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39호 정의식⁄ 2013.08.12 14:04:14
1948년 9월 14일 故정주영 명예회장의 다섯째 아들로 태어난 정몽헌 회장은 학창시절부터 여느 재벌 2세들과는 사뭇 달랐다. 중·고등학교를 함께 다녔던 동창 김병훈 전 현대로지스틱스 사장에 따르면, 정 회장의 학창시절 별명은 ‘촌닭’이었다. 친한 친구들조차 그가 재벌가의 자제라는 것을 짐작 못할 정도로 그는 검소하게 생활했다고 한다. 선친 정주영 회장의 근검절약정신을 물려받은 덕분이다. 그는 연세대학교 국문학과를 ‘수석’으로 졸업한 문학청년이기도 하다. 연세대 재학 시절 정 회장은 술자리에서 친구들과 함께 시 낭송과 토론하기를 즐겼다고 동창들은 말한다. 촌스런 문학청년, 현대그룹을 이끌다 그런 그가 현대그룹 사업에 본격적으로 참여하면서부터는 남다른 ‘뚝심’으로 현대 DNA를 입증했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현대전자 반도체 개발 에피소드다. 현대전자 창립 초기 반도체 개발 속도가 더디자 사내에서는 “자체 개발을 포기하고 외국 기술을 적용하자”는 여론이 일었다. 하지만 정 회장은 “우리 기술진을 믿어보자”며 “기업은 자신감이 중요하다. 우리 손으로 1M D램을 개발해 사기를 회복하자”고 주장, 결국 현대전자 연구진은 1M D램 개발에 성공하기에 이른다. 1975년 현대건설에 입사한 정 회장은 1996년 현대그룹 부회장, 1998년 현대그룹 회장, 2000년 현대아산 이사회 회장 등 약 30년간 현대의 주요 사업분야 최고 경영자를 역임하면서 상선(해운), 전자, 건설, 무역 분야에서 뛰어난 경영 능력을 발휘했다. 정 회장은 미국 유학을 마치고 1981년 현대상선 사장에 취임해 현대상선을 국내 최대 해운기업으로 급성장시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현대상선, 국내 최대 해운기업으로 키워 현대상선은 1976년 정주영 명예회장이 유조선 3척으로 시작한 기업으로, 정 회장이 대표이사로 취임한 이후 급성장을 거듭하며 연간 수십억 달러를 벌어들이는 초우량 글로벌 기업으로 발전했다. 무엇보다 정 회장은 해운업계가 불황에 빠져있던 80년대에 “선박을 불황기에 건조해 호황기를 대비한다”는 전략으로 오히려 공격적인 투자에 나섰다. 이에 따라 현대상선은 꾸준히 선박을 늘려 1983년 38척 95만톤이던 선복량이 1988년 64척 238만톤으로 2배 이상 늘어 국내 최대의 선복량을 확보하게 된다. 1985년에는 숙원사업이었던 정기 컨테이너선 사업에 과감히 진출해 성공하였으며, 1986년에는 극동~미주 노선에 세계 최대·최고속 컨테이너선을 투입하는 성과를 냈다. 또한 유조선, 벌크선, LNG 수송선 등 사업 다각화를 꾀해 흑자 경영의 기반을 마련했다. 그 결과 현대상선은 정 회장의 사장 재임기간인 81년부터 88년까지 약 8년 동안 단시일 내에 선복량과 매출액에서 국내 최대 선사로 급성장 할 수 있었으며, 85년부터 2000년까지 16년 연속 흑자를 기록하는 등 해운업계에서 경이적인 성공신화를 일궈냈다.
