어느 날 수면제를 먹고 잠을 청하다 사후 세계와 전생에서 본 남자 태양에게 무턱대고 찾아가서 “우리는 운명의 상대”라고 주장하기 시작한다. 태양은 처음엔 그런 여진을 정신 나간 사람으로 보지만 알 수 없는 그녀의 매력에 점점 호감이 싹튼다. 그런데 여기엔 여진의 무서운 계략(?)이 숨어 있다. 독특한 이야기를 어떻게 풀어낸 건지 궁금해 하니 정 연출은 웃으며 “경험담”이라고 털어놓는다. “이별할 때 서로 응원해주는 커플도 있지만 과연 그렇게 깔끔하게 끝나기만 할까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싸우고 욕하는 커플도 많잖아요? 저도 그런 경우가 많았어요. 좋아했던 여자가 저랑 헤어진 뒤 바로 다른 남자를 만나는데 순간 어린 마음에 복수하고 싶다는 마음이 들더라고요(웃음). 그래도 상상만 하지, 행동으로 옮기기는 힘든데 그런 일들이 무대 위에 표현됐어요. 제가 초고를 쓰고 나서 너무 남성의 시각으로만 본 것 아닌가 싶어서 따로 여성 작가에게 각색을 부탁했습니다.” 먼저 사랑하자고 꼬신 여자의 계획은? 자신을 배신한 남자에 대한 복수로 유명했던 드라마 ‘아내의 유혹’ 같은 테마가 ‘애정빙자 사기극’에도 흐른다며 정 연출은 웃었다. 혹자에게는 유치해보일지 모르지만 원래 사랑은 그런 것. 사람의 마음을 뒤흔들고 빠져들게 만드는 그런 매력이 ‘애정빙자 사기극’에 있다. 멀리 있는 사랑이 아니라 현실에서 그리 멀지 않은 이야기, 그래서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를 정 연출은 좋아한다. 그동안 선보였던 연극 ‘강풀의 순정만화’ ‘내 남자의 혈액형’ 등에도 이 같은 정서가 흐른다. 연극 연출에서 배우들의 연기를 가장 중요하게 본다는 그는 배우 출신 연출가다. 가을 엔터테인먼트 전속 배우 겸 연출이었던 시절, 연극 ‘커피프린스’ ‘경성에 딴스홀을 허하라’ ‘테너를 빌려줘’ ‘그 남자 그 여자’ ‘내 남자의 혈액형’ 등 다양한 작품에 출연했다. 지금도 배우의 끈을 놓지 않은 그는 자신의 경험을 살려 최대한 무대를 잘 꾸리려 노력하고 있다.
“연기에 대해 지시를 많이 내리는 편이에요. 배우들과 맥주 한 잔 마시면서 연기에 대해 이야기해요. 그래서 호흡이 잘 맞죠. 작가 출신 연출가들은 글로써 배우들에게 전달하는 바가 많고, 연출을 전공한 연출가들은 무대 장치나 음향 효과, 조명에 대해 디테일하게 접근하죠. 각자 장단점이 있는 것 같아요. ‘애정빙자 사기극’의 경우 배우들의 숨소리 하나까지 들리는 소극장에서 공연이 이뤄지기 때문에 연기를 중요하게 봅니다.” 이토록 무대 위에서 열정을 불태우는 그지만 원래 연출가가 될 생각은 전혀 없었다고 손을 내두른다. 오히려 배우로서 활발하게 활동했고, 쭉 그 길만 걸을 줄 알았다. 그런데 “연기를 잘 한다”는 말을 듣고 새로운 방향을 모색해봐야겠다는 생각을 했다고 한다. 도대체 왜? 이유인즉슨 잘 한다는 소리를 들으면 귀가 막히게 된다는 것. 정 연출은 “배우는 다른 사람들의 말을 귀담아 들을 줄 알아야 하는데 오만해지면 노력을 잘 안 하게 된다”며 “배우들이 쉽게 연기를 관두는 경우가 있는데 자신이 ‘잘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연기 잘 한다’는 말을 듣고 딜레마에 빠졌던 그에게 때마침 연출 제의가 들어왔고 그는 자신의 무대 경험을 살릴 수 있는 이 길에 들어섰다. 연출을 하다 보니 바쁘게 연기할 때는 잘 눈에 보이지 않던 대학로가 눈에 들어오게 됐다. 특히 정 연출은 공연계의 열악한 상황에 안타까움을 표시했다. 전국에 10여개 정도밖에 없었던 연기 관련 학과가 지금은 많아졌고, 경쟁률도 어마어마하지만 막상 공연계의 현실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매년 졸업하는 학생들은 많은데 흡수할 수 있는 공간은 없고, 영화나 TV 출연을 꿈꾸는 학생들이 급한 마음에 무대부터 올라보자는 식으로 찾아온다.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꼭 필요한 것이 나라의 관심과 지원이다. 배우가 단순히 일용직으로 고용되는 것이 아니라 최저임금제가 형성되고, 보험 혜택도 받을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 정 연출의 생각이다. 또한 ‘배우는 배고파야 한다’는 말도 없어져야 한다. 그런 이미지가 각인돼 공연계를 바라보는 시선이 삐뚤어지기 때문이다.
