팍팍한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도시의 인간들은 자신들이 가진 내면의 상처를 보듬기 위해 자의반 타의반 누군가에게 의지하려 한다. 비록 그 시간이 오래지 않고, 다시금 상처가 부풀어 오를 수 있을지라도 그 찰나의 순간을 찾기 위해 이리저리 떠돌아다닌다. 마치 황량한 들판에 피어 있는 꽃들이 스러져 가는 것을 안타깝게 여겨, 화분에 담아 햇빛이 잘 드는 아파트 베란다에 옮겨다 놓고 정성스럽게 바라보는 것 같다. 하지만 자연 속에서 겪은 상처를 인공적으로 치유하려 하면, 화분의 식물은 오래 가지 못하고 말라 죽거나 제 생명을 다하지 못하는 경우가 종종 발생한다. 이는 오늘을 살아가는 인간들조차도 예외는 아닐 것이다. 우리네 삶이란 불안정하고 때로는 위태로울 정도로 어느 한 순간 평안함을 영위할 수 없는 것이 현실이다. 이러한 현실적인 인간의 내면에 관심을 가지고 자신만의 관점으로 치유를 해보려는 화가 김유정(39)은 화려한 채색이 아닌 전통 벽화 그림의 한 방법인 프레스코 기법으로 화면에 화분의 식물들을 집어넣어 꾸준히 자신만의 이야기를 펼쳐낸다.
김 작가의 작품을 첫 대면하는 사람들로부터 "형체가 잘 안 보이네" "너무 어두운 것 아니냐"는 등의 이야기를 듣곤 한다. 하지만 조금 여유를 가지고 그림과 대화하듯이 바라보고 있노라면 회색빛 바탕에 그려진 생명체의 움직임마저 느껴질 정도로 깊은 울림을 가져다준다. "저는 생명을 키우는 소질이 별로 없는 것 같았어요, 화분을 가져다 놓으면 늘 시들어버리고 강아지를 키워도 아파버리니…. 그래서 제가 더욱 세상의 아픔에 대해 고민을 더하게 된 것 같습니다. 겉은 화려하게 보이려 하지만 내면에는 상처를 보듬고 있는 것이 보일 때가 많았습니다." 그래서인지 김 작가의 작품은 삶의 씁쓸함을 스크래치 기법을 이용해 긁어내고 난 후 색을 칠하는 방법으로 회색빛 이미지를 만들어낸다. 이 방법 또한 독특하다. 전통적인 기법인 프레스코 기법은 힘들고 어려워 최근에는 보통 섣불리 따라하려 들지 않는 그림의 완성 방법이다.
"제가 만들어가는 기법적인 은유도 내재되어 있어요. 전통적 방법은 회벽이 마르기 전 안료로 채색하여 고착하는 것이죠. 저는 이를 차용하여 현대적으로 확장한, 프레스코 기법의 '스크래치 표현'을 씁니다. 음각의 선들은 내면의 상처를 외부로 표출하기 위함이죠." 음각 자체가 폭력적 행위를 가하여 생긴 긁힘이고 그것은 바로 상처, 즉 외상이라고 설명할 수 있다. 즉 표면을 구성하는 입자들이 파이고, 스미고, 긁히는 일련의 과정을 통해 상처투성이의 피부로 둔갑하는 기법적 은유라고 할 수 있다. 온실 속 화분에 담긴 삶의 이중성. 보호받고 싶은 인간의 내면과 현실의 깊이를 벽화 기법으로 그려내 "저의 작품은 동시대를 살아가면서 느끼는 삶에 대한 진지한 기록하기와 감성적 사유를 통해 읽어내기 방식으로써 동시대에 대한 인간의 상념을 벽면에 은유적으로 각인하고 고착하는 것입니다."
그림을 천직으로 알고 살아가는 화가로서 김 작가는 모든 대상에 자신이 바라보는 관점이 들어 있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렇지 않으면 연기처럼 사라질 수 있는 것이 너무 많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심리적인 내면을 은유화하는 것은 상처를 직면하고, 새롭게 해석해, 극복하는 과정으로써 다의적 의미를 가진다. 결국 이러한 과정이 상처를 치료하는 '치유의 도구'로 순환되면서 관람자로 하여금 작가와의 소통 가능성을 열어두는 것이다. 흑백 영화 같은 작업을 진행하고 있는 김유정 작가는 나이가 들어도 꾸준하게 자신의 작품을 세상에 선보이는 활동을 지속하고 싶다고 말했다. 몇 년 안에 무엇을 이루려는 것보다는, 가장 좋은 작품은 바로 다음에 보여주는 것이라는 믿음을 갖고 있다. "현재의 미술시장이 작가로서의 삶에는 어려운 여건으로 다가오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지금이 기회가 아닐까 해요. 작업에 몰입하고 살아가면서 누군가에게 여운과 감동을 줄 수 있는 그런 작품을 지속적으로 선보이는 것이 앞으로의 작은 희망이자 목표입니다." 이 목표를 달성하려는 작가는 올 가을 여느 해보다도 작업실에서 밤을 하얗게 보내는 시간이 많아졌다고 한다. 11월 예술의전당에서 진행하는 서울컨템포러리 아트 스타 전과 OCI미술관 레지던스 입주 작가전, 화랑에서의 초대전 그리고 2013년 개인전에 선보일 작품을 만들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녀의 가장 좋은 작품인 ‘다음 작품’을 볼 수 있는 기회가 많아졌다는 의미다. - 왕진오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