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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한성의 옛절터 가는 길 - 38]종로서 피폭 김상옥 의사(義士) 피신…무학봉 안정사(安定寺)스님이 보듬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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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nbnews 제344-345호 박현준⁄ 2013.09.16 11:31:01

1923년 1월 12일 밤 8시경 조선인 탄압으로 악명이 높았던 종로경찰서(현 종로 1가 제일은행 본점 주차장 근처)가 피폭되어 아수라장으로 변하였다. 범인을 찾지 못했던 일경은 정보수집에 혈안이 되어 있었다. 그 때 한 여자로부터 밀고가 들어 왔다. 범인은 후암동 고봉근(高奉根) 집에 숨어 있었는데 겹겹이 포위되어 사살될 위기에 직면하였다. 이 때 30대 초반의 범인은 쌍권총을 뽑아 들고 형사부장 다무라(田村)를 사살하고는 수 명의 경부들에게 중상을 입힌 후 포위망을 뚫고 귀신처럼 사라져 버렸다. 경기도 경찰국과 경성(京城)의 경찰서들은 초비상이 걸렸다. 범인의 행방은 묘연했다. 이 범인은 누구였을까? 임시정부 의열단원 김상옥(金相玉)이었다. 의사(義士)는 일찍이 서울역에서 사이또 총독을 암살하려 했으나 정보가 누설되어 실패하였다. 그 후 종로경찰서를 습격한 후 매부의 후암동 집으로 피신했던 것이다. 문제는 이 집에 세들어 살던 여인이 밀고했던 것이다. 악명 높았던 종로경찰서 피폭, 신출귀몰한 의거 의사는 남산으로 피신하여 일본 경찰의 추격을 따돌리면서 남산을 넘어 새벽에 왕십리 무학봉(無學峰) 아래 안정사(安定寺)로 숨어들었다. 손발은 동상에 걸리고 의관도 챙기지 못하여 삼동(三冬)추위에 몸은 모두 얼어 있었다. 생면부지의 스님은 추위에 지친 의사를 보살핀 후 승복과 짚신을 내어주었다. 의사는 승복으로 변장하고 집신을 거꾸로 신고는 그 길로 눈길을 걸어 무내미(수유리) 이모집으로 피신하였다.

그 후 의사는 어찌 되었을까? 효제동 이혜수(李惠受) 집에 숨어 있다 탐지되어 1923년 1월 22일 수백 명 일경(日警)의 포위망에 맞서 일경을 사상(死傷)한 후 마지막 탄환으로 장렬히 자결하였다. 오늘 필자는 김상옥 의사가 90년 전 넘어 온 산길을 거꾸로 걸으면서 절터를 찾아가 보려 한다. 2호선 상왕십리역 6번 출구를 나서 시내 방향으로 잠시 걸으면 무학근린공원 300미터를 알리는 표지판이 매달려 있다. 골목길로 접어들자. 잠시 후 한진그랑빌 아파트를 지나면서 무학봉(無學峰)을 오르게 된다. 고도 92m의 작은 봉우리인데 시민들을 위한 편의시설과 운동시설, 우거진 숲이 조화를 이루고 있다. 왜 이 산 이름이 무학봉일까? 짐작하는 바와 같이 짚히는 사람이 있다. 태조 이성계의 스승 무학대사. 야사(野史)에 의하면 천도할 새 수도(首都)를 찾던 무학이 이 곳 봉우리 아래를 지나가는데 밭 갈던 노인 한 분이 소를 나무라며 하시는 말씀, ‘미련하기가 무학 같구나’ 했다 한다. 