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양빛이 내려앉은 강물의 한 겹을 떠온 것처럼 눈부시다. 마치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색조의 비늘을 얹어 수를 놓은 듯 화려하다. 얼핏 넓게 번지는 오로라의 커튼인가 싶으면, 이내 유리파편처럼 산산이 부서져 사라졌다가도 다른 한쪽에선 자가 증식을 반복한다. 이정걸의 최근 신작을 본 첫인상이다. 육안으로선 도저히 가늠하기 힘든 ‘만색의 오케스트라’가 웅장한 연주를 마친 뒤의 감흥도, 열정적이고 화려한 파티의 열기를 부추기는 네온사인 불빛들도 이보다는 더하지 않을 듯싶다. 물론 화려함의 정점을 보이는 색의 향연에 비해 더없이 차분하고 담백한 분위기의 작품들도 눈길을 끈다. 다양한 색조의 서로 다른 작품들에선 공통점이 발견된다. 생성과 소멸, 소멸과 생성. 누가 먼저랄 것 없이 그 둘을 동시에 느낄 수 있다는 점이다. 강렬한 원색의 조화로움과 무채색 톤의 색조가 서로 혼재되고 뒤엉켜 원초적인 생명감을 자아낸다. 또한 얼핏 굉장히 많은 양의 안료를 통해 복잡하고 두터운 마티에르의 질감을 표현한 것처럼 보이지만, 가까이서 보면 너무나 편편하고 의외로 얇은 두께감에 놀라게 된다.
이정걸의 작품은 분명 선명한 색조의 신작임에도 묘하게 숙성된 미감이 돋보인다. 보고 있을수록 수많은 시간이 그 안에 잠들어 있는 것 같다. 절묘한 원초적인 생명감을 불러일으키는 색감의 효과는 이정걸 특유의 독창적인 제작기법을 통해 만들어졌다. 시간의 오랜 주름까지 포착해낸 그의 화법은 보는 이의 정신을 삽시간에 무장해제 시킨다. 실제 화면에선 간혹 ‘시간의 층이나 얇은 조각’이란 뜻을 지닌 ‘Time Slice’라는 영문 텍스트가 등장하기도 한다. 그림의 일부로 자연스럽게 스며든 그 단어엔 이미 ‘생성과 소멸’의 상반된 두 의미가 한 몸처럼 녹아들었다고 할 수 있겠다. 이정걸이 지금의 작품성향을 선보이기 시작한 것은 2008~2009년 이후부터다. 2007년까진 구상성 강한 작품이었다. 아날로그적인 전통의 페인팅 기법으로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낡은 널빤지나 나무 등걸에서부터 작게는 오래된 못, 낙엽 등에 이르기까지 ‘지나간 세월의 대변자’ 일색이었다.
손과 기계, 실재와 허상의 합작품 사실 지금은 아날로그 기법과 디지털 기기의 첨단기술을 함께 활용하는데도, 자세히 관찰하면 같은 맥락의 소재들이 최근 작품 속에서도 숨듯 등장한다. 그림에 나타나는 형상은 그에게 중요치 않다. 마치 ‘낡고 엷어짐의 아름다운 미학’을 전해주려는 듯, 소멸해가는 흔적들에 잠든 작은 생명의 불씨를 되살리는데 온갖 관심이 쏠려 있다. 세월의 흔적이나 시간의 층위가 켜켜이 쌓인 이정걸의 작품은 어떻게 태어나는 것일까? 보면 볼수록 도대체 어떻게 ‘그린 건지’ 혹은 ‘만든 건지’ 헛갈린다. 너무나 리얼한 수작업의 흔적들이 강하면서도, 한편으론 인쇄용 망점이나 컴퓨터 작업의 기계적인 픽셀들도 무수하다. 결론부터 보자면 이정걸 회화의 참맛은 바로 손과 기계적 요소의 수없는 교차에서 익은 것이다. 구체적인 제작기법 설명은 잠시 미루고 시각적인 형상성을 먼저 살펴보자. 대개 작품의 화면 전체를 채운 것은 무수한 색조의 하모니다. 하지만 그 사이사이에 부분 혹은 구체적인 형상들이 눈에 띤다. 그중에서 가장 중심된 형상성은 사람이다. 두상 위주의 여인 옆모습이나, 소수의 남성 군상들은 모두 실루엣으로 처리됐다. 