“5~6년 전만 해도 극단이 많았는데 대형 기획사 위주로 공연계가 돌아가면서 극단이 많이 줄어들었어요. 지원금도 많이 줄어서 젊은 사람들이 창작, 연기 활동을 하기가 힘들어요. 10년 전 함께 연기를 시작했던 선배와 동기가 거의 남아 있지 않아요. 작품이 바로바로 바뀌는 대학로는 정말 치열한 공간이죠. 그래서 후배 배우들이 무대에 오를 수 있는 공간을 열어주고 싶었어요. 뮤지컬 배우들은 팬클럽이 형성되는 등 좀 더 오래 활동할 수 있는 기회가 많은데 연극 배우들은 자리를 잡지 않으면 힘들거든요.” 그 신념을 지키지 우해 정 연출은 꾸준히 연극 작업을 이어가고 있다. 뮤지컬을 연출한 경험도, 출연한 경험도 있지만 자신이 있을 곳은 연극이라는 게 그의 생각이다. 관객들은 연극이 어렵다는 편견을 가지고 있는 경우가 있는데 그는 “어려운 극들은 필요하다고 생각하지만 그것이 연극의 전부는 아니다. 연극하면 ‘햄릿’ 등 고전 작품만 생각하는 경우가 많은데 로맨틱 코미디들도 많다”며 “한 번도 보지도 않고 고리타분하다고 보는 인식은 잘못된 것 같다”고 말했다. “‘햄릿’처럼 무거운 연극만 있는 것 아녜요” 그동안 달달한 작품을 많이 선보여 온 그는 앞으로 선보이고 싶은 작품들이 많다. 감명 깊게 봤던 영화 ‘파이란’을 무대에 올리고 싶고, 배우로서는 그동안 해보지 않았던 건달 역할도 열연해보고 싶다. 어려울 때도 있지만 그때마다 공연계에 발을 들인 순간을 기억한다. 학교 다닐 때 그 흔한 개근상도 못 받은 정 연출은 대학교 졸업 때 딱 1명에게 주는 최우수 연기상을 받고 눈물을 흘렸다. 당시 교수가 “10년 동안 연극만 해라. 10년을 버티면 어느 순간 배우가 돼 있을 것이다”고 말해줬고 그 말을 신념으로 지탱삼아 지금까지 왔다. “만약 제가 그 당시 연기에 집중하기보다 TV 한 번 나오려고 애썼으면 삶이 완전히 달라졌을 것 같아요. 연극은 이제 손에서 놓을 수 없는 직업이 돼버렸죠. 그런데 너무 행복해요. 남들은 돈에 대해 자꾸 물어보는데 뭐든지 잘하면 돈을 벌 수 있어요(웃음). 하지만 그런 돈보다 행복이 더 가치 있다고 생각해요. 또 모르죠? 제가 나중에 억대를 벌 수 있을지(웃음). 틀에 박히지 않고 자유롭게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제 직업이 자랑스러워요.” 정 연출은 내년 2월까지 서울을 비롯해 지방에서도 ‘애정빙자 사기극’을 선보이며 활발한 활동을 벌일 생각이다. “공연이 많이 자리를 잡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며 “더 많은 관객을 만나고 싶다”고 설렘을 표하던 그가 앞으로 얼마나 더 많은 관객들과 마주할지 기대된다. - 김금영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