퍼뜩 정신이 든 무학대사가 도움을 청했는데 ‘십리를 더 가면(往十) 목멱산(木覓山, 南山)이 있으니 거기를 올라 보라’ 하기에 남산에 올라 보고 대궐 터를 찾았다는 이야기가 있다. 그렇기에 동네 이름은 왕십리(往十里), 봉우리 이름은 무학봉(無學峰)이 되었단다. 이 봉우리는 6.25전쟁 전까지만 해도 이 일대 사람들이 제단을 차리고 산신제를 지내면서 흥겨운 하루를 보냈던 곳이었다. 무학봉 정자 아래쪽에는 무학봉체육관이 있다. 주민들을 위한 실내체육관이다. 그 앞으로 금호베스트빌이라는 아파트가 있는데 그 남쪽 기슭에 안정사가 있었다. 불과 4년 전까지만 해도 시골 친구집 같던 안정사가 있던 곳은 이제는 아파트 건설현장으로 터를 닦고 있다. 조선 한양천도 무학대사와 무학봉 기슭 안정사 절은 아파트 업자에게 팔려 사라졌어도 작년까지는 인왕(仁王)처럼 그 터를 지키던 절 앞 안정사슈퍼도 이제는 없어져 안정사를 기억할 수 있는 흔적은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안정사는 봉은사(奉恩寺)의 말사였다. 봉은본말사지에 의하면, ‘경기도 고양군 한지면 종남산에 있다. 대본영 봉은사의 말사, 조선 태조 4년(1396년) 태조의 왕사 무학개사가 종남산 동쪽 골짜기에 창건하였다. 사명은 안정사(安定寺, 혹은 安靜寺) 후에 청련사로 개칭하였다. 혹 신라 흥덕왕 2년(827년) 최초로 창건하였다고도 한다. (京畿道 高陽郡 漢芝面 終南山 大本山 奉恩寺 末寺, 朝鮮太祖四年 太祖王師 無學祖師刱寺於終南山東谷 號曰安定(或云 安靜)寺 後改靑蓮寺 或稱新羅興德王二年始刱...)’라고 기록하고 있다. 오래 된 고찰인 것이다. 철거되기 전 안정사에는 청련사라는 편액이 붙어 있었다. 지금도 상왕십리역 안내도에는 청련사라는 지명이 그대로 남아 있다. 1840년경 발행한 수선전도(首善全圖)에는 목멱산 동쪽 줄기에 안정사(安定寺)로 표시되어 있다.

안정사는 태고종 소속이었는데 태고종과 조계종의 소유권 분쟁에 휘말려 있었다고 한다. 몇 년 전 신문기사에 의하면 양 종단이 승낙하여 절을 매각하였다고 한다. 매각대금은 상당히 큰 금액이었다. 비록 작은 규모의 사찰이었지만 서울에 몇 안되는 유서깊은 사찰이 이렇게 사라진 것이다. 안정사 법당을 철거할 당시 법당 뒤 자연 석벽에서 민불형식의 마애불이 발견되었는데 이것만이라도 아파트 건설업자가 지켜 주었으면 고맙겠다. 안정사 터 앞으로 아이원 아파트 표지판이 보인다. 이 표지판 방향이 능선으로 오르는 길이다. 아파트 사이 깨끗한 도로가 언덕길을 향하는데 500미터 남짓 오르면 난계로에 닿는다. 세종대왕 당시 아악을 정리한 난계(蘭溪) 박연 선생의 이름을 딴 길이다. 도시가 개발되기 전에는 산의 능선이 이제는 차가 무리지어 달리는 도로가 되었으니 대단한 변화이다. 김상옥 의사가 이 길을 지났을 때는 오솔길밖에 없었을 것이다. 횡단도로를 건넌다. 좌측으로 본향교회를 알리는 안내판이 붙어 있다. 교회가 있는 길로 들어가면 교회 뒤편으로 넓은 숲 속 운동장과 공원이 나타난다. 응봉공원이라는 안내판이 붙어 있다. 전에는 대현산 배수지공원으로 불리던 곳이다.

