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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한성의 옛절터 가는 길 -30] 강화 마니산길 (문산리~참성단~정수사)

천하명당 생기처(生氣處), 천제(天祭)올려 국태민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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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nbnews 제325호 박현준⁄ 2013.05.06 11:18:53

생강나무 노란 꽃망울 터뜨리던 날 배낭을 메고 강화 마니산으로 향했다. 강화 마니산에는 그 흔적을 찾을 수 있는 몇 개의 절터가 있다. 대부분이 고려 절터인데 남록(南麓) 흥왕리에 흥왕사(興旺寺)터, 왕륜사(王輪寺)터, 초피산 아래 묘지사(妙智寺)터, 북쪽 상방리에 묘통사(妙通寺)터, 문산리에 천제암궁지(天祭庵宮址), 그리고 동국여지승람에 함께 ‘마니산에 있다(俱在摩尼山)’고 한 선수암(善首庵)과 정수사(淨水寺) 중, 절터는 물론 이름도 잊혀진 선수암 등이다. 오늘은 천제암궁지 길로 들어서서 참성단(塹星壇)과 마니산(摩尼山) 지나 정수사(淨水寺)로 가는 길을 잡는다. 요즈음에는 마니산이 국민관광지가 되면서 화도면사무소 옆 상방리 매표소를 기점으로 참성단에 오른 후 원점 회귀하는 산행을 하거나, 길게 능선 길을 가려는 이는 마니산을 넘어 함허동천으로 내려오는 것이 일반적인 마니산 산행길이다. 그런데 마니산에 감추어져 있는 옛사람의 흔적을 더듬으려면 조금은 다른 길을 택해야 한다. 문산리에서 출발하는 산행길이다. 서울 방향에서 초지대교를 건너면 길상면이 되는데 문산리는 여기에서 서쪽 방향으로 직진해 화도면 버스터미널에 도착하기 전 마을이다. 서울에서는 좌석버스 3100번, 일반 버스 60-2번이 이 길로 운행한다. 3100번은 신촌, 홍대, 합정을 지나 공항로를 통과해 이곳으로 오고, 60-2번은 5호선 송정역에서 이곳으로 운행한다. 운행시간에 간격이 길어 때로는 참을성을 요한다. 매사 튼튼히 하려면 전화로 확인하는 게 좋다. 3100번(032-933-2533), 60-2번(032-934-9105~6).

마니산 옛사람 흔적 찾으려 문산리서 산행 시작 오늘은 3100번을 타고 와서 문산리에서 내린다. 버스정류장 안내판에는 강화시내버스 41번, 42번, 60번도 이곳을 운행한다는 안내가 있다. 길 건너편으로 나무 빛 신축 조립식 가옥이 보인다. 길을 건너 이 집 앞을 통과하면 이내 산골 계곡물을 만난다. 다니는 이가 없어 두고 온 그 옛날 고향 길 같다. 밭 갈던 늙은 농부가 나를 보고 환한 미소를 보내온다. 이 길로 오르는 산객(山客)이 없다 보니 반가우신가 보다. 100여년 전에 불음면 두두미마을에 사시던 화남(華南) 고재형(高在亨) 선생은 강화 구석구석을 유람하고 여행기를 시(詩)로 묶어 심도기행(沈都紀行)을 남기셨는데 그 때 이곳 문산동을 지나며 이렇게 읊었다. 摩尼東北是文山(마니동북시문산) 마니산 동북 이곳은 문산리 某某家門在此間(모모가문재차간) 모모 가문들이 이곳에 살고 있지. 士者先知農業重(사자선지농업중) 선비는 농사의 중함을 먼저 알아, 時從野外勸耕還(시종야외권경환) 때맞춰 들에 나가 밭갈이 권하고 돌아오네. 이 시 끝에 선생은 친절하게도 ‘이곳 문산리에는 파평윤씨(坡平尹氏), 의령남씨(宜寧南氏), 청주한씨(淸州韓氏), 안정나씨(安定羅氏) 가문이 거주하고 있다’고 주(註)를 남기셨다.