정 회장은 평소 “자체 기술 개발에 의해 국내 산업 경쟁력이 강화될 수 있다”는 신념에 따라 국내 기술 자립을 토대로 경쟁력 있는 토종 기업을 육성시키고자 했다. 정 회장은 1989년 현대엘리베이터의 대표이사에 취임 이후 현대엘리베이터를 세계적인 기술력을 갖춘 기업으로 만들어가기 시작했다. 당시 세계 1·2위의 외국계 엘리베이터 기업들이 국내 기업들과 전략적 제휴를 맺고 국내 시장에 대거 진출하는 상황 속에서도 정 회장은 자립적인 기술 개발 원칙을 끝까지 고수했다. 정 회장은 당시 수차례 이천 공장을 찾아 “완벽한 시공능력과 품질경쟁력은 일류회사가 되기 위한 필수조건”이라며 기술과 품질을 각별히 강조했고 “‘기술입국’, ‘기술현대’를 통해 세계적인 초일류기업으로 거듭날 것”을 당부했다. 그 결과 현대엘리베이터는 오늘날 국내 시장점유율 1위(2012년 말 기준 42.1%)의 최대 승강기 생산 기업, 분속 1080m의 초고속 엘리베이터 기술을 보유한 세계적 기업으로 성장했다. 1998년 1월 현대그룹 회장으로 취임한 정 회장은 당시 매월 열리는 사장단 회의 외에 수출 주력 23개 계열사 사장이 참석하는 ‘수출확대전략회의’를 주도하며 수출증대 전략을 세우고 해외 진출을 독려했다. 특히 정 회장은 고비 때마다 해외에서 돌파구를 찾았다. 정 회장은 현대건설 대표였던 시절 1998년 한 해에만 40차례 이상 해외 출장을 다녀왔으며 방문한 나라에서는 대부분 수주에 성공했다. 또 정 회장은 현대의 중후 장대한 산업구조를 첨단사업으로 전환시키는데도 일익을 담당했다. 정 회장은 1980년 초 전자산업 분야에 뛰어들어 경기도 이천의 불모지에 현대전자산업(현 하이닉스 반도체)을 설립했다. 현대그룹, 해외시장 진출·사업 다각화 주도 당시 일본 전자업체의 어느 경영자는 “현대가 건설과 중공업에 익숙하기 때문에 이 사업에서는 생전에 흑자를 못 볼 것”이라고 예측했지만, 정 회장은 취임 이후 5년 만인 1989년 첫 흑자를 기록한 데 이어 1990년대에는 그 동안의 누적 적자를 말끔히 해소하고 대규모 흑자를 기록해 업계를 깜짝 놀라게 하기도 했다. 이러한 정 회장의 놀라운 경영 성과는 ‘아산(峨山)정신’이라는 뿌리 깊은 경영철학에 기반하고 있다. ‘아산 정신’은 맨손으로 시작한 창업주 정주영 명예회장이 세계적인 기업가로 변신하면서 체득하고 실천했던 현대그룹의 고유한 경영철학이다. ‘아산 정신’의 뼈대는 ‘사업보국 정신’, ‘도전·개척 정신’, ‘근면·절약 정신’이다. 정몽헌 회장은 국가 및 사회와 더불어 함께 번영하는 ‘사업보국 정신’을 강조했다. 정 회장은 평소 “기업이 어느 정도 커지면 개인의 소유가 될 수 없음”을 강조하며, 국가와 민족이 함께 성장하는 기업이념을 실현해야 한다는 남다른 기업관을 갖고 있었다.
