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11호 박현준⁄ 2013.01.28 13:48:38
요즈음 산길을 걷는 이들의 대세는 종주산행을 즐기는 것이다. 과거 등산이라는 개념이 명산(名山)의 최고봉을 오르는 것으로 여기던 관행에서 이제는 산길을 걷는 트래킹 개념이나 주능선(마루금)을 이어 길게 걷는 종주산행으로 바뀌어 가고 있다. 이번 답사길은 용인·수원의 광교산·백운산 구간으로 잡는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이 산 품에 자리 잡고 있는 세 개의 절이 소개되어 있다. 서봉사(峯寺), 성불사(成佛寺), 창성사(彰聖寺)가 그것이다. 이 책에는 광교산(光敎山)을 수원도호부에서는 북으로 30리, 용인현에서는 서쪽으로 20리(在縣西二十里)에 있다고 기록돼 있다. 그러면서 서봉사와 성불사는 용인현 조(條)에서, 창성사는 수원도호부 조(條)에서 소개하고 있다. 서봉사와 성불사는 광교산 동쪽에, 창성사는 서쪽에 위치했던 절인 것이다. 분당 미금역 7번 출구에서 16번 마을버스에 오른다. 버스는 용인시 수지구(水枝區) 아파트 지역을 돌아 성복동(成福洞) 종점에 도착한다. 옛 산골마을은 자취를 감추고 신흥 전원주택이 자리 잡고 있다. 버스에서 내려 좌측 능선길로 오른다. 5분이 안되어 아파트단지에서 올라 형제봉으로 향하는 능선길과 만난다. 능선길에는 눈이 많이 쌓여 있는데 많은 사람들이 밟고 지나가 눈길은 편안하다. 미처 10여 분이 못되어 능선을 가로 지르는 고갯길을 만난다. 길 안내판이 서 있다. 앞길은 형제봉, 왼쪽은 천년약수, 오른쪽은 서봉사지(瑞峯寺祉)이다. 잠시 왼쪽 길 천년약수 방향으로 길을 잡는다. 300~400m 거리에 고려 때 절 성불사터(成佛寺)가 있다. 절은 흔적도 없고 무너진 석축이 영화롭던 그 날을 증언하고 있다. 지금은 비닐하우스로 산신각과 법당을 대신하고 있다. 눈 쌓인 절터는 곳곳을 밭으로 일구었는데 흩어진 기와편이 흰눈 사이로 삐죽 고개를 내민다. 내게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것일까?
무너져 내린 축대 아래에는 용인시에서 세운 성복동사지(成福洞寺祉)라는 문화재 안내판이 서 있다. 조만간 이 절터에 불사(佛事)가 있을 텐데 욕심내지 말고 옛 자취를 더듬어 오랜 세월 조금씩 옛모습을 찾아 갔으면 좋겠다. 어느 날 다시 왔을 때 마치 촬영세트 같은 졸속함으로 다시는 찾기 싫은 그런 곳이 되지 않기를 간절히 소원해 본다. 이곳에서 잠시 능선 하나 에워싸고 내려가면 천년약수터가 있다. 물맛 좋고 쉬어 가기 편해서 한남정맥(漢南正脈)길 걷는 사람들이 물마시고 물병도 채워가는 고마운 약수터이다. 오늘은 갈 길이 멀어 들리지 않고 왔던 길로 회귀한다. 떠나갔던 능선길에서 고개를 내려간다. 길은 이내 좌로 산허리를 끼고 돈다. 마을에서 머지않은 길이지만 산은 깊고 고요하다. 용인시에서는 이 길을 ‘산너울 1길’로 연결해 시민들이 걷기에 아름다운 숲길로 조성해 놓았다. 새로 길을 만든 것은 아니고 있는 길을 역사와 자연이 있는 테마로 엮은 것이다. 서봉사지로 향하는 숲길은 가깝지 않다. 적어도 1.5km는 넘는 길이다. 가는 길 곳곳에 고라니 발자국이 눈 위에 찍혀 있다. 생태계가 잘 유지되고 있는 것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기록된 광교산·백운산 절 얼마 후 작은 골짜기를 만나는데 이 겨울에도 얼음 아래로 풍부한 물이 흐른다. 앞 쪽 둔덕에는 옛석축 위에 평탄지가 조성되어 있다. 암자(庵子)터이리라. 다시 5분여 나아가면 좌측 둔덕 위로 석축과 평탄지가 또 펼쳐진다. 이곳도 규모 있는 암자가 자리 잡고 있었을 것이다.