큰 운동장도 2개나 되고 그 주위를 잇는 숲길 트랙도 상쾌하다. 지하로는 배수시설이 있다. 이곳은 우리나라 최초의 상수도 배수시설 중 하나인 유서깊은 곳이다. 1907년 조성된 곳으로 이듬해인 1908년 뚝도정수장이 완공되자 뚝섬에서 취수한 물을 이곳으로 올려 시민들에게 상수도로 공급한 우리나라 근대화의 한 획을 긋는 장소인 것이다. 응봉공원을 나선다. 횡단보도를 건너면 금호공원으로 오르는 길이다. 길 안내판에 금호산공원 550미터, 남산길 5180미터를 알리고 있다. 이 길은 뚝섬 서울숲에서 남산까지 녹지공원으로 이어가는 길이다. 모든 길이 다 숲길로 이어지지 못한 아쉬움은 남지만 서울숲에서 봄날 개나리 만개한 응봉을 거쳐 대현산 배수지를 이어 남산까지 갈 수 있는 길은 작은 축복이라고 생각한다. 오늘 필자가 걷는 길도 무학봉에서 시작하여 대현산 배수지를 경유하여 서울숲, 남산길을 겹쳐 걷는 길이다. 종남산 달맞이봉 아래 비구니 절 미타사 앞쪽은 재개발아파트(금호 13구역) 터닦이 공사가 한창이다. 거리 표지판에 ‘논골’이라는 지명이 보인다. 아파트로 가득한 도시에 논골이라는 지명이 아직도 남아 있으니 문득 고향 친구 만난 듯 반갑구나. 금호산 공원길로 오른다. 잠시 후 대경정보고 앞을 지난다. 예쁜 화장실도 있고 휴식처에 수도도 갖추어져 있다. 이윽고 갈림길과 마주하는데 옥수동 신당동, 군부대(막다른 길)로 갈린다. 이 두 길을 버리고 군부대 우측 흙길로 들어서자 조망대가 나타난다. 서울의 동쪽 지역과 북한산, 도봉산이 장관을 이룬다. 길은 숲 사이로 편하게 이어진다. 운동시설, 휴식처, 화장실 등 부족한 점이 없다. 전체가 응봉근린공원이라 하는데 동쪽은 금호산 구간, 서쪽은 매봉(응봉) 구간으로 구분하고 있다. 길의 북쪽은 중구, 남쪽은 성동구 관할이다. 숲길이 잠 시 끝나는 지점에서 서울방송고와 남산 타운 아파트를 만난다. 이곳에서 오르막 숲길을 오르면 공원의 최고봉 매봉(산)에 닿는다. 높이는 140m의 낮은 산이지만 남산이 고개를 넘어 동쪽에서 융기한 가장 높은 봉우리인 것이다. 서쪽은 용산구, 남쪽은 성동구, 북쪽은 중구로 세 구를 나누는 경계가 되는 곳이다. 정상에 세운 팔각정 응봉산정(鷹峰山亭)에 오른다. 시야가 저 멀리까지 트인다. 아래로는 한강이 내려다보인다. 옥수동 금호동이 눈 아래 있다. 동호대교, 성수, 영동, 청담대교들도 보인다. 옥수역 달맞이봉(83m) 아래로는 종남산의 또 다른 절 미타사(彌陀寺)가 보인다. 조계종 소속 비구니절로서 종남산 미타사(終南山 彌陀寺) 또는 니사(尼寺)로 기록되는 절이다. 오늘 답사길에는 숲길이 연결되어 있지 않아 내려가 보지 않기로 한다. 답사 후 전철을 타고 들러 보리라. 서북쪽으로는 남산의 동봉과 서봉이 든든한 형님처럼 자리하고 있다. 매봉과 남산을 이어주는 고개가 버티고개이다. 북쪽 하산로를 통해 버티고개로 내려간다. 누군가 길가에 돌탑을 쌓았다. 산길 걷는 이 다리 덧나지 말라고 기원하던 마음의 흔적이었다. 길을 내려오면 버티고개 생태통로에 닿는다. 지난해 초까지만 해도 이런 통로는 없었다. 