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도록 미워하는 사람이 있는가. 용서를 하고 싶은 사람이 있는가. 화해를 하고 싶은가. 그렇다면 발길을 공민왕 신당에서 멈추자. 조선왕실 사당인 종묘에 고려의 임금인 공민왕이 모셔져 있다. 고려 왕씨와 조선 이씨는 피의 관계다. 조선 전기 문신인 남효은은 추강냉화에서 '조선 조정은 왕씨들을 강화도와 거제도에서 서인으로 살게 해주겠다고 속여서 배에 태워 바다에 수장시켰다'고 적었다. 신생국 조선에게 고려 왕실은 눈엣가시였다. 언제 왕국을 되돌려달라고 할지 모르기 때문이다. 왕씨에 대해 강온책을 병행하던 조선은 나라가 안정된 문종 때에 포용정책으로 전환했다. 숭의전을 지어 고려의 왕들에게 제사를 모시게 했다. 세조는 숭의전부사인 왕순례를 전왕조의 손님으로 예우했다. 세조 12년(1466년) 1월 3일 세자의 생일 잔치에 효령대군 임영대군 밀성군 등 종친과 만조백관을 초청했다. 이 자리에서 세조는 왕순례에게 어탁(御卓)을 내려 주면서 말했다. "내가 사사로이 네게 은혜를 베푸는 것이 아니다. 네가 선대(先代)의 후손이라 하여 세종(世宗)께서 왕씨(王氏)의 뒤를 세우고자 하였으나 이루지 못했다. 문종(文宗)께서 비로소 숭의전(崇義殿) 을 세워 그 제사를 잇게 했으니, 지금 내가 선왕(先王)의 뜻을 이어받든 것이다."신들의 정원인 종묘의 정전 19실(室)에는 19위의 왕과 30위의 왕비, 영녕전에는 15위의 왕과 17위의 왕비 및 의민황태자 신주가 모셔져 있다. 모두 조선의 임금과 왕비 황태자다. 그런데 뜻밖에도 망묘루와 향대청 사이에 고려 임금인 공민왕 신당이 있다. 정식 이름은 '고려 공민왕 영정 봉안지당(高麗 恭愍王 影幀 奉安之堂)'이다. 신당 안의 중앙 벽에는 공민왕과 노국대장공주를 함께 그린 영정(影幀)이, 옆면의 벽에는 공민왕이 그렸다고 전하는 준마도(駿馬圖)가 봉안됐다.
고려 유민 달래는 태조의 정치력 이곳은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다가 광해군 때 다른 전각들과 함께 재건됐다. 영정은 감실 내에 있는데 공민왕은 복두를 쓰고 홍포단령에 규를 들었다. 마주 보고 있는 왕비는 화관을 썼다. 준마도는 3폭인데 영정이 있는 곳으로부터 첫 번째에는 구름 속에 마구를 갖춘 준마 옆에 홍·청색 옷을 입은 두 사람이 말의 고삐를 바짝 잡고 북쪽을 향하고 있다. 다음 그림은 마구를 갖춘 준마가 구름 속을 달리는 것이고, 마지막 그림은 첫 그림과 비슷하다. 다만 청색 옷을 입은 사람이 준마와 함께 남향을 한 게 특징이다. 종묘지의 필사본에는 '종묘를 지을 때 북쪽에서 갑자기 회오리바람이 불어와 공민왕의 영정이 묘정에 떨어졌다. 조정에선 의논 끝에 그 영정이 떨어진 곳에 사당을 건립하였다'고 전하고 있다. 그러나 속내는 조선의 역사적 정통성을 세우고, 고려 유민을 달래기 위한 태조의 정치적 의도로 보인다. 실제로 태조는 고려의 계승을 말했고, 공민왕의 후비인 정비 안씨의 교지를 받들어 보위에 올랐다. 태조가 1392년 발표한 즉위교서에서도 정권승계를 주장했다. '왕씨(王氏)는 공민왕이 후사(後嗣)가 없이 세상을 떠난 뒤 종사를 보전할 수 없게 됐다. 그래서 혼란을 수습코자 백성의 지지를 얻어 하늘의 뜻을 받든다. 나라 이름은 그대로 고려(高麗)라 하고, 의장(儀章)과 법제(法制)는 한결 같이 고려의 고사(故事)에 의거한다'는 내용이다. 역성혁명이 아니라 공민왕을 계승함을 강조하고 있다. 이와 함께 고려 왕족 달래기도 언급되어 있다. ‘왕씨(王氏)의 후손인 왕우에게 경기도의 마전군을 주고 귀의군으로 봉하여 왕씨의 제사를 받들게 하라’는 구절이다.