계곡 개울을 건너면 농로(農路)로 보이는 길과 만난다. 왼쪽으로 서봉사지 안내판이 서 있다. 이곳에서 300m 위에 서봉사지가 있다. 동국여지승람 용인현 불우조(佛宇條)에 서봉사는 ‘在光敎山 寺有高麗 李知命 撰 玄悟國師碑: 광교산에 있는데 절에는 고려 이지명이 지은 현오국사비가 있다’라고 소개했다. 고즈넉한 절터를 오른다. 아래 축대 위에는 요즈음에 세운 비각 안에 현오국사비가 풍설(風雪)에 마모된 것 말고는 온전한 모습으로 서 있다. 보물 제9호로 지정된 용인의 보물이다. 비문은 마모되어 잘 보이지 않는데 비석 머릿부분의 전자(篆字)는 뚜렷하다. ‘贈諡玄悟國師碑銘(증시현오국사비명)’. 국사의 속명(俗名)은 왕중지(王重之)로 승명은 종린(宗璘)이었는데 1179년 53세로 열반에 들자 현오국사라는 시호를 내리고 1185년(고려 명종 15년) 이 비를 세웠다는 것이다. 서봉사의 기록은 조선왕조실록에도 보인다. 태종 7년(1407년)에 각 고을에서 지정한 기도하는 절(資福寺)을 그 고을의 명찰(名刹)로 바꾸게 됐는데 이때 천태종 소속 서봉사는 용구(龍駒) 지방의 명찰로 지정되어 이 지방의 자복사 역할을 맡게 됐다. 용구(龍駒)라는 지명은 지금의 수지(水枝) 일대를 지칭하는 지명으로 고구려 때에는 구성(駒城)이었다. 태종 13년(1413년) 용구(龍駒)와 처인(處仁: 현재 용인시 처인구)이 합쳐 용인(龍仁)이 됐다.
서봉사가 사라진 시기는 불분명하다. 1799년 발행된 범우고(梵宇攷)에도 서봉사는 소개되어 있으니 그 때까지는 법등(法燈)을 밝힌 절인데 1900년대에 발행된 사탑고적고(寺塔古蹟攷)에는 폐사된 절로 기록돼 있다 한다. 그런데 궁금한 것이 있다. 이 책에 기록된 14척 정도의 무너진 석탑과 응당 있어야 할 현오국사승탑(浮屠)는 어디로 간 것일까? 병자호란 전쟁터, 청나라 3명 대장 제압한 근위병 겨울 눈밭 속에 서봉사터를 두고 올랐던 길을 300m 쯤 되돌아온다. 처음 만났던 서봉사지 안내판 앞쪽으로 사유지임을 알리는 플래카드가 붙어 있다. 앞 쪽에는 무덤 두어 기가 있는데 이 무덤 옆길로 산을 오른다. 길은 골짜기와 능선을 30여 분 오르면 드디어 평탄지에 닿는다. 양지재정상이다. 토끼재 1.1.km, 시루봉 2.1km를 가리키는 안내목이 서 있다. 이곳에는 나주 丁씨묘를 비롯하여 7~8기의 민묘가 있고, 마지막 언덕받이와 양지재길 옆으로는 ‘趙山界’라 쓴 경계석을 세워 놓았다. ‘趙山界’? 글자대로 읽으면 ,趙씨 산의 경계,란 뜻인데 왜 이런 것이 여기에 서 있는 것일까? 확인한 바는 없는데 짚이는 곳이 있다. 용인의 세거(世居) 성씨 중 하나에 한양조씨(漢陽 趙氏)가 있다. 조선 개국 공신 조온(趙溫) 선생의 아드님(趙育)이 용인의 사족(士族) 용인 이씨와 혼인하여 기흥구 상현동에 입향(入鄕)했다. 이 분의 후손 중 한 분이 정암 조광조(靜庵 趙光祖) 선생이시다. 이 한양 조씨와 용인 이씨의 세장지(世葬地, 선영)가 광교산 남쪽 줄기 상현동에 있으며 정암 선생을 모신 사액서원인 심곡서원(深谷書院)도 800m 거리 지척에 있다. 아마도 이 문중과 관련이 있을 것 같다. 이제 광교산 방향으로 북진한다. 평탄한 길도 잠시, 가파른 계단길이 나타난다. 연전(年前)까지만 하여도 가파른 산길을 치올라야 했었다. 계단길이 끝나는 지점에 문화재 안내판이 서 있다. 70m 좌측 안으로 김준용 장군의 전승지 및 비가 있음을 알리는 안내판이다. 잠시 들리기로 한다. 바위 암벽 중앙에 음각(陰刻)으로 ‘忠襄公 金俊龍 戰勝地(충양공 김준용 장군 전승지)’라 썼고, 좌우로는 ‘丙子淸亂公提湖南兵 勤王至此殺淸三大將,(병자년 청나라가 일으킨 난에 공(김준용 장군)이 호남군대를 일으켜 근왕병(나라와 임금에 충성하는 군대)으로 이곳에 이르러서 청의 세 대장을 죽였다)’라고 기록했다.