지금도 이 후손들이 살고 계시는지 궁금하구나. 이 계곡은 문산리 주민들의 식수원(食水源)이다. 이 물을 오염시키는 이가 있는지 무시무시한 경고판도 세워 놨다. 경고판이 아니더라도 이 길로 가려는 이는 절대로 손 한 번이라 담그지 말도록 부탁드린다. 누군가 손 씻은 물을 마실 다른 이를 생각하면 그럴 수는 없다. 계곡을 따라 10여 분 오르면 오른 쪽 언덕에 ‘禁標(금표)’라고 새긴 큰 바위를 만난다. 근래에 세워 놓은 안내판이 있다. 내용을 보니, ‘이곳이 신성한 지역임을 알리고 마니산에서 벌채를 금하고 관청에서 양목(養木)하는 일을 주관한다는 표시’라고 써 놨다. 그랬을 것이다. 참성단이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신성한 곳이다 보니 금표가 필요했을 것이다. 실제로 강도지(江都誌:1694년 조선 숙종 때 학자 이형상 선생이 저술한 강화도 읍지)에는 이런 사정들이 구체적으로 기록돼 있다. ‘마니산에 벌채를 금하고 나무를 기른다(摩尼山禁伐養木), 각 면에서 특별히 금송(禁松:소나무 벌목 금지)감독관과 산지기를 두었다(各面别定禁松監官 山直), 나무하기를 금지하여 나무가 뿌리 내리고 벼가 자리잡게 했다(使禁撨牧 而木根禾本)’. 이런 나라의 금령(禁令)들은 민초들에게 크나큰 고통이었을 것이다. 거슬러 올라가 그 시절을 비추어 보면 마니산 주변마을 민초들은 무슨 연료로 밥을 지어 먹을 수 있었겠는가? 땔감은 없고 나무하다 걸리면 곤장을 면치 못했을 그 날의 민초들을 생각하면 지금 아름다운 산길도 어느 땐가는 아픔의 산길이었던 것이다. 언덕에 금표(禁標) 표기된 큰 바위, 신성한 곳 암시 얼마 전 갑곶돈대(甲串墩臺)에 들렸더니 강화 각처에서 60여 개의 비석을 모아다 세워 놓은 것이 눈에 띄었다. 게 중에는 금표도 하나 있었는데 내용은 이러했다. ‘가축을 풀어 먹이는 자는 곤장 100대, 재를 버리는 자는 곤장 80대(放生畜者杖一百, 棄灰者杖八十)’. 거름이 귀한 시대였으니 가축 똥이나 재가 귀한 비료였을 것이다. 그렇다고 백성을 이렇게 두들겼으니.. 요즘 세상에 태어난 우리는 땡잡은 것이다. 금표에서 다시 계곡을 끼고 오른다. 10여분 지났을까 너른 평탄지에 군데군데 벌목된 나무들이 보이고 길은 두 갈래로 갈라진다. 본 길은 계곡을 따라 이어가고 우측으로 갈라진 길이 산등성이로 비스듬히 오르고 있다.

