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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형 리더십 연구 ①]이순신 불멸의 리더십, 현대 리더를 가르치다

이순신 연구가 박종평 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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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nbnews 제349호 이진우⁄ 2013.10.21 17:56:28

지난 1592년 4월 13일 조선반도는 역사상 최대 위기에 봉착하게 된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전국시대로 혼란했던 일본을 통일한 후에, 군벌 세력들의 약화를 획책하기 위해 명나라를 침공한다는 명분으로 수십만 대군을 보내 부산포를 기습 공격하면서 임진왜란의 서막이 올랐다. 이후 왜군은 파죽지세로 북진을 거듭하면서 불과 한 달여 만에 수도인 한양(지금의 서울)을 함락시키는 기염을 토했다. 당시 조선은 건국 이래 큰 국난의 위기를 겪지 않아 약 200여 년간 태평성대를 누리다보니 국방을 소홀히 하고 있었으며, 조정은 당파싸움으로 하루도 조용할 날이 없었다. 양반가의 자제를 비롯한 평민들은 병역의무를 회피하는데 몰두했고, 병역의무가 없던 노비들을 대신 군대에 보내는 등 부정부패가 공공연한 상황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오랜 기간 전쟁으로 단련된 왜군을 맞아 제대로 싸울 수 없다는 것은 삼척동자도 잘 알 일이다. 이순신은 전쟁이 일어나기 1년 전, 고향 선배였던 유성용의 천거를 받아 전라좌수사로 부임했다. 부임한 이후 단 하루도 쉬지 않고 군사를 양성하고 군량미를 비축했으며 군선을 정비하고 거북선을 건조하는 등 만반의 전쟁준비에 철저했다. 박 연구가는 “이순신은 평소에 전쟁사를 비롯한 역사에 관심을 갖고 탐독해왔으며, 손자병법 등의 병법서도 꾸준히 공부했다. 이러한 지식을 바탕으로 끊임없는 고민과 사색을 통해 현실에 적용할 방법을 찾아냈으며 이를 곧바로 실행으로 옮겼다”면서 “또한 이순신은 요행이라든지 만일이라는 경우의 수를 절대로 따지지 않았다. 오직 미리 철저히 계산하고 확실한 경우에만 비로소 행동으로 옮기는 치밀함을 보였으며, 그의 유비무환의 자세는 전쟁 전후에 있어서도 한 치의 흐트러짐이 없었던 일관된 자세였다”고 강조했다. 이순신은 1591년 전라좌수사로 부임해 군영을 새롭게 정비하는 가운데, 과거 고려 때부터 내려왔고 태종실록에도 기록이 남아있던 거북선의 설계도를 바탕으로 세계 최초의 장갑선인 거북선을 건조해 임진왜란 하루 전에 운항과 함께 포사격을 성공적으로 시험했다. 이순신은 당시 국제정세에도 밝아서 얼마 지나지 않아 일본에 의한 전쟁이 일어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인지했다. 이에 따라 수군을 양성하고 군선을 정비하며 조선 수군의 강점을 파악해 전략, 전술, 무기체계 등의 우위를 통해 왜의 수군이 서해안으로 진출하는 것을 저지하기 위한 군사력을 강화하는데 집중한 것으로 보인다. 지피지기 백전불태…철저한 유비무환의 자세 또한 이순신의 리더십 가운데 빼놓을 수 없는 것이 경청하는 자세에 있다. 그는 군막 내에 ‘운주당’이라 불리는 일종의 작전통제실을 세우고 개방해서 누구든지 이곳에 와서 전략과 전술 등의 토론을 하고 문제점을 찾아 해결책을 찾는 시스템을 구축했다. 박 연구가는 “아마도 이순신은 중국의 전쟁사를 연구하는 과정에서 중국을 통일하고 한나라를 세운 고조 유방의 전략가로 유명한 장량(자는 자방)을 롤 모델로 삼은 것으로 보인다”면서 “당시 최대 숙적이었던 초나라 항우와 맞서던 유방의 책사 장량이 승리를 위한 전략을 연구하던 막사가 운주당으로 전해진다”고 말했다. 한고조 유방은 전략가인 장량을 비롯해 전군을 통솔하던 대장군 한신과 군의 지원과 내정을 총괄하는 재상 소하 등의 출중한 인재들을 휘하에 두고 있었다. 