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35호 박현준⁄ 2013.07.15 11:36:55
화용론. 아마도 미술사에서 가장 강력한 도발에 해당하는 예로써 마르셀 뒤샹의 ‘샘’을 꼽는데 주저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엄밀하게 말해서 ‘샘’은 예술작품이 아니었다. 적어도 감각적 쾌감을 위해 제작된 오브제에 맞춰진 전형적인 예술작품으로서의 정의와는 상관이 없는 것이었고, 나아가 그 정의와의 결별을 선언하는 것이었다. 이로써 전혀 새로운 차원의 정의를 제안하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샘’의 무엇이 예술작품의 정의에 해당하는가. 원래 일상이라는 맥락에 속해져 있었던 남성용 변기를 예술이라는 맥락 속에 옮겨 놓는 행위와 과정이 불러일으킨 도발과 스캔들이 예술작품이다. 이로써 전형적인 예술작품의 정의를 재정의하도록 유도한 행위가 예술작품이다. 무슨 말인가. 예술작품의 정의가 질료적인 차원에서 행위와 개념의 차원으로 넘어가고 있다는 것이고 덩달아 예술에 대한 정의 역시 오브제의 차원에서 맥락의 차원으로 건너가고 있다는 말이다. 이 오브제는 일상의 맥락에 속해져 있는가, 아니면 예술이라는 맥락에 속해져 있는가. 각각 일상의 맥락 아님 예술의 맥락에 속해져 있을 때 이 오브제의 정체성은 어떻게 달라지고 그 의미 또한 어떻게 다른가. 마르셀 뒤샹은 바로 이런 문제를 건드리고 있었다.
이런 인문학적 배경 위에서 마르셀 뒤샹은 레디메이드를 매개로 일상과 예술의 경계를 허문다. 그리고 주지하다시피 팝의 황제 앤디 워홀은 재 제작된 레디메이드를 매개로 똑같은 일을 수행한다. 일상과 예술의 경계 허물기에 맞춰진 팝아트의 모럴을 마르셀 뒤샹과는 다른 차원에서 실행한 경우로 볼 수가 있겠다.(중략) 아방가르드의 실천논리를 반영한 발상 배동기는 공장을 예술작품으로 제안한다. 가구와 가전에 예술의 옷을 입히는, 삶에 미학의 옷을 덧입히는 공장이다. 이 공장은 일상이라는 맥락에 속해져 있는가, 아님 예술이라는 맥락에 속해져 있는가.
각각 일상 아님 예술이라는 맥락에 속해져 있을 때 이 공장의 정체성은 달라지는가. 달라진다면 공장의 무엇이 어떻게 달라지는가. 배동기의 공장작품은 바로 이런 질문을 던지고 있고, 그 질문은 적어도 논리적으로 마르셀 뒤샹의 질문에 연동되거나 연장된다. 의미 자체는 고정적이지도 결정적이지도 않다. 의미가 고정되거나 결정되는 것은 의미 자체가 아니라 언어(말과 문자, 추상적이고 상징적인 기호와 눈빛 같은 바디랭귀지 그리고 일체의 감각적 이미지를 아우르는)가 실제로 수신(아님 발화)되는 지점에서이다. 의미의 키가 저자가 아닌 독자에게 주어진다는 저자의 죽음 논의도 알고 보면 이처럼 언어가 실제로 수신되는 지점에서 그 의미가 결정된다는 사실의 인식과 그 맥을 같이 한다. 언어가 실제로 수신되는 지점? 바로 맥락이다.(중략)
삶이 이미 예술이다. 마르크스는 미학의 가능성을 학문적 틀 속에서가 아니라 보편적 자질로 봤다. 모든 사람은 자신의 삶의 질을 향상시키려는 욕망을 가지고 있으며, 이때의 욕망을 미학적 가능성이며 자질로 본 것이다. 요셉 보이스는 예술은 일상 속에 있고, 따라서 모든 사람이 잠정적인 예술가라고 본다. 비록 아이러니하게도 더 난해해진 결과를 낳았지만(현대미술이 난해한 것은 실제로 난해해서라기보다는 용인과 인정의 문제 곧 현대미술과 관련한 경계설정의 문제인 경우가 많다), 여하튼 삶과 예술의 경계 허물기에 맞춰진 아방가르드의 실천논리를 반영한 발상이라고 하겠다.(중략)
그렇다면 공장을, 자신의 삶을, 자신의 삶의 장을 예술로서 제안하는 배동기의 경우는 어떤가. 공장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은 예술인가 아닌가. 공장에선 작가의 삶이 진행되고 있고(프로세스아트), 작가의 삶이 축적되고 있고(아카이브), 작가의 삶이 전시되고 있다(도쿠멘타와 르포르타주). 가전과 가구에 미학의 옷이 덧입혀지고 있고(프린트아트), 건조대의 세로 라인을 따라 장착된 LED로부터는 인공의 빛이 발해지고 있고(라이트아트), 기계 중 한 대는 랩으로 포장 설치돼 있다.(포장미술) 평소 기능의 효율성을 따라 배열됐던 페인트 통들이 전시를 위해 재배치된다(의미의 재구성). 이 모든 가시적이고 비가시적인 것들이 화이트큐브가 아닌 공장이라는 삶의 현장성 속에 전시된다(장소특정성). 공장 전체가 전시를 위해 꽤나 그럴듯하게 탈바꿈되는 것(연출).
이로써 공장이 말하자면 삶의 장이며 예술의 장으로서 제안되고 있는 것이다. 더욱이 공장은 삶이든 예술이든 작가의 정체성이 생성되고 양육되는 형식실험의 장이다. 이처럼 공장을 예술로서 들이미는 작가의 작업이 어려운가. 작가의 제안이 난해한가. 작가의 작업은 그저 작가의 정체성이 발현되는 장이 다름 아닌 공장의 형식을 덧입은 것뿐이고, 그 정체성의 발현체를 제안하고 있는 것뿐이다.(중략) 예술은 결국 의미부여의 문제라고 했다. 의미부여는 예술계의 성원들에 의한 공공연하고 암묵적인 합의에 의해서 수행되며, 그 자제 절대적이라기보다는 상대적이다. 일정하게는 그 자체 임의적이고 자의적이고 가변적인 것임을 피할 수가 없다는 말이다.
마르셀 뒤샹이 물려준 유산 중 결정적인 것으로 치자면 이런 예술계에 대한 도발일 것이다. 도발이 스캔들을 불러일으키고, 덩달아 예술에 대한 정의를 재정의하게 한다. 그러므로 도발은 예술계를 활성화시키는 각성제가 된다. 화재로 소실된 작업실 그대로를 재현하거나 도서관을 통째로 전시하거나 다만 불을 켰다 껐다 할 뿐인 행위들이 예술의 이름으로 수행되는 시대에 공장은 어떤 예술적 의미를 가질 수가 있는가. 배동기의 작업은 그렇게 물어온다. 그 질문은 마르셀 뒤샹의 반복인가, 아님 또 다른 형식의 도발인가. - 고충환 미술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