때는 병자호란 시점이었다. 임금이 남한산성에 포위되자 8도에서 근왕병이 밀어 닥쳤다. 전라근왕병은 감사 이시방, 병사 김준용이 이끄는 6000명과 승통 각성이 이끄는 2000명이었다. 전라병사 김준용 장군은 병사 2000을 이끌고 광교산에 진을 쳤는데 누루하치의 사위 양고리(楊古利) 등 3명의 적장을 전사시켰다. 이 때 일은 1637년 1월 5일자 실록에도 그 기록이 있다.(全羅兵使金俊龍, 領兵入援軍光敎山, 馳啓戰勝前進之狀 ) 그 후 잊혀졌던 김준용 장군의 승전보는 150년이 지나 수원화성의 건설책임을 맡은 번암 채제공(蔡濟恭) 선생에게 알려져 이 바위에 새겨지게 됐다. 이제 바로 앞 종루봉(종대봉, 비로봉, 토끼봉)에 오른다. 신라 말 고운 최치원 선생이 종을 매달아 놓았던 곳이라 종루봉이 되었다는 전설이 있어 종루봉이란다. 정상에는 6각정이 있어 잠시 쉬어가기에 좋다. 정자에는 누군가의 전각(篆刻)이 걸려 있다.‘山中好友林間鳥 世外淸音石上泉’ (산속 좋은 친구는 숲 사이 새요, 세상 밖 맑은 소리는 돌 위 샘이구나). 이곳에서 200m 광교산 방향으로 북진하면 토끼재에 닿는다. 좌측 하산로 1.6km 아래에는 상광교동 버스 종점이다. (수원 13번) 하산로 중간 지점에는 또 하나 광교산에 있던 고려시대 고찰 창성사(彰聖寺)터가 자리잡고 있다. 절터에는 초석, 장대석, 샘터가 남아 있다. 봄날 꽃필 때 이곳에 가면 따뜻한 햇볕 아래 한잠 자고 싶을 정도로 포근하다. 고려 희종4년(1208년) 원각국사에 의해 창건되었는데 조선시대에 와서 봉덕사(奉德寺), 봉녕사(奉寧寺)로 이름을 바꾸었다 한다. 이 절에서 주석한 고려말 고승 천희(千熙)스님이 입적하자 우왕은 진각국사(眞覺國師)란 시호를 내렸다. 조선초에도 자은종(慈恩宗) 명찰(名刹)로 나라에서 자복사(資福寺)로 정했음이 태종실록 7년(1407년)조에 기록되어 있다. 광교산 동쪽은 서봉사, 서쪽은 창성사로 대표되었던 것이다. 여기에서 입적한 진각국사도 비(碑)를 남겼는데 불행히도 제 자리에 있지 못하고 화성 안 방화수류정(訪花隨柳亭) 옆에 비각을 짓고 그곳으로 옮겼다. 보물 14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전자(篆字)는 ‘贈諡眞覺國師碑銘’로 비의 성격을 알리고 있다.
