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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한성의 옛절터 가는 길 40 - 하] 도봉산 영국사 터~여성봉

매창과 유희경의 ‘순애보’ 400년 넘어 도봉산공원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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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nbnews 제350호 박현준⁄ 2013.10.28 11:36:08

도봉서원을 지나며 기억해야 할 사람이 있다. 촌은(村隱) 유희경이다. 유희경(劉希慶)은 천민으로 13세에 아버지를 여의고 3년 시묘살이를 했다. 이를 기특하게 여긴 당대의 양명학자이며 후에 양주목사를 지낸 남언경이 거두고 예(禮)를 가르쳤기에 유희경은 상장례(喪葬禮)의 전문가가 될 수 있었다. 그 후 유희경은 영의정을 지낸 박순의 사랑을 받아 그의 시풍을 이어받은 시인이 되었다. 유희경이 도봉서원 건설에 남언경(南彦經)을 도와 활약할 수 있었던 것은 이런 인연에서 비롯되었다. 1591년 봄 나이 48세가 된 유희경은 남도를 여행하다가 부안에 들렸다. 이 때 시(詩)와 거문고로 이름을 날리던 매창을 찾아갔다. 매창은 물었다. ‘유(劉)와 백(白) 중 누구냐?’는 것이었다. 당시 천민시인으로 이름을 떨친 사람이 유희경과 백대붕(白大鵬)이었는데 한양의 유희경이 매창을 알고 있었듯이 매창도 유희경이란 이름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유희경이 시 한 수 읊는다. 매창에게 주는 시(贈癸娘)였다. 曾聞南國癸娘名(증문남국계낭명) 일찍이 남쪽 계랑 이름 들었는데 詩韻歌詞動洛城(시운가사동락성) 시와 노래가 한양을 흔들었지 今日相看眞面目(금일상간진면목) 오늘에야 참모습으로 서로 대하니 却疑神女下三淸(각의신녀하삼청) 천상의 선녀가 하계 했나 의심 되네

제대로 된 작업멘트였다. 이에 매창도 받는다. 我有古奏箏(아유고주쟁) 제게는 오래 된 거문고 있어 一彈百感生(일탄백감생) 한 번 타면 온갖 느낌 다 일지요 世無知此曲(세무지차곡) 세상사람 내 곡조 아는 이 없었는데 遙和謳山笙(요화구산생) 멀리 오신 노래와 젓대가 어울리겠죠 이렇게 20살의 매창과 48세의 촌은은 사랑에 빠졌다. 그러나 2년 후 임진란이 발발하였다. 촌은은 의병활동을 위해 매창 곁을 떠났다. 이 이별이 15년이란 긴 세월의 이별이 되었다. 아마도 유학에 깊이 천착했던 촌은으로서는 처자가 있는 몸으로 차마 정인(情人)을 만나러 부안으로 가지 못했던 것이었을 것이다. 매창(梅窓) 또한 관(官)에 매인 기생의 몸으로 부안을 떠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리움은 어찌하지 못하였다. 낙엽 지는 밤 매창은 그 마음을 시조에 담았다. 梨花雨 흩날릴 제 울며 잡고 이별한 님 秋風落葉에 저도 나를 생각는가 천리에 외로운 꿈만 오락가락 하노매라

촌은의 그리움도 그에 못지않았다. 娘家在浪州(낭가재랑주) 그대의 집은 부안 我家住京口(아가주경구) 나의 집은 서울에 있어 相思不相見(상사불상견) 그리움 사무쳐도 서로 못 만나 腸斷梧桐雨(단장오동우) 오동잎 떨어질 때 애간장 끊어지네 이런 그리움의 과정을 거친 후 15년 만에 그들은 다시 재회하여 짧은 기간 꿈같은 기간을 보냈다. 그런 후 다시 이별, 相思都在不言裡 말은 못했어도 너무나 그리워 一夜心懷鬢半絲 하룻밤 맘고생에 귀밑머리 희었어요 欲知是妾相思苦 소첩의 맘고생 알고 싶으시다면 須試金環減舊圍 헐거워진 이 금가락지 좀 보시죠 매창은 3년 뒤 30대 후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부안 땅 매창뜸 언덕에는 매창의 육신이 묻혔고 그녀의 마음은 촌은의 가슴에 묻혔다. 또 한 사람 매창을 가슴에 묻은 이가 있었다. 그는 친구로서 매창을 가슴에 묻었다. 조선의 천재이며 열혈남이었던 홍길동전의 저자 허균(許筠)이었다. 허균의 일기 조관기행(漕官紀行)에 매창을 만난 날 일이 기록되어 있다. 1601년 7월이니 매창이 촌은과 못 만난 지도 10년이 되어 가던 때였다. 이때 허균은 부안으로 출장을 갔다. 그 때의 기록이다.

