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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거의 여왕’ 15년 만에 청와대 입성

녹록찮은 역경 딛고 헌정사상 첫 여성·부녀 대통령 등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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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nbnews 제306호 이완재⁄ 2012.12.24 15:51:58

새누리당 박근혜 대통령 후보가 대한민국 제18대 대통령에 당선됐다. 헌정사상 첫 여성 대통령인 그가 걸어온 길이 새삼 조명받고 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의 딸이자 22세에 퍼스트레이디, 부모를 흉탄에 잃은 비련의 삶 등 걸어온 역정은 녹록치 않았다. 정치 입문 이후 소신과 원칙의 큰 정치인으로 역량을 키워왔다. 18년간 은둔생활 끝에 어렵게 정치에 입문하고, 15년 만에 대통령 꿈을 이루기까지 드라마틱하게 지나온 길을 더듬어봤다. 서거한 박정희 대통령-육영수 여사 맏딸 박근혜 당선인은 1952년 2월 2일 대구 삼덕동에서 전시(戰時) 대구주재 육군본부 작전·교육국 작전차장 박정희 대령과 중등학교 교사 출신인 육영수의 딸로 태어났다. 군인인 아버지 임지를 따라 광주, 서울에 거주하며 유년기를 보냈다. 이후 아버지 박정희는 5ㆍ16 쿠데타로 정권을 장악하고 1963년 12월부터 1979년 10월 26일까지 대한민국의 제 5·6·7·8·9대 대통령을 역임했다. 독재자와 경제재건 선구자라는 평가를 동시에 받고 있다. 박 당선인은 박정희-육영수의 2녀 1남으로 태어나 장충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성심중학교에 입학한 1964년에 청와대로 들어간다. 이후 1970년에 서강대 전자공학과에 입학, 1974년 초 프랑스로 유학을 떠났다가 그해 8월 15일 어머니 육영수가 흉탄에 쓰러지자 급히 귀국한다. 당시 퍼스트레이디(영부인)였던 육영수 여사는 1974년 8월 15일 광복절 기념식장에서 문세광이 쏜 총탄에 맞아 숨졌다. 이후 박근혜는 어머니를 대신해 실질적인 퍼스트레이디 역할을 수행하며 사실상 정치인의 첫발을 내디뎠다.

1982년부터 육영재단, 1994년부터 정수장학회 등을 물려받아 운영하기도 했다. 1998년 대구광역시 달성군에서 제15대 국회의원 보궐선거에 출마해 당선됐다. 이후 16대, 17대, 18대 국회를 거쳐, 2012년 새누리당 비례대표로 제19대 국회의원에 당선됐다. 2007년 한나라당 대통령 후보 경선에서 석패한 후 이명박 정권과 보이지 않는 갈등을 겪었다. 18대 대선에서 민주통합당 문재인 후보를 누르고 대통령에 화려하게 등극했다. 18년 은둔 접고 IMF 환란기에 정치 입문 부친 박정희 전 대통령 서거 이후, 추모사업 등 한직에 머물러 있던 박근혜가 공식적으로 정치에 뜻을 품기 시작한 계기가 된 것이 1997년 IMF 때였다. 그때까지 정치입문 제안을 종종 받았음에도 단호히 거절해왔다. 자서전에서 IMT 당시를 회상하며 “어떻게 세운 나라인데 이처럼 어이없이 무너지나 하는 절박한 마음이 들었다”며 “나라가 이렇게 흔들리는데, 혼자 편하게 살면 훗날 스스로에게 당당할 수 있을까”라고 회고했다. 이 결심을 통해 그는 ‘정치인 박근혜’의 길을 걷게 된다. 1997년 12월 10일, 대선을 8일 앞두고 이회창 당시 한나라당 대통령 후보지지 선언을 통해 본격적인 정치인생이 시작했다. 15대 대선에서는 김대중 전 대통령이 당선되면서 한나라당은 흔들렸다. 마침내 1998년 4월 2일 국회의원 재보궐선거에서 한나라당 전통적지지 기반인 대구 달성에 출마해 국회의원에 당선된다. 그는 당선소감으로 “나라가 어려운 때 정치에 입문하게 돼 더욱 어깨가 무겁다”며 “깨끗하고 바른 정치, 국민과 아픔을 함께하는 정치가 구현되도록 최선을 다할 것”이라며 특유의 원칙과 소신 있는 모습으로 정치인생을 걸어왔다.

그에게도 시련은 있었다. 특히 2002년 2월 27일 확정된 대선후보 경선방식 및 당 지도체제 변경 관련 ‘당헌개정안’에서 총재직 폐지와 대선후보와 총재 분리 등이 제외되자 탈당이라는 강수를 두기도 했다. 또 2004년 4.15 총선을 앞두고는 한나라당 지지도의 인기는 급격히 추락했고 노무현 전 대통령 탄핵 역풍과 부패한 이미지라는 온상으로 지목받기도 했다. 그러나 어려운 상황에서도 그는 2004년 3월 23일, 당대표를 뽑는 전당대회에서 나서 당당히 당선의 기쁨을 누리기도 했다. 당시 전당대회 연설에서 “신에게는 아직도 열두 척의 배가 남아 있다고 한 충무공의 비장한 각오로 이 자리에 섰다. 당을 위해 제 모든 것을 바치겠다”는 유명한 연설을 남기기도 했다. 영국 엘리자베스 1세 여왕과 대처 수상 존경 그는 당대표가 되고 여의도 당사를 버리고 여의도 공터에 천막당사를 여는 당시로서는 새로운 시도로 국민에게 참신함으로 어필하기도 했다. 그 결과 한나라당은 4.15총선에서 예상을 뒤엎고 121석 확보라는 선전을 하게 된다. 이후 2007년 대선에 나서 당내 경선에서 이명박 대통령에게 석패하며 5년간 대선의 꿈을 키워야했다. 이명박 정부 내내 40% 안팎의 높은 지지율로 이른바 ‘대세론’을 견지해왔고, 18대 대선에서 상대후보인 문재인 후보를 무찌르고 대선을 거머쥐었다. 박근혜 당선인은 영국의 엘리자베스 1세 여왕과 마거릿 전 대처 수상을 존경하는 정치인으로 꼽는다. 정치에 입문하고부터는 줄곧 치르는 선거마다 확률 높은 승리를 따내며 ‘선거의 여왕’이라는 닉네임이 따라붙기도 했다. 또 어렸을 적 감동 있게 읽은 책으로 중국의 대역사서 삼국지를 들어 그의 스케일을 가늠케 해준다. 박 당선인의 좌우명은 “바르고 현명하게 살자”이고 스트레스는 주로 단전호흡과 산책으로 해소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애창곡은 그룹 솔리드의 ‘천생연분’, 거북이의 ‘빙고’등이다. 박 당선인의 자택은 서울 삼성동 자택(20억원)에 소재해 있고, 재산은 예금 7800만원 등 총21억8104만원을 이번 대통령 선거기간에 신고했다. - 이완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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