다시 토끼재로 돌아 온다. 광교산 정상 시루봉까지는 약 1km의 흙길이다. 10여 분 뒤 드디어 시루봉(광교산 정상) 갈림길에 닿는다. 시루봉은 약간 용인쪽으로 치우쳐 있다. 광교산은 수원의 진산으로 본래 광악산(光嶽山)이었는데 고려 태조 왕건 때 광교산(光敎山)이 되었다고 관련자료마다 기록하고 있다. 일명 서봉산이다. 582m의 고도로 높지는 않더라도 한남정맥(漢南正脈)의 최고봉으로 우뚝한 산이다. 한남정맥 명당, 무너진 석축에 간직된 천년 절터 백운산을 향해 출발이다. 약 2km 남짓 되는 길이다. 잠시 후 노송 속에 자리잡은 노루목 대피소를 지난다. 여기에서 내려가도 창성사터를 경유할 수 있다. 우측은 수지의 고기리 방향이다. 계속 전진하면 송신탑을 지나 평탄한 안부(鞍部) 억새밭에 닿는다. 이 곳에서도 창성사터를 거쳐 수원으로 내려 갈 수 있는 길이다. 계속 능선길로 나아간다. 10분여 뒤, 통신대 펜스 앞 갈림길이다. 오른쪽 길로 돌아 300m 앞이 백운산(白雲山:564m) 정상이다. 정상 옆으로는 6각 정자 쉼터를 만들어 놓았다.
여기에서 길은 세 갈래로 나누어지는데 왼쪽으로 내려가면 백운사가 있고 내려가는 중간 평탄지에는 자그마한 옛절터가 있다. 백운사 옛터라고도 하고 이름은 잊혀진 절터라고도 한다. 직진하면 의왕 모락산으로 이어지는 한남정맥길이다. 오늘의 답사길은 이제까지 함께 한 한남정맥길과 헤어져 우향우, 고분재 바라산으로 향하는 길이다. 길은 고분재 1560m를 향해 급하게 떨어진다. 의왕시에서 만들어 놓은 길안내판과 지도에는 이 길을 의왕대간(大幹)이라 명명해 놓았다. 대간? 일찍이 ‘대간’이란 단어가 보이는 것은 이중환(李衆煥) 선생의 택리지(擇里志)이다. 복거총론(卜居總論) 산수조(山水條)에 보면 自白頭至咸興 山脈中行 東枝行於頭滿之南 西枝行於鴨綠之南 自咸興 山脊偏薄東海 西枝長亘七百里 東枝未滿百里 大幹則不斷峽 橫亘南下數千里 至慶尙太白山... (백두산에서 함흥까지는 산맥이 가운데로 뻗어간다. 이 곳에서 동쪽 줄기는 두만강 남쪽으로 뻗고 남쪽 가지는 압록강 남으로 뻗는다. 함흥에서부터는 산의 척추가 동해쪽으로 치우친다. 서쪽 줄기는 700리를 길게 뻗고 동쪽 줄기는 100리가 되지 못한다. 큰 줄기(大幹)는 곧 산협으로 잘리지 않고 횡으로 뻗어 수천리를 남하하여 경상도 태백산에 이른다...) 여기에서는 분명 대간(大幹)이란 단어가 일반 명사로 쓰이고 있다. 그런데 여암 신경준(申景濬) 선생의 산경표(山經表)에 오면 대간(大幹)이란 단어는 더 이상 일반명사가 아니다. 택리지에서 말하던 백두산에서 수천리를 남하하는 산줄기를 백두대간(白頭大幹)이라 했고. 함흥에서 동쪽으로 뻗는 줄기를 장백정간(長白正幹)이라 했으며 백두대간에서 분기하여 바다로 달리는 13개의 산줄기를 정맥(正脈)이라 했다. 그러니 대간, 정간, 정맥이라는 단어는 일반명사로 쓰기에는 맞지 않는다.