우측 산등성이길로 방향을 잡으면 곧바로 넓은 평탄지가 나타나면서 천제암궁지(天祭庵宮址)를 만난다. 좌측은 천재궁이 있던 3단 축대와 4개의 돌기둥이 있고 우측은 넓은 절터와 샘이 있다. 안내판이 서 있는데 지방기념물 24호라고 한다. 안내판 내용은, ‘이곳은 마니산 참성단에서 하늘에 제사를 지낼 때 쓰던 제기와 제물을 준비하던 천제암이라는 재궁터(齋弓址)이다. 고려 때 목은 이색의 시판(詩板)이 있었고 조선 태종이 왕위에 오르기 전 머물면서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이 내용이 강도지에 간략히 기록되어 있다. ‘천재궁(조선시대에는 齋로 썼는데 현재는 祭로 바뀌었다)은 하도면 마니산에 있다. 제관이 재를 지내기 위해 머무는 곳이다. 우리 태종대왕이 고려 말에 대언벼슬을 하고 계실 때 이곳에서 재를 지내기 위해 머무셨다(天齋宫在摩尼山 屬下道面 祭官齋宿之所 我太宗大王 麗末以代言 齋宿于此)’. 이곳에 걸렸다는 목은 이색(李穡)의 시도 동국여지승람을 비롯한 여러 자료에 실려 전해진다. 다만 천재궁이 아니라 참성단에서 소개되고 있는 점이 다를 뿐이다. 그 시는 아래와 같다. (국역본 심도기행에서) “분향하고 앉았는데 곁에서 시를 읊네 (樊香淸坐側吟頭) 텅 빈 실내는 배(舟)처럼 작구나! (一望虛明小似舟) 기분 좋은 가을 햇빛 문을 열면 들어오고 (最愛秋光開戶入) 산 그림자는 뜰에 가득 머무누나. (更邀山影滿庭留) 몸에는 먼지 없으니 봉황(鳳)을 탄 느낌이고 (身輕無垢思騎鳳) 세상 일 잊은 마음 갈매기(鷗)와 친하려네. (心靜忘機欲近鷗) 연단(煉丹)을 먹지 않아도 신선이 되는 길은 (不用煉丹永羽花) 육정(六情)을 청소하면 저절로 자연의 도를 깨치네(掃除六鑿更天遊)” 목은 이색은 다분히 도가(道家)의 깨침 같은 시(詩)를 읊고 있다. 내용으로 볼 때 이 시(詩)는 아마도 참성단에 걸려 있었을 것이다. 천재궁은 처음에는 봉천(奉天)을 준비하던 곳이었는데 속수증보강도지를 보면 중간에 제천당(祭天堂)과 천재암(天齋庵)으로 갈려 재직(齋直)과 승려가 각각 관리(1639년 인조 17년)하다가, 1883년 (고종 계미년)에 폐기되었고 천재암에 있던 작은 금동불상들은 전등사로 이관 된 듯하다.

고종 때 천재암 작은 금동불상들 전등사로 이관 이제 천재궁을 떠나 산길로 향한다. 천재궁터 샘물 옆으로는 우뚝 선 바위들이 병풍처럼 드리웠는데 희미한 각자(刻字)가 보인다. 탁본(拓本)해야 글자를 판독할 수 있을 것 같다. 호젓한 산길은 정상을 향해 이어진다. 이윽고 화도면 상방리 매표소에서 오르는 계단 길과 만난다. 119 소화기가 서 있는데 마니-8 구분 번호가 붙어 있다. 길은 돌계단으로 이어진다. 기(氣) 받는 160계단이라는 표지도 보이고 전국 제일의 생기처(生氣處)라는 설명판도 보인다. ‘기(氣)는 만물을 움직이는 그 어떤 근본적인 힘’이라고 설명하면서 참성단이 전국 최고의 생기처라고 한다. 상방리 매표소 쪽 안내판에는 기(氣) 측정 결과를 비교표로 작성해 놓기도 했다. 미국 새도나(Sedona)도 기(氣)의 도시라 하니 모르긴 해도 기(氣)가 무언가 있기는 있는가 보다. 그러기에 옛 분들도 ‘기죽는다, 기산다’고 하신 것 아니겠는가? 이렇게 기를 생각하면서 30 여 분 치고 오르니 어느덧 참성단(塹星壇)이다. 塹과 星의 글자 조합이 아무래도 불편하다. 옛분들은 塹城壇 또는 參星壇이라 표기해 조화를 맞추었다. 심도지(沁都誌) 사단(祠壇)조에 참성단이 소개되어 있다.