이 생태통로를 보면 너무나 기분이 좋다. 산줄기가 이어진 것이다. 남산의 이름은 가장 친근한 남산(南山)을 시작으로 목멱산(木覓山), 인경산(引慶山), 열경산(列慶山), 종남산(終南山) 등 여러 가지가 있었다. 이 남산의 영역은 숭례문(남대문)에서 시작하여 현 남산 두 봉우리를 거쳐 서울도성 쪽으로는 동대문 역사공원 지나 청계천 오간수 다리 앞까지이다. 동으로는 버티고개, 매봉, 대현산 배수지 지나 한 줄기는 무학봉을 거쳐 한양대 뒷산 넘고 살곶이 다리까지, 다른 한줄기는 배수지에서 대현산 지나 개나리 피는 한강가 응봉까지 이어진다. 이 남산의 동쪽 줄기가 버티고개 생태통로로 다시 이어진 것이다. 비로소 종남산 안정사, 종남산 미타사라는 말이 다시 의미를 갖게 되었다.

버티고개라는 고개이름의 유래는 분명치가 않다. 흔히 벌아령(伐兒嶺)이라고 하는데 북한산 인수봉은 등에 어린애를 업고 있는 듯한 바위가 붙어 있어 부아악(負兒岳)이라 불렀다. 이 애가 산줄기를 타고 빠져 나가면 나라에 변고가 생긴다 하여 벌로 겁을 주려 했다는 뜻으로 벌아령이라 했다는 속설도 전해진다. 이와 관련하여 본래 남소문은 동국대 앞에서 한남동으로 넘어 가는 고개에 있었다. 이 고개는 대궐의 손(巽방향, 동남쪽)에 있어 풍수상 문제가 있어 예종 원년에 폐쇄된 기록도 있으니 이 쪽 고개는 이러나저러나 애들과 관련이 있다. 한편 버티고개에는 약수동이라는 지명을 탄생시킨 약수가 있었다는데 고개를 깎아내렸으니 사라진 것 같다. 1970년대에는 남소문터나 버티고개 근처에 들병이, 야바위꾼, 불량배들이 설쳐 행락객들이 불편을 겪기도 하였다. 그러고 보면 강력범죄는 늘고 이런 잡범들은 줄어든 세상이 되었다. 생태공원길을 건너 서울도성 구간으로 이동한다. 성벽이 시작되는 언덕에 성곽마루라고 명명(命名)한 8각정 쉼터를 세워 놓았다. 이곳에서 반얀트리(타워호텔) 구내를 지나 정문으로 나오면 건널목 너머에 국립극장이 있다. 국립극장 위에서는 길이 좌우로 갈리는데 좌측 길을 택하여 잠시 후 서울도성 나무층계 길로 들어선다. 서울도성 곳곳에 남은 ‘공사 실명제’ 남산의 성벽은 도성의 다른 구간과는 달리 화강암이 아닌 구간이 많다. 남산 자체 바위를 사용한 까닭이다. 반듯하게 다듬어지기 어려운 성질을 가졌는지 있는 잡석을 가져다 올린 것으로 착각할 수도 있겠다. 성을 쌓은 이들의 실명제 확인 각자도 많이 보인다. ‘禁 二而五百七十步’ ‘第三小受音 使鄭祐’ ‘巨字終闕 百尺’ ‘劍字六百尺’, ‘稱字終夜字始’…. 한 구간을 600척(尺)씩 나누어 분담했는데 천자문(天 地 玄 荒…弔) 으로 그 순서에 따르다 보니 97구간으로 나뉘어졌다. 각자(刻字) 속에서 눈길을 끄는 것이 ‘受音(수음)’이다. ‘받음’을 이두식으로 표현한 것이다. 나무층계 중간쯤 남산약수터로 가는 흙길과 만난다. 남산약수터로 가자. 남산산악회 건물도 있고 운동설비도 갖추어진 곳이다. 여러 번 정지작업을 했을 것임에도 불구하고 기와편이 많이 밟힌다. 아쉽게도 기록을 찾을 수 없는 절터이다. 내려가는 길로 접어들면 잠시 후 상춘약수(常春藥水)를 만난다. 수량도 풍부하고 맛도 깔끔한 약수이다.