마침내 숙적 항우를 물리치고 천하를 통일한 후 이들 세 사람의 공신 중 누가 최고의 공을 세웠는지에 대한 논란에 대해, 유방은 “막강했던 항우를 치고 천하를 통일할 수 있었던 것은 내게 장자방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술회했다고 한다. 박 연구가는 “이순신은 눈앞의 승리에 연연해하지 않았다. 항상 장기적인 안목을 가지고 철저히 준비하는 것을 중요하게 여겼다. 이는 전력의 열세를 극복하기 위해서도 치밀한 작전으로 강한 적과는 맞서지 않고 오로지 반드시 이길 수 있는 적들만 상대한다는 병법을 충실히 따른 것으로 보인다”면서 “이순신이 비록 무과에 급제해 무관의 길을 걸었지만, 태생은 문관 출신 가문에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학문과 역사와 병법을 익혀왔다. 사실상 당시 조선의 장수들 중에는 문무를 겸비한 장수들이 거의 없다시피 했다”고 설명했다. 전쟁이 일어나기 전 조선시대 무관들은 문관에 비해 사회적으로 천대받고 있었다. 이에 따라 글께나 읽는다는 선비들은 무관으로 나아가지 않았고, 당연히 양반들 사이에서도 공부보다는 싸움에만 능한 소위 무식한 양반가 자제들이 무관으로 나갔던 것이다. 이들 싸움 잘하는 무관들은 단순히 변방을 잘 지키거나 성문 보초에 충실하고 시키는 임무만 열심히 하면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하지만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상황은 크게 반전됐다. 전쟁은 상대방보다 전투를 잘해서 이기는 것도 중요하지만, 필승을 위한 작전이 훨씬 더 중요하다. 그런데 당시 조선의 대부분의 무관들은 병서를 읽고 작전을 능수능란하게 짤 수 있는 인재가 드물었다. 이에 문무를 겸비한 이순신이 병서를 읽고 전략을 짜며 준비할 수 있었기에 그토록 눈부신 전과를 거두는 업적을 남길 수 있었던 것이다. 문무의 절묘한 조화에서 필승 전략이… 이순신은 당시 조선 사회의 기준으로 보면 문관으로서는 뛰어난 수준은 아니었지만, 무관으로서 자신이 갖고 있던 문과 무를 절묘하게 조화시킴으로써 뛰어난 능력을 발휘할 수 있었던 것이다. 또 조선군과 왜군의 장단점을 정확히 파악해 조선군이 갖고 있던 무기의 강점을 최대한 살리는 지략을 발휘했다. 당시 조선군의 주력무기는 대포와 활이었다. 장거리에서는 대포를, 단거리에서는 활을 주로 사용했는데, 대포의 화력은 왜군에 비해 우수한 반면에 활은 왜군의 신무기인 조총에 상대가 되지 못했다. 이에 따라 이순신은 대포의 강점을 최대한 잘 살릴 수 있도록 근접전을 피하고 조총의 사정거리 밖에서 대포를 동원한 전투를 위주로 했다. 또 왜군의 배가 조선의 판옥선에 비해 빠르기는 하지만 충돌에 약한 단점을 파악하고 거북선 등을 앞세워 충돌시켜 적선을 침몰시키기도 했다. 지형지물을 최대한 이용하는 전략과 전술도 승리의 큰 요인이 될 수 있었다. 앞서 얘기한 23전 23승의 전승 신화는 과거 인기리에 종영한 드라마 ‘불멸의 이순신’의 제작진이 과장한 측면이 있다고 한다. 박 연구가는 “기록에 따른 크고 작은 전투를 종합하면 실제로는 45전 42승 3무의 전적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웅포해전, 장문포해전, 왜교해전 등의 세 번의 전투에서는 승패를 논하기에 그 결과가 별로 선명치 않았던 것으로 파악된다”고 말했다. 이순신이 32세의 비교적 늦은 나이에 무과에 급제하고 무관으로 나아간 뒤에는 승승장구한 것만은 아니었다. 처음에는 북쪽 변방의 여진족과 대치하면서 이미 아픈 패배의 경험을 가지고 있었으며, 그 패배의 경험 속에서 부하들은 물론 백성들의 고통을 잊지 않고 항상 고뇌하면서 다시는 실수하지 않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했다. 그 결과로 임진왜란에서는 남해의 해상 재해권을 장악하고 왜군의 서해 진출을 봉쇄해 호남의 곡창지대를 보호하는 등 전략적인 측면에서 장기전의 우위를 가져올 수 있었던 것이다.