‘참성단은 마니산 정상에 있는데 세상에 전해지기를 단군의 제천터라 한다. 우리 조선이 고려를 이어서 여기에서 별에 제(醮星)를 지냈다 (塹城壇 在摩尼山上頂 世傳檀君祭天䖏 我朝仍髙麗之舊 醮星于此). 또 세상에 전해지기를 단군께서 삼자(三子)에게 쌓도록 했다(世傳檀君 使三子築之) ’는 것이다 게다가 이곳에서 제를 지낼 때에는 조정에서 축문(祝文)이 내려 왔다. 국조 단군이 쌓으시고 태종이 재숙(齋宿)하던 곳이었으니 당연히 중시했을 것이다. 이제는 사적 136호로 지정됐고 150년 된 소사나무는 천연기념물 502호로 지정되어 보호돼 있다. 참성단에서는 사방 시야가 탁 트여 있다. 100 여년 전 화남 선생도 이곳에 올라 온 주위 섬들을 바라보았다. 신도(信島), 시도(矢島), 모도(茅島), 매음도(媒音島), 사도(蛇島),석모도(席毛島), 미법도(彌法島), 서검도(西黔島), 동검도(東黔島), 말도(唜島), 볼음도(乶音島 ; 혹은 望島) 등을 바라보면서 망도서(望島嶼)라는 시(詩)를 남기기도 했다. 주변을 내려다보면 마니산이 불쑥 솟은 화도면(華道面) 주위로 간척을 한 흔적이 완연히 남아 있다. 본래 이곳 마니산은 강화 본섬과 떨어진 별도의 작은 섬이었다. 1706년 숙종 때 강화유수 민진원이 간척해 지금처럼 하나의 섬으로 연결한 것이다. 그러기에 이곳 화도면(華道面)은 1937년까지 아래 섬이라는 이미지가 남아 하도면(下道面)이었다.

참성단을 내려오니 거리표지판이 붙어 있다. 정수사 2.8km, 함허동천 2.65km. 앞쪽 헬기장이 있는 봉우리로 오른다. 산불감시초소가 있고 472.1m 고도가 표시된 마니산 정상목이 서 있다. 그러나 불행히도 이곳 봉우리 높이는 455m로 정상이 아니라고 한다. 모든 사람들을 혼동에 빠뜨리는 표지목이다. 정상은 동남쪽 전방 1km 쯤에 우뚝 선 봉우리가 469m 정상이라 한다. 아마도 이곳으로 가는 길이 암릉길로 위험하니 이렇게 배려한 것인 듯하다. 정수사 가는 길로 내려선다. 방향은 동남쪽 암릉길이다. 국조 단군왕검 영험이 깃든 전국 제일 생기처 바위에 지방문화재 13호인 참성단중수비(塹星壇 重修碑)가 새겨져 있다. 글자는 마멸되어 읽을 수가 없는데 다행히도 원문과 번역문을 안내판에 기록해 세워 놓았다. 감사하구나. 중수 기록의 내용은, 참성단이 오래 되어 무너진 곳이 많으므로 숙종 43년(1717년) 강화유수 최석항(崔錫恒)이 별장 김덕하, 전등사 총섭 신묵(愼黙)에게 중수토록 하여 열흘이 못되어 중수했다는 것이다. 이 내용을 신묵이 바위에 기록해 놓은 것이다. 길은 암릉길로 이어진다. 다행히 예전과는 달리 안전 로프로 길을 잇고 계단을 설치해 쉽게 암릉을 지날 수 있게 해 놓았다. 심하게 꺼진 부분은 나무로 다리를 놓았는데 칠선녀다리이다. 정상을 지나고 소나무 보호수를 지나 114계단에서 고도를 떨구면 정수사 갈림길이 나온다. 좌로 초피산(椒皮山)이 보이고 함허동천 1.8km, 정수사 0.7km를 알리는 표지판을 만난다. 우측 정수사길로 방향을 잡는다. 길은 암릉길인데 위험보다는 스릴을 느낄 수 있다. 암릉이 끝나는 지점 다소간의 너덜길을 지나면 고즈넉한 정수사가 나타난다. 정수사(淨水寺). 강화에서 비교적 숨겨져 있는 고찰이다. 신라 선덕여왕 시절 회정대사가 창건했다는 설화가 내려오고 있으나 기록은 1426년(조선 세종8년) 함허선사가 중창했다 한다. 이 때 법당 왼편에서 맑은 물이 흘러나오기에 절 이름을 '精修'에서 '淨水'로 고쳤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물에 조예가 깊어 그런지 함허득통(涵虛得通)대사의 茶를 주제로 한 선시(禪詩)들은 격조가 깊다. 一椀茶出一片心(일완다출일편심) 한 잔의 차에 한 조각 마음나네, 一片心在一椀茶(일편심재일완다) 한 조각 마음 차 한 잔에 담겼네. 當用一椀茶一嘗(당용일완다일상) 마땅히 이 차 한잔 마셔보시게, 一嘗應生無量樂(일상응생무량낙) 한 모금에 한량없는 즐거움 생긴다네