조선 건국의 정당성과 고려 왕족의 포섭, 백성의 민심을 얻기 위한 정치적 제스처가 공민왕 신당으로 볼 수 있다. 그런데 영정이 떨어진 곳에 공민왕 사당을 지었다는 이야기는 종묘 외에 다른 곳에도 있다. 단, 신당의 건물은 연대미상이다. 영정도 조선 초기로 추정될 뿐 작가와 연대를 알 수 없다. 언제 어느 때 고려왕을 모신 사당을 건립한 것인지에 대한 기록이 없다. 종묘의궤속록, 춘관통고, 종묘의궤, 국조오례의서례 등의 문헌에 전혀 나타나지 않는다. 종묘의 미스터리인 공민왕 신당!종묘 인근 주민들은 1960년대부터 공민왕 신당에 제사를 지냈다. 지금은 전주 이씨 대동종약원과 왕씨 종중이 협의하여 제사를 지내고 있다. 1963년 한 신문에 그 모습이 그려져 있다. 공민왕 그림에 얽힌 미스터리 종묘 사무소장의 말에 의하면 언제 어느 때부터 이 그림이 하필이면 종묘로 흘러들어왔는지 잘 모른다고 한다. 사무실 옆에 있는 도깨비가 나올 듯한 어둠침침한 사당 속에 공민왕의 그림이 안치되어 있다. 그림이 종묘에 들어오게 된 경위보다는 그 그림에 여러 가지 불길한 이야기들이 꼬리를 물고 일어나고 있다는 것이다. 원래 공민왕의 그림이 귀중한 탓으로 일제 때 어느 일본 사람이 그림을 자기 나라로 가져갔다가 어떤 영문인지 일가가 모조리 참사를 당했다. 그래서 귀신 들린 그림이라고 다시 돌려보내온 것으로 알려졌다. 그 뒤로는 누구나가 욕심은 나지만 이 그림을 가지려 하지 않았기 때문에 종묘 한구석의 조그마한 사당 속에다 사장시키다시피 버려둔 것이다. 어느 사이에 이를 알고 종묘 주변의 토박이들이 이 사당에 와 액운을 떼고자 고사를 지내게끔 됐다는 것이다. (1963년 10월 4일 자 조선일보)주변 사람들은 집안에 우환이 있을 때 이 사당에 와서 빌었다. 또 취직이나 입시 등 소원을 빌 때도 공민왕에게 고사를 지냈다. 옛 임금의 원통함을 위로하는 한편 옛 임금으로부터 복을 받으려는 민간신앙 형태의 모습이 나타난 것이다.
종묘에 공민왕 신당을 세운 태조의 속내는 무엇일까. 지금에 와서 구체적으로 알 수는 없다. 그러나 조선 왕실의 신전인 종묘는 600년 동안 고려의 임금을 모시고 있다. 이는 조선의 입장에서는 화합이고, 고려의 시각에서는 용서라고 할 수 있다. 미스터리인 공민왕 신당에서 용서와 이해와 배려를 읽을 수 있다. 부모와 자식의 인연은 두 가지라고 한다. 하나는 부모에게 은혜를 갚기 위해 인연을 맺은 자식이다. 또 하나는 부모에게 빚진 것을 받기 위해 인연을 맺은 자식이다. 어떤 의미로 만났든 부모 자식은 뗄 수 없는 하늘의 인연이다. 전 왕조인 고려, 후 왕조인 조선은 역사에서 분리할 수 없는 하나의 몸이다. 용서하고 이해하고 공감하면서 발전해야 하는 관계다. 누구를 미워하는가. 용서하고 화합해야 하는가. 그렇다면 종묘에서 공민왕 신당을 보자. 용서는 상대를 위한 것이지만 더 근본적인 것은 자신을 위함이다. 미움이 있으면 스트레스가 쌓여 몸과 마음이 멍든다. 아마 공민왕이 조선을 받아들였다면, 그것은 자신과 고려를 위해서일 수도 있다. 용서와 이해와 사랑과 화합을 꿈꾼다면 공민왕 신당 앞에서 좀 더 머무르자. - 글쓴이 이상주 조선왕실(전주이씨 대동종약원) 전례위원으로 종묘대제, 사직대제, 왕릉제향 전승자다. 세종대왕밀성군종회 학술이사, 이상주글쓰기연구소(http://www.이상주글쓰기연구소.kr) 대표다. 지은 책으로는 ‘왕의 영혼, 조선의 비밀을 말하다’, ‘조선 명문가 독서교육법’, ‘공부열광’ 등이 있다. - 이상주 역사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