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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주 종묘스토리 ⑩]‘신들의 정원’에 여성 초헌관 등장

종묘 618년 만에 변영섭 문화재청장이 숭례문 고유제서 헌관 맡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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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nbnews 제326호 박현준⁄ 2013.05.13 15:06:16

종묘는 1395년에 건립됐다. 600년 넘는 긴 세월동안 제관은 오로지 남자였다. 특히 신이 된 왕과 왕비에게 첫 잔을 올리는 초헌관은 임금이나 정승이 맡았다. 임금이 직접 초헌관을 맡는 게 친향례이고, 정승을 보내 대신 모시는 게 섭향례다. 그런데 ‘신들의 정원’으로 금기의 성역인 종묘에 618년 만에 변화가 일었다. 여성이 사상 처음으로 헌관, 그것도 초헌관을 한 것이다. 변영섭 문화재청장은 지난 5월 1일 종묘에서 열린 숭례문 고유제에서 헌관을 맡았다. 고유제는 중대한 일을 마친 뒤 나라는 종묘에서, 집안은 가묘에서 사유를 고하는 제사다. 변영섭 청장은 불에 탄 숭례문이 5년 3개월 만에 우리 곁으로 다시 돌아온 과정을 조선 왕조 역대 임금들에게 아뢰었다. 종묘가 세워진지 618년 만에 처음으로 금녀의 벽을 깬 것이다. 여성 헌관에 대해 조선왕실의 후견인격인 전주이씨대동종약원(이하 종약원)은 처음에는 반대 입장이었다. 전통을 이어가는 게 더 의미가 있다는 시각이었다. 종약원 집행부에게는 여성이 헌관을 한 선례가 없는 것도 부담이었다. 그러나 종약원은 계속 반대를 할 수 있는 처지는 아니었다.

종묘의 소유자가 아닌 탓이다. 대한제국황실의 재산이었던 종묘는 일제에게 빼앗긴 뒤 해방 이후 정부 재산이 됐다. 지금의 소유자는 문화재청이다. 그래서 대한제국황실의 후손도 종묘에 들어가려면 입장권을 사야 한다. 다만 조선왕실 전례를 간직한 종약원은 종묘대제, 왕릉제향 등을 주관하고 있다. 물론 주최는 문화재청이다. 주관하는 종약원은 행사 예산을 문화재청에서 받아야 한다. 그것도 문화재보호재단이라는 한 단계를 더 거쳐야 한다. 둘 사이의 관계는 문화재청이 갑이고, 종약원은 을이라고 할 수 있다. 반대할 현실적 명분도 약했다. 반대하면 남녀 평등시대에 여성차별이라는 화살을 맞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종약원은 몇 차례 회의 끝에 사상 초유의 여성 헌관을 받아들였다. 명분은 정기 종묘대제가 아닌 일회성의 고유제와 종약원 주관 행사가 아닌 문화재청 행사라는 점에서 찾았다. 또 남녀평등의 시대적 요청도 고려됐다. 문화재청도 변영섭 청장을 여성이나 남성이 아닌 헌관으로만 볼 것을 요청했다.

그 결과 종묘 건립 이후 최초로 여성 헌관이 고유를 하게 됐다. 그러나 조선 임금들의 신위를 모신 종묘 고유제의 상징성은 여전히 대한제국 황사손에게 있다. 고유제 축문의 앞부분에 나타나 있다. ‘효현손 황사손 원 근견 문화재청장 변영섭 감소고우(孝玄孫 皇嗣孫 源 謹遣 文化財廳長 변영섭 敢昭告于)’이다. ‘대한제국 황사손 원은 문화재청장 변영섭을 보내 삼가 아뢰옵니다’라는 뜻이다. 이원 대한제국 황사손은 고종황제의 증손자이고, 의친왕의 손자이다. 이원 황사손은 이구 황세손이 2005년 후사 없이 조상의 곁으로 간 뒤 종약원에 의해 계승손으로 지명 받았다. 이후 황사손으로서 종묘대제, 사직대제 등에서 초헌관으로 봉무하고 있다. 또 조선왕실 문화와 관련된 전통 행사에서 조선 임금의 역할을 하고 있다.

황실의 재산 종묘는 이제 문화재청이 주관 황사손의 상징성은 조선왕실 문화와 직결된다. 종묘대제가 세계문화유산이 된 가장 큰 이유는 600년 동안 전통방식에 의한 제례가 진행된다는 점이다. 세계에서 유일하게 음악과 춤과 제례가 나라의 사당 공간에서 옛 격식 그대로 펼쳐진다. 그래서 종묘대제에는 임금이 있고, 문무백관이 있고, 종친이 있고, 일무, 악공 등이 있는 것이다. 그런데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이에 비해 조선은 군주국이다. 또 조선은 이미 사라진 나라다. 그래서 문화재청이 주최를 한다. 비록 조선은 없어진 나라이지만 종묘대제는 임금이 역대 제왕을 뵙고, 덕을 기리며 나라의 안녕을 기원하는 의미가 있다. 옛 전통대로 지금의 임금이, 신이 된 조상 임금을 뵙는 의식이다. 이 같은 전통제례가 계속되기에 세계문화유산으로도 지정된 것이다. 따라서 종묘대제 등 세계문화유산을 비롯한 조선왕실 문화 행사에서 핵심은 바로 황사손이 된다. 민주공화국에서 실제적인 힘이 없는 명목상의 군주는 의미가 없을 수도 있다. 그러나 국제문화행사인 종묘대제에서 조선 임금의 맥을 이은 대한제국 황사손의 중요성은 절대적이다. 황사손의 의미가 퇴색되면 종묘대제의 세계문화유산으로서의 존재 의미도 약해지기 때문이다. 글쓴이 이상주 ‘세종의 공부’ 저자다. 조선왕실(전주이씨 대동종약원) 전례위원으로 종묘대제, 사직대제, 왕릉제향 전승자다. 세종왕자 밀성군종회 학술이사, 이상주글쓰기연구소(www.이상주글쓰기연구소.kr) 대표다. 지은 책으로는 ‘왕의 영혼, 조선의 비밀을 말하다’, ‘조선 명문가 독서교육법’, ‘공부열광’ 등이 있다. - 이상주 역사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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