기생 매창을 사랑한 남자, 유희경과 허균 “임자 일에 부안에 도착하였다. 비가 심하니 유숙했다. 고홍달이 와서 만나보았다. 기생 계생(매창의 기명)은 이옥여(전 현감 이귀)의 정인이다. 거문고를 끼고 시를 읊는데, 미모는 뛰어나지는 않으나 재주와 정감이 있어서 이야기를 할 만하였다. 하루 종일 술을 마시며, 시를 짓고 서로 화답하였다. 저녁 잠자리에 질녀를 들였는데, 꺼리 낄 일을 멀리하기 위해서였다 (壬子到扶安 雨甚留 雨甚留 高生弘達來見 倡桂生 李玉汝情人也 挾瑟吟詩 貌雖不揚 有才情可與語 終日觴詠相倡和 夕 納其姪於寢 爲遠嫌也)“ 조선시대에는 중앙에서 온 이에게 관기가 잠자리를 함께 하는 게 일반적인 일이었는데 매창은 자신의 질녀로 허균의 시중을 들게 한 것이다. 첫 만남에 친구가 된 것이기에. 이 날 이후 두 사람은 10년 지기(十年知己)의 도반(道伴)이 되었다. 아마도 매창은 상당히 매력적인 캐릭터를 지닌 여인이었던 것 같다. 세상에서는 이들을 정인관계로 지목하여 지탄하기도 했으나 그렇지 않았다. 허균은 그런 것을 숨기는 사람이 아니었고 언제나 솔직하게 자신의 마음을 기록으로 남긴 사람이다. 이들 사이는 남과 여를 넘어 서로를 아끼는 도반이었다. 매창으로 인해 허균이 세상 사람들의 오해를 심하게 받은 일이 있는데 그 때도 허균은 매창을 크게 탓하지 않았다. 그 일을 남으라던 허균의 편지 클로징 멘트가 정답다. ‘요새도 참선은 하고 계시오? 언제나 그립구려(近亦參禪否 相思耿切)’ 매창의 죽음을 맞은 두 남자의 애절한 시(詩)가 전해진다. 그러나 더 보람 있는 일은 죽음과 함께 영영 잊혀질 것 같았던 매창의 시가매창을 사랑하는 사람들에 의해 사후 60년 즈음 58수(首)가 모였고 개암사(開岩寺)에서 목판본으로 간행되었다. 그녀에 대한 후세 사람들의 사랑도 그치지 않아 부안에는 매창공원이 사랑을 받고 있다.

도봉산 공원 입구에도 지난 해 매창과 유희경의 시비(詩碑)가 세워졌으니 이들의 사랑은 400년을 넘어 우리 곁에까지 다가왔다. 촌은 유희경은 그 뒤 어떻게 살았을까? 의병활동의 공이 인정되어 면천(免賤: 천민의 신분에서 벗어남)을 하였고 살아서는 통정대부(정3품), 가의대부(종2품)의 품계를 받았고 사후에는 한성부윤(정2품)의 품계를 받았으니 부끄럽지 않은 삶을 산 것이다. 실생활의 삶은 벼슬길과는 먼 학문과 시로 낙을 삼으며 신선처럼 살았다. 현재는 창덕궁의 서쪽 담 안쪽이 되었으나 당시는 창덕궁 밖 서편 마을 원동(院洞) 금천 상류에 집을 짓고 일대를 침류대(枕流臺)라 이름 지었는데 시(詩)를 사랑하는 이들이 신분의 차이를 넘어 모여들었다. 이 때 모여 시를 읊던 평민, 천민들의 모임을 풍월향도(風月香徒)라 했는데 그 전통은 삼청시사(三淸詩社)로 이어져 위항문학(委巷文學: 중인 평민들의 문학)의 시발점이 되었다. 나이 들면서 촌은은 아예 거처를 도봉산 골짜기로 옮겼다. 도봉서원 곁에 임장(林庄; 숲 속 거처, 침류당)을 짓고 여기에서 일생을 지냈다. 도봉서원과 촌은을 찾아오는 이가 그치지 않았으니 외롭지는 않았으리라. 80세에는 금강산 유람을 하고 92세에 학처럼 승천하였다. 지금도 도봉서원 앞 계곡 바위에는 침류대(枕流臺)란 각자가 남아 있다.