‘아산(峨山) 정신’의 계승자 또 정 회장은 ‘도전과 개척정신’에 투철했다. 도전과 개척정신을 통해 국가 발전에 기여하는 새로운 사업을 끊임없이 발굴하고 난관을 극복할 수 있다고 믿었다. 정 회장은 1986년 10월 현대상선 정례조회에서 “오늘날 급격한 변화와 극도의 경쟁의 시대에서는 환경의 변화에 기민하게 적응하고 문제와 위기를 지혜롭게 해결하며 끊임없이 발전을 모색하는 조직, 살아서 생동하는 회사만이 희망찬 번영을 기대할 수 있다”고 임직원들에게 당부했다. 또한 정 회장은 몸소 근면·검소, 절약·저축을 실천했다. 현대전자 적선동 사옥시절 낡은 카펫을 교체하려는 총무부 직원들에게 “낡아도 쓸 수 있을 때까지 써야지 무슨 새 것이냐”며 나무랐던 유명한 일화가 있다. 헌 와이셔츠나 구두 한 켤레도 그냥 버리는 일이 없었다고 한다. 정 회장은 국내외 걸친 다양한 기업경영 경험과 많은 해외 활동으로 글로벌 기업 환경의 전형적인 경영자상을 보여 주었다. 무엇보다 정 회장은 자율경영 체제를 현대그룹 전체의 기업문화로 확산시키는 데 큰 역할을 담당했다. 우선 정 회장은 기업 경영을 전문경영인에게 대폭 위임하여 이사회 중심의 선진 경영문화를 현대그룹에 정착시키는 데 노력했다. 직원들에게는 ‘자신감’과 ‘자율경영’을 늘 강조했다. 또 정 회장은 기업의 끊임없는 ‘조직 변화와 혁신’을 시도했다. 정 회장은 1990년 현대상선 신년사에서 “어떤 조직이든 발전적 혁신의 힘을 잃을 때 안일과 타성이 소리 없이 찾아들고, 그 결과 조직은 노후되고 온갖 부조리가 만연하게 된다”며, “끊임없는 혁신만이 기업의 퇴보를 막을 수 있다”고 강조했다. 정 회장의 자율경영 체제가 현대그룹 전체의 기업문화로 확산될 수 있었던 데는 정 회장의 인간적인 매력도 한 몫을 했다. 정 회장은 소박하고 검소하며, 상하 직원들과 격의 없이 토론하기를 즐긴 것으로 유명하다. 업무 후에는 술잔을 기울이며 구수한 노래를 곁들여 임직원들과 함께 어울리곤 했다. 직원들 및 바이어들과 식사할 때는 밥 먹는 것도 잊을 만큼 토론에 열중했다. 또 정 회장은 스포츠를 좋아해 스키와 골프, 수영을 즐겨했으며, 매년 그룹 체육대회에서 직원들과 씨름을 함께 즐기곤 했다. 이처럼 정 회장은 확고한 기업가 정신과 냉철하고 합리적인 결단력 이면에 따뜻한 인품과 순박한 인간애가 자리 잡고 있었던 우리 시대의 진정한 경영자였다. 금강산관광·개성공단으로 남북경협 새 시대 열어 1988년 서울 올림픽을 정점으로 한국은 국가 위상이나 경제에서 또 한 단계의 도약을 위해 북방 진출이 필요한 시점이었다. 정 회장은 故정주영 명예회장의 뜻을 이어받아 1998년 2월 금강산관광 사업을 북측에 제안하는 등 남북 경협사업에 적극 나섰다. 이에 따라 1998년 6월 전 세계의 주목을 받았던 소 떼 방북이 이뤄지고 같은 해 11월 18일 그는 분단 반세기 만에 처음으로 한국 민간인들이 휴전선을 넘어 금강산을 여행하는 역사적인 금강산관광사업의 첫 뱃고동을 울렸다. 정 회장은 이후 1998년 10월, 1999년 9월, 2000년 6월·8월·9월 등 김정일 국방위원장을 5차례 만나면서 금강산관광, 개성공단, 개성관광, 류경 정주영체육관 건립, 철도·통신, 북측 SOC 등 굵직굵직한 남북경협사업을 추진했다. 그 후에도 수십 차례 북경, 금강산, 평양, 개성 등을 오가면서 북측과 남북경협사업에 혼신의 힘을 다했다. 특히, 정 회장은 장기적으로 전력과 철도 등 대북 SOC 건설 부문에서 막대한 사업 기회가 창출될 것으로 장래를 내다보고 북한으로부터 7대 사업에 대한 독점권을 획득하는 혜안을 발휘했다. 2000년 8월 북측과 ‘경제협력사업권에 관한 합의서’를 체결하고 ▲남북철도 연결 ▲통신사업 ▲전력 이용 ▲통천비행장 건설 ▲금강산 저수지 물 이용 ▲관광명승지 종합개발 ▲임진강댐 건설 등 7대 사업에 대해 30년 독점 사업권을 맺은 것이다.