정상에서 20여 분 내려 오니 고갯길 고분재이다. 눈 위에 어느 짐승 발자국이 곱게 찍혀 있다. 고기리를 향해 내려간다. 고갯길에 서낭당이 자리하고 있다. 당목(堂木) 돌무더기가 정겹고 울긋붉긋 매어놓은 색색의 천(布)도 옛정취를 지니고 있다. 예전 나라와 지방 관아에는 어디나 성황신(城隍神)을 모시고 제사를 지냈다. 이는 아무리 보아도 산길에서 만나는 서낭당의 서낭신과는 통하지 않는다. 따라서 어떤 연구자의 의견은 우리 민간의 서낭당은 성황신이 아니라 산왕신(山王神)이 변한 것이라는 주장을 내놓았다. 산왕님-->서낭님이 됐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민초들이 산길에서 만나는 서당당과 잘 일치한다. 나도 오늘 무사히 답사를 끝내게 해주신 서낭님(산왕님)께 감사드린다. 이순신 장군 조카 이완 장군의 활약상 마을입구에 닿으면 관음사라는 절을 만난다. 그 앞 구릉지 끝이 가마터라 한다. 예부터 고기리에는 장석(長石)이 많아 사기를 굽기에 좋았다 하는데 이제는 흔적도 없다. 마을버스 종점에서 한 정거장 걸어내려 간다. 비스듬한 x자형 마을길을 만나는데 우측 이종무로 165번길 안쪽 400m 지점에 이종무(李從武) 장군묘소가 있다. 500여년 동안 잊혀졌다가 1972년 ‘장자승평이 세웠다(長子昇平立)’ 묘표의 글자가 판독되어 다시 찾은 묘이다. 묘로 오르는 길에 누군가 다녀간 흔적이 눈 위에 고스란히 남아 있다. 이런 겨울날 외진 이 곳을 찾는 이가 있다는 사실이 가슴을 훈훈하게 한다. 장군은 우리 역사에 위대한 업적을 남긴 분이다. 고려 고종 이후 수백 회에 걸쳐 약탈을 일삼던 왜구(倭寇)의 본거지를 정벌한 것이다. 왕조실록 세종1년(1469년) 6월 기록을 보면 선박 227척, 군사 1만7285인, 식량65일치를 가지고 대마도를 점령한다. 이후 9월 20일 드디어 왜구는 항복문서를 보내온다.( 通書于禮曹判書乞降, ) 이후에 이런 순간이 우리 역사에 또 있었던가?
이제 고기리에 잠들어 계시는 또 한 분 장군의 묘소를 찾아간다. 버스를 타고 내려와 고기교에서 내린다. 산기슭 400m 안쪽에 이완(李莞) 장군이 잠들어 계신다. 그분은 누구인가? 조선시대에는 두 분의 이완장군이 있다. 한 분은 이완(李莞), 또 한 분은 이완(李浣)이다. 후자 이완(李浣) 장군은 병자호란 후 효종과 파트너십을 갖고 불벌을 추진했던 훈련대장 이완 장군이요, 오늘 묘소를 찾은 이완(李莞) 장군은 이순신 장군의 조카다. 선조 31년(1598년)11월 1일자 실록기사를 보자. “순신이 말하기를 ‘싸움이 지금 한창 급하니 조심하여 내가 죽었다는 말을 하지 말라.’ 하고, 말을 마치자 절명했다. 순신 형의 아들인 이완(李莞)이 그의 죽음을 숨기고 순신의 명령으로 더욱 급하게 싸움을 독려하니, 군중에서는 알지 못했다. 진인이 탄 배가 적에게 포위되자 완은 그의 군사를 지휘해 구원하니, 적이 흩어져 갔다.” (舜臣曰: “戰方急, 愼勿言我. 言訖而絶. 舜臣兄子莞秘其死, 以舜臣令, 督戰益急, 軍中不知也 陳璘所乘舡爲賊所圍, 莞揮其兵救之, 賊散去”) 임진왜란 마지막 해전인 노량해전에서의 일이다. 이후 이완장군은 명장이 되어 활약하다가 정묘호란 때 의주에서 분사했다. 오늘은 세 개의 절터, 세 분 장군의 자취를 밟은 날이다. 14번/ 14-1번 버스가 미금역과 죽전역으로 간다. -이한성 동국대 교수
교통편 미금역 7번 출구 16번 버스 ~ 성복동 종점 하차 죽전역 82번/ 15-1번 버스 ~ 성복동 종점 하차 걷기 코스 성복동 종점~ 좌측 능선길 ~ 성불사지 ~ 서봉사지 ~ 양지재 ~ 김준용 장군 전승각자 ~ 비로봉 ~ 토끼재 ~ 창성사지 ~ 광교산 ~ 백운산 ~ 고분재 ~ 이종무 장군묘 ~ 이완 장군묘. ※‘이야기가 있는 길’ 답사에 독자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매월 마지막 토요일에 함께 모여 서울 근교의 옛절터 탐방을 합니다. 3, 4시간 정도 등산과 걷기를 하며 선인들의 숨겨진 발자취와 미의식을 찾아가니, 참가할 분은 comtou@hanmail.net(조운조 총무)로 메일 보내 주시면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