실제 사람이기보다는, 그렇게만 보이는 것에 만족하는 듯하다. 이정걸이 작품 속에 등장하는 사람들의 형상을 만드는 과정 또한 흥미롭다. 실제 사람이 아닌 마네킹을 촬영해서 그 실루엣 도상을 사용하기 때문이다. 그저 생명의 흔적만을 유추할 수 있는 ‘사람스러운 느낌’만을 차용하기 위함이다. 이런 과정은 작품 전반에 투영되어 있는 ‘생명의 흔적’을 쫓는 과정과도 맥락을 같이 한다. 그리고 눈길이 가는 작품 중에 빼놓을 수 없는 것은 노란색 바탕의 작품들이다. 노란색면의 미니멀 작품을 연상시키는 이 작품들은 아주 단순하다. 그저 화면 부분 부분에 헤진 흔적이 남아 있는 뿐이다. 이 작품이야말로 이정걸이 표현하고자 하는 제작의도가 가장 구체적으로 함축된 사례가 아닐까 싶다. 우연히 발견하게 된 축사의 빛이나 바람가리개용 천막 천이다. 아주 오래된 천막에서 비닐부분의 겉면이 아닌 안쪽 천 부분을 ‘그대로’ 활용한 것이다. 삼라만상이 지닌 소멸생성의 비밀 이렇듯 온갖 세월의 무게와 풍파를 이겨낸 소재들에 남아 있는 꿰맨 자국이나 얼룩, 천막 고리나 구부러진 못 자국들을 고스란히 작품에 옮겨 놓음으로써 실재감을 더하고 있다. 적지 않은 시간동안 오래된 폐가나 농가들을 찾아다니며 ‘지나간 시간들’을 헌팅 해온 결과물들이 축적됐기에 가능한 일이다. (중략)
“모든 생명체들이 피할 수 없는 ‘소멸의 길’을 표현하고자 합니다. 삼라만상이 존재하기 시작하는 순간 소멸의 길을 지나 죽음에 이르게 되지만, 그 자리에선 어김없이 또 다른 생명체가 태어납니다. 무수히 반복되는 시간의 연속이 곧 세상의 존재감이며, 그렇게 반복되는 ‘소멸과 생성의 비밀’을 나만의 방식으로 표현하려 노력합니다.” 세상을 지탱하고 있는 온갖 이야기들을 한 화면에 함축해내긴 그리 만만치 않다. 그 이야기를 전달하는 방법은 여러 가지이다. 자잘한 요소들까지 한 자루에 우겨넣는 방법이나, 그 이야기보따리에서 하나하나 꺼내며 비워가는 과정도 있다. 이정걸은 이 둘을 동시에 구사한다. 전자가 화려한 색조의 픽셀들로 이뤄진 작품들이라면, 후자는 축사 천막을 활용한 노란 단색 화면이다. 빈틈없이 채워진 온갖 상징적 기호들은 하고 싶은 이야기가 너무나 많은 작가의 마음을 비추고 있다. 길을 걷다 발에 치여 줍게 된 오래된 나무판자나 막대기, 쓰임새도 잊힌 녹슨 못 등 세월의 때나 사연이 묻은 거라면 그냥 지나치지 않는다. 지금은 비록 남루한 몰골이지만 언젠가 누군가의 정성스런 손길이 닿았을 법한 그것들에게 세상의 목소리를 듣는 것이다. 아마도 이정걸은 세월을 품은 그 소재들에서 탄생하는 순간 한 걸음 한 걸음 죽음으로 내디딜 수밖에 없는 인간의 숙명을 고스란히 읽어내고 있는 것이리라. 평소 낡은 이미지들에 애정을 느끼는 편이라, 시간이 날 때면 이 동네 저 동네 폐가들을 자주 다니는 것 역시 이젠 습관처럼 몸에 배었다. 그렇게 세월을 낚는 강태공처럼, 시간의 흔적들을 채집하는 것에서 남다른 힐링을 느끼고 있는 것은 아닐까 싶다. 가을을 닮은 인생의 화려한 정점처럼, 극세밀의 색조미학으로 구현한 이정걸의 작품이 10월 23일부터 29일까지 서울 종로구 관훈동 인사아트센터 3층 전시실에서 세상과의 만남을 통해 가족과 함께 일상의 평범한 행복감을 만끽하듯, 그만의 색조미학으로 지극히 소소하게 소멸되는 것에서 조차 새로운 생명의 희망과 꿈을 읽어내고 있다. - 글·김윤섭 미술평론가, 한국미술경영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