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묘에 부묘하는 임금의 신주 양식은 유명증시+사시+묘호+상시+대왕(有明贈諡+賜諡+廟號+上諡+大王)이다. 이는 태조 때부터 선조 때까지 변함이 없었다. 그러나 인조 때부터는 유명증시와 사시를 없애고 묘호+상시+대왕으로 변한다. 중국에서 받은 시호를 신주에 쓰지 않은 것이다. 여기에는 효종의 강인한 의지가 있었다. 조선 중기에 동아시아의 질서는 크게 요동친다. 인조 때 중국의 주인이 명나라에서 청나라로 바뀐다. 조선도 병자호란을 겪는다. 삼전도의 굴욕을 당한 조선은 명나라 대신 청나라에 사대하기로 한다. 조선의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이 청나라에 볼모로 잡혀간다. 이처럼 국력이 극도로 허약한 시기에 인조가 붕어한다. 다음 대를 이은 효종은 북벌론을 주창한 군주로 와신상담하고 있었다. 효종은 청나라에 시호를 청하는 사신을 보냈다. 하지만 청나라에서 준 시호를 부왕에게 올리기는 죽기보다 싫은 일이었다. 효종은 주위의 눈치를 보았다. 그렇지만 누구 하나 믿기가 어려운 세상이었다. 조정 깊은 곳까지 친청파가 장악하고 있었기에 감시의 눈초리를 피할 수 없었다. 조정에서 논의한 일이 금세 청나라로 알려지는 시대였다. 시간이 지나자 예조는 위판 제식과 축문 제식을 정할 것을 효종에게 아뢰었다. 효종은 승지에게 비밀리에 논의하라고 은밀한 지시를 한다. 비밀 지시를 한 것은 청나라의 시호를 쓰지 않겠다는 의미다. 조정에서 친청파의 세력이 크기에 믿을만한 사람과 비밀리에 협의하도록 한 것이다. 승지는 먼저 영의정 이경여를 만났다. 이경여는 “청의 시호를 쓰는 것은 13년 동안 원수를 갚을 날을 기다려온 인조의 본심과 어긋난다. 그때그때의 형편에 따라 목적 달성을 위한 수단을 쓰는 권도(權道)를 찾아야 한다”고 말했다. 이경여는 “대신 이 일이 청나라에 알려지면 나라의 존망에 영향을 받는다. 사려 깊은 중신 두세 명에게만 은밀히 자문을 구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승지는 다음에 좌의정 조익에게 문의했다. 그도 같은 의견을 냈다. 효종은 이경여와 조익을 불러 비밀리에 방법을 연구했다. 효종은 두 대신과 몇 차례 의견을 나누고 조율한 뒤 위판에 글을 쓰는 제주관 신유를 불렀다. 이 자리에는 환관도 들어오지 못하도록 한 뒤 사관 한 명만 입시하도록 했다. 그만큼 보안에 신경을 쓴 것이다. 효종은 두 신하의 뜻을 헤아려 위판에 글을 쓰도록 지시하고, 절대 발설하지 않도록 당부했다. 신유는 임금의 뜻을 알아채고 유청증시, 사시 부분을 없애고 묘호+상시+대왕만을 구성하여 ‘인조헌문열무명숙순효대왕’으로 썼다.
청나라에서 받은 시호 문제는 이와 같이 효종이 두세 명과 은밀히 논의하고 실천했기에 당시 석학인 송시열도 알지 못했다. 효종이 신임했던 최고 인사는 영의정 이경여다. 그는 소현세자의 비인 강빈의 사사와 소현세자 아들의 제주도 유배를 반대하다가 평안도 삼수에 위리안치돼 있었다. 그런데 효종은 등극과 함께 이경여를 불러 영의정에 앉혔다. 그리고 은밀하게 북벌계획을 하달했다. 이에 이경여는 이완을 훈련대장으로 기용하고 드러나지 않게 북벌계획을 추진한다. 효종은 이경여를 호칭할 때 대인선생(大人先生)이라고 했다. 그만큼 존경하는 인물이었다. 송시열은 효종이 이경여에게 북벌에 관한 은밀한 내용을 말한 것을 ‘공자가 3천 제자 중 가장 신뢰한 단목씨’에 비유했다. 하지만 북벌의 큰 뜻을 갖고, 청나라의 시호를 거부한 군주는 어이없게도 마흔한 살 젊은 나이에 세상을 뜬다. 그것도 수전증을 앓는 어의가 실수한 것 아닌가 하는 점을 논란으로 남긴 채. 효종실록 10년(1659) 5월 4일 기사에는 급박했던 순간이 사실적으로 묘사돼 있다. “상이 침을 맞고 나서 침구멍으로 피가 나왔다. 피가 계속 그치지 않고 솟아 나왔는데 이는 침이 혈락(血絡)을 범했기 때문이었다. 제조 이하에게 물러가라고 명하고 나서 빨리 피를 멈추게 하는 약을 바르게 하였다. 그런데도 피가 그치지 않으니 제조와 의관들이 어찌할 바를 몰랐다. 상의 증후가 점점 위급한 상황으로 치달으니, 약방에서 청심원과 독삼탕을 올렸다. 백관들은 놀라서 황급하게 모두 합문 밖에 모였는데, 이윽고 상이 삼공(三公)과 송시열, 송준길, 약방 제조를 부르라고 명하였다. 승지·사관과 여러 신하가 뒤따라 들어가 어상 아래 부복하였는데, 상은 이미 승하하였고 왕세자가 가슴을 치며 통곡하였다.” 수전증 앓는 어의 침 맞고 마흔 살에 급서 효종은 북벌의 대망을 이루지 못한 채 급서했다. 수전증 상태의 병석에 있던 어의가 놓은 침이 혈관을 건드린 탓이라고 조선왕조실록은 적고 있다. 출혈이 멈추지 않자 효종은 대업을 논의하던 삼정승과 송시열, 송준길을 급히 불렀다. 그러나 이들이 도착했을 때는 이미 승하한 뒤였다. 효종은 태조가 묻힌 경기도 구리의 동구릉 서쪽에 안장됐다가 현종 14년 경기도 여주로 천장됐다. 효종의 북방정책을 보좌하던 훈련대장 이완은 훗날 시 한 수로 북벌군주의 이루지 못한 꿈을 애통해하고 그리워했다. 비 갠 뒤 만록이 새로운데 한자리에 늙은이와 젊은이, 임금과 신하가 모였음이네 꽃 가운데 대와 버들에 쌓인 정자가 그림 같은데 때때로 들리는 꾀꼬리 소리는 주인을 부르누나 말먹이를 직접 줄 만큼 확고한 무장의 자세를 보인 이완은 포도대장과 우의정을 거친 뒤 일흔네 살에 눈을 감는다. 그는 이때 “효종을 모신 영릉 가까이에 묻어 달라”는 마지막 말을 남겼다. 죽어서도 효종 근처에서 보필하겠다는 의지였다. 이완의 묘를 송시열이 찾은 적이 있다. 송시열은 옛 시절을 회상하면서 시 한 수를 남겼다. 오랜 세월 무덤 위에 잣나무만 무성한데 어느 곳에 꿇어앉아 묵은 사연 말을 할까 - 이상주 역사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