조선수군이 전략, 전술, 무기체계 등에서 왜군에 월등히 앞서가며 세계 전사에 길이 빛나는 전과를 올린 배경에는 이순신의 뛰어난 능력을 손꼽을 수 있지만, 그와 생사를 같이했던 참모장수들을 빼놓을 수 없다. 최근 진수되고 있는 해군의 잠수함명에 이들의 이름이 명명되고 있는 것을 보면 그들이 남다른 능력을 지닌 인재들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용맹한 선봉장으로 이름이 높은 녹도만호 정운, 옥포해전에서 노량해전까지 이순신과 함께 한 중위장 입부 이순신, 그리고 권준, 김완, 어영담, 송희립, 신호, 이언량, 이억기, 이운룡 등의 뛰어난 장수들이 있었기에 이순신의 조선수군은 계속해서 전력을 강화해 나갈 수 있었으며, 원균이 칠천량해전에서 대패한 후에도 빠르게 수군을 재건할 수 있었던 밑거름이 됐다. 박 연구가는 “이순신의 주위에 인재가 모이는 이유로는, 그가 귀와 마음을 열고 경청하는 자세가 있었기 때문”이라며 “이를 통해 소통하고 공감하며 겸손함을 잃지 않는 리더였기 때문에 그의 주변에는 항상 인재들이 넘쳐났다”고 언급했다. 그러면서 박 연구가는 “이순신은 사실 무척 자존심이 센 인물이다. 이것은 항상 원칙을 지켜야 한다는 그의 지론에서도 나타난다. 전쟁 와중에도 이순신은 엄정한 군기확립과 원칙을 지키기 위해 이를 어긴 자들을 100여 명이 넘게 처형할 정도로 엄격했다”며 “하지만 조정에서 부산포로 진격해 적장을 생포하라는 명에, 그 부당함을 알고서 명을 거부했다가 삼도수군통제사에서 파직되고 한양으로 압송돼 사형당할 위기에 처하기도 했다. 이는 부하들과 백성들을 소중히 여기는 마음이 있었기에 기꺼이 명을 어기고 죽음을 택할 수 있는 결단을 한 것”이라고 역설했다. 당시 이순신이 선조의 명을 어기고 파직돼 한양으로 압송되자, 백성들은 ‘우린 이제 다 죽었다’며 한탄했다고 한다. 그리고 원균이 대패한 후 다시 삼도수군통제사로 복직하자, 백성들은 ‘우리가 이제는 살았다’고 기뻐했다. 당시 전쟁에 지친 백성들의 이순신에 대한 신망이 얼마나 두터웠는지 보여주는 대목이다. 한편 이순신이 백성들을 얼마나 진정으로 사랑했으며, 또 얼마나 혁신적인 사고를 가지고 있었는지에 대한 사례가 전해진다. 남해의 한 섬에서 군마를 기르는 목장이 있었다. 이곳에서는 농사를 지을 수 없도록 규제가 있었다. 이에 이순신은 1593년에 이곳의 규제를 풀어 백성들을 이주시키고 둔전을 개간해 농사를 지을 수 있도록 상부에 요청했다. 이순신 주위에 늘 인재가 모이는 이유는? 당시 비변사는 만약 그렇게 되면 전쟁에 반드시 필요한 군마를 조달할 수 없다고 반대했다. 하지만 이순신은 백성들을 이곳에 정착시켜 군마도 기르고 농사도 짓게 해 군량미를 조달하는 한편, 백성들이 안전한 곳에 정착해 살면서 병역의무를 수행하게 하면 군사를 충원하게 되는 효과도 있다며 거듭 요청했다. 결국 상부에서도 이순신의 요청을 수락할 수밖에 없었다. 박 연구가는 “이 사례에서 우리는 이순신의 탁월한 장기적인 안목을 엿볼 수 있다. 백성을 이주시켜 정착시키면 가뜩이나 부족한 군사 충원의 문제를 해결함과 아울러, 농사를 지으며 군마를 길러 군량미를 비롯한 군수물자 확보가 용이하다는 것을 파악한 것”이라면서 “이는 현대 사회의 리더들이 심사숙고해야할 과제가 아닌가 한다. 최근 정쟁의 원인으로 부각되고 있는 복지와 성장이라고 하는 것도 따로 가야 하는 문제가 아니다. 복지가 마이너스가 아니라 플러스로 작용해 성장으로 선순환되는 시스템을 만들어서 약자를 케어하고 일자리를 제대로 만들어 내는 것이 창조경제의 핵심일 것”이라고 조언했다. 마지막으로 박 연구가는 리더는 여기저기에 흩어져 있는 것을 모으고, 이를 새롭게 재정립해서 만들어 내는 사람이라면서, 이를 위해서는 제도에 대한 신뢰를 회복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또 리더는 따르는 사람들에게 떳떳해야 한다. 리더가 바로 서지 않으면서 잘못에 대한 죄의식이 없다면, 이는 낙수효과처럼 아래로 퍼지게 돼 모든 이들이 원칙을 무시하고 비정상적인 행위를 함으로써 사회 전체가 흔들리는 원인이 된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그는 “현대 사회의 모든 리더들이 이순신 장군의 리더십에 대해 깊이 있게 성찰하고 재조명할 수 있기를 바란다”고 당부했다. 박종평 이순신 연구가 - 약력 ·서강대학교 정치외교학과 졸업 ·고려대 대학원 정치외교학과 졸업 ·국회의원 입법·정책 보좌관 - 저서 ·흔들리는 마흔 이순신을 만나다 ·그는 어떻게 이순신이 되었나 ·이순신 이기는 원칙 ·이순신 꿈속을 걸어 나오다 - 논문 ·인간 이순신의 꿈과 점에 관한 연구 ·난중일기를 통해본 이순신의 척자점에 관한 연구 ·명랑해전 철쇄설 연원에 관한 연구 - 이진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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