이윽고 남산순환도로로 내려온다. 이곳에서 남산타워까지는 약 1.5km 거리이다. 공원순환버스와 관광버스만이 들어 올 수 있는 길이기에 교통량이 거의 없는 걷기코스이다. 오르는 길 소나무군락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우리 고유의 소나무탐방로를 설치해 놓았다. 이 길로 횡단하여 갈 길을 진행한다. 애국가 2절 가사가 왜 그렇게 되었는지 절로 이해가 된다. ‘남산 위에 저 소나무 철갑을 두른듯...’ 소나무 우거진 숲길에는 데크와 의자도 설치되어 있어 쉬어 가기에 안성맞춤이다. 더구나 호젓하기까지 하다. 어떤 이는 아예 누워 초가을 하늘 속으로 빠져 버렸다. 다시 순환도로로 돌아온다. 성벽과 다시 만날 즈음 찻길을 버리고 좌측 숲 샛길로 들어선다. 이제부터는 성벽을 우측으로 끼고 숲속 오솔길을 걸을 수 있다. 언젠가 길동무 몇몇과 이 길을 걸었는데 하나같이 이 길이 서울 한복판 남산이라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했다. 호젓하고 깊이를 느낄 수 있어서였을 것이다. 1킬로 남짓 걸으면 길은 두 갈래로 나누어진다. 좌측 길은 이태원 방향 하산하는 숲길이며 우측 길은 남산타워 방향 길이다. 우측 타워 방향으로 오르자. 필자는 좌측 이태원 방향으로 길 탐색을 나선 일이 있다. 성종 때 문신 성현의 용재총화(慵齋叢話)에 나오는 절터를 찾기 위해서였다. ‘목멱산 남쪽 이태원들에는 높은 산에서 샘이 솟아나고 절 동쪽에는 큰 소나무가 들에 가득찬 골짜기에서 빨고 두드리는 도성 안 부녀자들은 이곳에 많이 간다 (木覓山之南 李泰院之坪有泉瀉出于高山 寺之東松滿洞 城中婦女洴 벽(⺡+辟)衣者多往焉) 이 시절 이태원은 용산동 2가 용산고 근처에 있었다. 절 동쪽 소나무 가득한 골짜기라면 남산타워 남쪽에서 발원하여 용암배드민턴장 지나 이태원으로 흐르는 계곡인데 그곳에는 도롱뇽과 반딧불이 안내판만 있고 절터는 없었다. 아마도 이태원 주택가가 된 아래쪽에 있었을 것이다. 잃어버린 절 이름에 대해서 어떤 자료는 고산사(高山寺)라 했는데 이는 용재총화에서 고산(高山)과 사(寺)를 붙여 읽은 오류일 것이며, 어떤 이들은 운종사(雲鐘寺)라 했는데 그 근거를 밝히지 않아 잘 모르겠다. 다만 1932년 7월 2일 동아일보에 전설을 소개한 기사에 황학동(黃鶴洞)에 있던 운종사에서 가등청정 군대가 여인들을 범했는데 그 여인들이 남산 남쪽 부군당(지금의 보광동, 이태원)에 옮겨 와 살았다고 한다. 그러니 이태원에 있었던 절은 운종사가 아닐 것이다. 아쉽게도 용재총화에 소개된 이태원의 절터는 찾지 못하였기에 오늘은 남산 정상으로 오른다. 정상에는 눈에 띄는 2개의 역사적 자취가 남아 있다. 첫째는 봉화대이다. 목멱산 봉수 또는 경봉수(京烽燧)라 불리던 봉수로 남산 동봉에 다섯 연대(燃臺;불아궁이)를 갖는 봉화대가 2조(組), 서봉에 3조(組) 총 5조가 있었다. 