역사적 사명감으로 진행한 남북경협사업 뿐만 아니라 정 회장은 2002년 11월 북측으로부터 금강산 및 개성 지역에 대한 50년간 토지 이용증을 확보한 데 이어 북한으로 하여금 금강산 및 개성 동서 양대 특구 지정과 함께 특구법을 제정토록 해 남북경협사업 활성화를 위한 국제적·법적·제도적 기반을 마련하기도 했다. 정 회장의 이런 노력은 구체적 결실을 맺어 2002년 9월 남북을 잇는 철도 및 도로가 연결되고 2003년 2월에는 우리 민족의 염원인 금강산 육로관광이 이뤄졌다. 또 같은 해 6월에는 실질적인 경제 파급효과가 기대되는 개성공단 착공식이 거행됐으며, 2005년 개성 시범관광에 이어 2007년 전면적인 개성관광이 시작됐다. 정 회장은 부친인 故 정주영 명예회장의 유지를 받들어 남북경협사업이 남북관계 개선은 물론 남북 평화, 통일의 초석을 다질 수 있다는 역사적 사명감을 갖고 있었다. 정 회장은 1999년 현대건설 신년사에서 “남북경협사업은 우리 민족이 역사적인 통일을 이룩하는데 초석이 되는 국가적인 사업으로서 우리 현대가 주도하는 사실에 대해 남다른 의미와 자부심을 가져야 한다”고 강조한 바 있다. 정 회장은 남북경협 사업을 통해 대한민국 경제와 현대그룹의 미래 신성장 동력이 창출될 것이라는 확신을 갖고 있었다. 북한에게는 경제 회생과 지속적인 발전 기반을 제공하고, 남한에게는 고비용-저효율의 구조적 문제점을 타개하여 남북한 모두에게 도움이 되는 상생의 협력 사업이라고 믿은 것이다. 뿐만 아니라 정 회장은 남북한 신뢰 회복과 한민족 공동체의 공감대 형성에 앞장섰다. 금강산 관광과 개성관광 사업은 단순한 관광사업이 아니라 남북한이 상호 신뢰를 회복하고 한반도의 긴장을 완화시키는 계기가 됐다. 또한 1000만 실향민의 한을 풀어 줌으로써 사회적으로 한민족 공동체에 대한 공감대를 형성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이외에도 정 회장은 다양한 남북교류 사업으로 남북한 사람들의 접촉 기회를 확대해 언어, 풍속 등 사회·문화적 이질감 극복에 기여했다. ‘금강산 문화회관’ 완공, ‘서울 통일 농구 경기대회’ 개최, ‘평양 종합체육관’ 착공, ‘남북 탁구단일팀 구성’, ‘개성유적 공동 발굴’ 등등 크고 작은 남북 문화 교류 사업에 이바지했다. 故정몽헌 회장이 불꽃같은 삶을 마감한지도 어언 10년이 흘렀다. 고인의 뜻과는 달리 남북화해 사업이 정치 논리와 진영 논리에 좌우되면서 많은 우여곡절을 겪었다. 금강산 관광도 중단되고, 개성공단도 가동을 멈추었다. 여전히 ‘현재진행형’인 정몽헌의 ‘꿈’ ‘꿈’보다는 ‘현실’에, ‘미래’보다는 ‘과거의 은원(恩怨)’에 모두가 매몰되어 있는 현재, 남북관계가 다시 해동되어 바다와 육지가 다시 연결되기를 기대하기란 쉽지 않아 보인다. 하지만 여전히 고인의 ‘꿈’을 기리며 차근차근 남북화해의 봄날을 준비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 현정은 회장을 위시한 현대그룹 임직원들이다. 지난 7월 22일 현정은 회장이 ‘故정몽헌 회장 10주기 추모 사진전’ 개막식에서?임직원 1만여 명의 사진으로 만들어진 정몽헌 회장의 대형 모자이크 사진 중 마지막 한 조각을 끼우는 장면은 세계에서 유일한 분단 국가에 살고 있는 우리 모두에게 큰 울림을 안겨줬다. 현 회장은 ‘당신의 꿈 우리가 이루겠습니다’라는 문구에서 ‘꿈’이라는 단어를 끼우며, 고인의 꿈이 아직 현재진행형이라는 것을 다시 한번 일깨웠다. - 정의식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