정수사는 초파일 준비에 한창 바쁘다. 대웅보전 앞마당에 연등이 가득 달렸다. 이 대웅보전은 보물 161호로 보호되고 있다. 세종5년(1423년) 중창되고 숙종 15년(1689년) 수리한 기록이 있다 한다. 3간의 작은 건물인데 절 대웅전답지 않게 툇마루가 있으며 가운데 간(間) 문을 장식한 만병(滿甁)에 가득한 꽃이 경이롭다. 올려다보면 마주치는 천정의 여러 목조 장식들도 비전문가에게조차 흥미를 끌게 한다. 이제 절 동쪽 언덕에 자리잡은 향토유적 19호 함허대사의 부도(浮屠)를 만나러 간다. 소나무 아래 정좌한 모습이 아름답다. 이곳에서는 바다도 시원하게 보인다. 설명안내판이 서 있는데 함허대사가 이곳에서 입적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는 틀린 말이다. 대사는 무학대사에게 공부하고 여러 절에서 수행 및 제자를 길렀는데 문경 봉암사에서 입적했다. 이에 그 사리를 5군데로 나누어 봉안하였으니 문경 봉암사, 가평 현등사, 강화 정수사, 황해 연봉사, 인봉사라 한다. 숨겨진 고찰 정수사 인근엔 함허대사의 부도(浮屠) 대사의 부도가 있는 곳에서 동쪽 능선으로 50여m 나아가면 능선 아래로 또 하나의 잘 다듬어진 절터가 있다. 뒤로는 바위가 병풍처럼 둘렀고 초석 및 장대석들이 어지럽게 뒹굴고 있다. 바위에 불상을 그린 선묘(線描)화가 희미하게 남아 있다. 내력을 알 수 없어 궁금함을 품고 정수사로 돌아온다. 강도지(1694년)에는 예전 안평대군이 사경한 묘법연화경 5권이 정수사에 있었는데 지금 단지 3권이 남았다는 글이 보인다 (舊有安平大君所寫妙法蓮花經五卷 金字輝碧 精妙可珎 二卷見失 只有三卷云). 지금까지 남았더라면 아마도 국보가 됐을 것이다. 이제 정수사를 뒤로 하고 내려간다. 500여m 내려가면 해병상륙공작대 기념비가 있다. 이 기념비 앞쪽으로 함허동천 넘어가는 숲길이 있다. 기왕 온 길 함허동천을 들려 근처에 있는 한말(韓末) 대학자 이건창 선생 생가를 찾는다. 집 앞 사기리에 400년된 탱자나무가 길손을 맞는다. - 이한성 동국대 교수 교통편 3100버스(신촌, 합정, 공항로 탑승) ~ 문산리 하차 / 60-2 버스( 송정, 김포 가두 탑승)~ 문산리 하차 걷기 코스 문산리 ~ 금표바위 ~ 천제궁암지 ~ 참성단길 합류 ~ 참성단 ~ 참성단 중수비 ~ 암릉길 ~ 정수사 ~ 함허대사 부도 ~ 절터 ~ 정수사 ( ~ 함허동천 ~ 이건창 생가) ※‘이야기가 있는 길’ 답사에 독자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매월 마지막 토요일에 함께 모여 서울 근교의 옛절터 탐방을 합니다. 3, 4시간 정도 등산과 걷기를 하며 선인들의 숨겨진 발자취와 미의식을 찾아가니, 참가할 분은 comtou@hanmail.net(조운조 총무)로 메일 보내 주시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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