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97호 최영태⁄ 2012.10.23 21:09:28
안철수 후보가 23일 인하대 강연에서 정치 개혁에 대한 구체적 요구사항을 내놨다. 그런데 그 내용이 극히 위험해 보인다. 국민들의 ‘정치 불신’에 영합하는 내용이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그는 3가지 개혁안을 내놓았다. △국회의원 숫자를 줄이고 비례대표를 늘리며(의회 개혁) △정당에 대한 국가보조금을 줄이며(정당 개혁) △중앙당을 없애고 국민완전경선제를 통해 공천권을 국민에게 돌려줘야 한다(선거제도 개혁)는 것이다. 국회가 관료-청와대에 밀리는 게 문제의 핵심인데… 우선 국회의원 숫자. 한국의 최대 문제가 국회의원 숫자가 많아서일까, 아니면 정부와 관료의 힘에 의회가 압도 당하는 것일까? 일부 국회의원들이 꼴사나운 짓들을 하고는 있지만, 한국의 가장 큰 문제는 의회의 힘이 관료의 힘(전문성)에 압도 당하고 있다는 것이다. 김대호 사회디자인연구소장은 OECD 회원국의 평균 의원 숫자를 기준으로 인구수에 비례한 국회 규모를 갖추려면 한국의 국회의원 정수가 현재의 300명에서 779명으로 대폭 늘어나야 한다고 주장했다. 미국의 경우 의원 개개인이 오랜 경력으로 전문성을 갖추고 있고, 풍부한 보좌진의 도움과 예산지원을 받아가면서 의회가 직접 예산안을 짜는 등 의회가 행정부를 주무르는 실력을 갖추고 있다. 의회는 선거를 통해 국민의 지배를 받는다. 그래서 의원이 못된 짓을 하면 국민이 혼을 내줄 수 있다. 반면 관료는 비선출직이라 국민의 직접 통제를 받지 않는다. 지금처럼 전관예우, 재벌과의 유착 등으로 관료들이 ‘숨어서’ 못된 짓을 해도 국민은 통제할 방법이 없다. 이런 관료들의 못된 짓을 통제할 수 있는 게 정치권이고, 전문성을 갖춘 의원들이다. 그런데도 문재인 후보에 이어 안철수 후보까지 국회의원 숫자를 줄이는 게 정치개혁이라니 답답할 정도다. 한국 현실에서는 국회의원에 대한 국고의 지원을 더욱 늘려 전문지식을 갖춘 보좌진 을 풍부히 공급함으로써 관료의 전문성을 국회가 실력으로 통제할 수 있도록 해야 비리가 줄어든다. 344억원 줄이자고 정당을 왜소하게 만들어서야 정당에 대한 국고보조금 문제도 그렇다. 안 후보는 “344억원에 달하는 정당 국고보조금을 스스로 줄이고 이를 시급한 민생에 쓰는 게 바람직하다”고 제안했다. 그러나 344억원을 줄이자고 정당에 대한 국고보조금을 줄이고, 당 운영은 진성당원이 내는 당비로 하자고 하는 것은 한국적 현실에서 불가능한 방법이다. 진성당원제가 정착되지 않은 상태에서 국고보조금을 줄인다는 것은 가뜩이나 부실한 정당을 더욱 비틀거리게 만들 것이기 때문이다. 정당에 대한 국고보조금에 대해 현 단계에 필요한 것은, 그 보조금이 제대로 쓰이는지를 감시하는 것이지, “344억원을 아끼기 위해 정당의 힘을 빼자”고 주장해서는 안 된다. 국민에 공천권 준 결과를 지난 총선의 민주당 공천에서 봤는데도… ‘중앙당을 없애고 국민완전경선제를 통해 공천권을 국민에게 돌려줘야 한다’는 주장도 대단히 위험하다. 완전국민경선제가 위험한 이유는, 지역 유권자들에게 풍부하게 ‘기름칠’을 할 수 있는 지역 유지-토호들이 완전국민경선을 통해 공천권을 받아쥘 가능성이 더 크다는 점이다. 공천권과 관련해서는 이런 예를 한번 들어보자. 고 김대중 대통령은 시시때때로 ‘젊은 피’를 대량으로 수혈하는 전략공천으로 독재정권에 대항하는 민주 세력의 혁신해왔다. 이른바 밀실공천-하향식공천의 결과다. ‘야권이 김대중 없이 처음 치른’ 지난 총선에서 민주당은 국민경선을 공천에 도입했다. 그 결과는 무엇인가? 지역에서 힘을 쓰는 기존 의원들, 널리 알려졌지만 낡은 얼굴들이 대거 공천권을 거머쥐었다. 그 결과를 벌써 잊었는가? 공천권을 무조건 당에서 빼앗는다고 개혁공천이 이뤄지는 게 아니다. 오히려 참신하지만 일반 국민에게는 잘 알려지지 않은 인물을 당 차원에서 잘 발굴해 전략공천하는 게 좋은 국회를 만드는 데는 더 유리할 수 있다. 비례의원을 늘리자는 주장에는 전적으로 찬성 비례대표를 늘려야 한다는 안 후보의 제안에 대해서는 전적으로 찬성이다. 비례대표 국회의원을 늘리면 소수당이 살아나고, 연합정치가 살아난다. 한국처럼 비례의원 비율이 적고, 각 선거구에서 최다득표자 1명만 뽑는 방식은 거대 정당에 절대적으로 유리하고, 소수당은 겨우 명맥만 유지할 수 있다. “독일의 경우 비례대표제를 통해 어느 한 정당이 국가를 경영할 수 없도록 했고, 의원의 절반이 비례대표제로 뽑힌다. 한 정당이 5% 이상의 지지만 얻어도 30~40석 얻게 되므로 단독 정당이 정권을 잡은 적이 없고 계속해서 연정을 구성해야 하므로 협상과 타협의 민주적 절차를 확립했다”고 김종인 새누리당 국민행복추진위원장은 소개한 바 있다. 안 후보의 정치개혁에 깔려 있는 생각은 ‘정치에 대한 불신-혐오’다. 이런 혐오감은 이해가 되지만, 그렇다고 언발에 오줌 누기 식으로 국회의원과 정당을 왜소화시키자는 제안에는 동의할 수 없다. 이명박 정권의 지난 5년을 돌아보자. 국회의원들이 개판을 쳐서 나라가 이 모양이 됐는가? 아니면 의회의 견제권이 청와대-관료에 턱없이 못 미쳐 이런 난국이 벌어졌는가. 감정 차원의 정치불신에 기댈 것이 아니라, 냉철한 원인분석으로 문제를 풀어나가야 한다. 그리고 그 길은 정치에 더 많은 돈과 인력을 투입하고, 국민과 언론이 현명하게 이를 감시해나가는 데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