봉화신호 체계는 평상시에는 1개, 적이 보이면 2개, 적이 접근하면 3개, 국경을 넘으면 4개, 접전이 시작되면 5개의 불을 밝히도록 되어 있었다. 따라서 5개의 불아궁이가 없으면 기능을 할 수 없기에 5개 아궁이로 한 조를 이룬 것이다. 현재 남산 정상에 재현해 놓은 5개 봉수는 한 조만을 모델로 선보인 것이다. 조선에는 5개 봉수라인이 있었다. 동봉 2조는 함경도와 경상도 라인을 담당하였고 서봉의 3조는 전라도, 평안도 해안, 평안도 내륙을 담당한 라인이었다. 불행한 것은 호란과 왜란을 겪으면서도 한 번도 제 구실을 못했다는 점이다. 설비도 중요하지만 그것을 운용하는 시스템에 허점이 생겼는데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용재총화에 등장하는 고산사는 어디인가 또 하나 눈에 띄는 것이 국사당(國師堂) 이전 표지석이다. 조선 천도 이후부터 국가에서는 봄가을로 백악산(북악산)과 목멱산에 제를 올렸다. 그러기 위해서 백악신사와 목멱신사가 지어졌다. 세종실록 권 130에는 제목멱의(祭木覓儀)가 기록되어 있는데 목멱신사에 제사드리는 내용이 실려 있다. 이렇게 목멱산을 지키던 국사당(목멱신사)는 1925년 일제가 자신들의 신을 모시는 조선신궁을 잠두봉 아래 세우자 인왕산 선바위 아래로 쫓겨나게 되었다. 자신들의 신 위에 조선의 신을 놓아 둘 수 없었던 까닭일 것이다. 힘이 없으면 수백년 자리 지키던 주인도 도둑에게 쫓겨나는 법이다. 잠두봉에서 바라보는 서울은 아름답다. 필동 옆 묵정동이 내려다보인다. 1901년 캐나다 선교사 게일(Gale)이 그린 한성부지도에는 현재 묵정동(墨井洞)을 먹졀골(墨寺洞)이라 기록하였다. 묵정동 지명유래에는 한결같이 옛날에 먹절(墨寺)가 있었다고 한다. 남산 기슭 또 다른 절 먹절도 이름만 남기고 사라져 버린 것이다. 힐튼호텔 앞길로 내려오면 잠시 성벽이 이어지다가 그친다. 육교를 건너 남대문으로 향한다. 새로 단장한 숭례문(남대문) 현판이 석양에 빛난다. 교통안내 2호선 상왕십리 6번 출구 걷기 코스 상왕십리역 ~ 무학봉 ~ 안정사터 ~ 응봉공원(대현산 배수지) ~ 금호산 공원(응봉근린공원) ~ 매봉산(응봉근린공원) ~ 버티고개 ~ 국립극장 ~ 남산약수 절터 ~ 상춘약수 ~ 소나무 탐방길 ~ 성벽 밖 오솔길 ~ 남산 정상(봉화대/ 국사당터) ~ 잠두봉~ 힐튼호텔앞 ~ 숭례문 ※‘이야기가 있는 길’ 답사에 독자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매월 마지막 토요일에 함께 모여 서울 근교의 옛절터 탐방을 합니다. 3, 4시간 정도 등산과 걷기를 하며 선인들의 숨겨진 발자취와 미의식을 찾아가니, 참가할 분은 comtou@hanmail.net(조운조 총무)로 메일 보내 주시면 됩니다. - 이한성 동국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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