도봉서원 앞 계곡 바위엔 침류대 각자 앞서 도봉서원을 방문했던 월사 이정귀와 백사 이항복도 침류당에서 묵었다. 그 밤을 지낸 월사의 기록이다. “사당에 참배한 뒤 무릇 앉을 만하고 거닐 만한 바위나 언덕은 모두 맘껏 노닐고, 지친 몸으로 돌아와 침류당 동루에 앉았다. 누각은 예전에는 없던 것을 지금 증축했다 하는데 매우 깨끗하여 좋았다. 밤에 침류당에 묵었다. 물결 소리는 침상을 흔들고 산 위 달은 문에 비쳐들어 삼경에 잠에서 깨니 마치 꿈속에 삼협(三峽)을 지나가는 것 같았다. 백사(이항복)가 나를 발로 치며 말하기를, ‘이러한 좋은 경치를 어찌 만나겠나?’ 하기에 술을 가득 부어 몇 잔을 마신 다음 명한에게 노래하게 하고 앞뜰을 거닐면서 소자첨(蘇子瞻)의 적벽부(赤壁賦)를 낭랑하게 읊조리니, 표연히 바람을 타고 등선(登仙)하는 기분이었다. 생각해 보니 내가 옛날에 이곳에서 삼추(三秋)를 지냈으나 이 밤처럼 청아한 경치를 만난 적이 없었다. 이에 옛날에는 아예 이곳에서 노닌 것이 아니었고 이제야 비로소 이곳에서 제대로 노닌다는 것을 알겠구나.

(拜祠訖。凡石若丘之可坐可步者。靡所不盡意。倦歸坐枕流堂東樓。樓卽舊無而今增。淸絶可愛。夜宿枕流堂。波聲撼床。嶺月入戶。三更睡起。若夢中度三峽也。沙翁蹴余曰。能會此勝否。遂引滿數杯。令明漢歌。仍散步前除。朗吟子瞻赤壁賦。飄然有御風登仙之想。念我昔寓此盡三秋。未嘗遇此夜淸致。於是知昔之未始遊。遊於是乎始。)“ 이제 촌은과 매창의 이야기를 남겨 두고 갈 길을 추스른다. 등산객들이 길을 메운다. 이들은 촌은을 알고 있을까? 부안에 잠들어 있던 매창의 영혼이 그리워했을 촌은이 오래 오래 살던 곳, 이곳을 알고 있을까? 이윽고 갈림길에 닿는다. 서원교란 다리를 만나는데 다리를 건너면 문사동(問師洞)이란 각자(刻字)가 바위에 남아 있는 문사동계곡이다. 스승에게 물어야(問師) 할 일이 어디 한 둘이겠냐마는 오늘은 길을 우측으로 틀어 능선길로 오른다. 천축사(天竺寺) 가는 길이다. 길은 오르막이다.

30여 분을 오르면 이제는 문을 닫은 도봉대피소를 만난다. 그 앞으로는 공공화장실도 갖춰져 있다. 이 곳에서 길은 다시 갈린다. 우측 길은 만월암, 석굴암을 거쳐 도봉산 자운봉으로 향하는 길이며 좌측길은 천축사로 가는 길이다. 좌로 길을 잡는다. 500m 거리에 제법 가파른 오르막이다. 천축사(天竺寺)가 선인봉을 등지고 세상을 내려다보고 있다. 안내문에 문무왕 13년(673년) 의상대사가 수도한 곳으로 옥천암(玉泉庵)이었는데 태조 이성계가 이곳에서 수도했던 인연으로 1398년 천축사가 되고, 성종 5년(1474년) 어명으로 중창되었다고 한다. 원래는 아래 큰 절 영국사의 부속암자였다 한다. 문정왕후가 화류용상(樺榴龍床)을 헌납하여 불좌로 삼았고, 비로자나삼신불도와 비로자나삼심괘불도가 유명하다기에 살펴보려 했으나 모두 볼 수가 없었다. 종무소 보살께 여쭈어 보았으나 드라이한 대답뿐이다. 문화재를 탐하는 자들이 들끓는 세상에서 그런 것을 묻는 이들은 아마도 의심스러운가 보다. 신비로운 자연과 음양의 조화, 여성봉 절 입구에는 무너져 내린 승탑 두 기(基)의 부재(部材)들이 장식물인 양 길가에 자리하고 있다. 어느 한 때 이 도량에서 진리를 찾다가 열반하신 스님들의 사리탑일진데… 법당 뒤로 돌아가 석굴에서 시원한 샘물 한 컵 마신다. 아마도 이 샘이 있어 옥천암(玉泉庵)이었으리라. 절 동편 선인봉 아래 품에는 현대식 건물 무문관(無門館)이 있다. 1960년대에 석가모니 부처께서 6년 설산고행하였듯이 6년간 용맹정진하여 깨달음을 얻게 하고자 설립한 곳이었다. 제 발로 들어가되 누군가가 문을 열어주지 않으면 나올 수 없는 무문(無門)의 수행공간이었다. 문득 어느 대통령이 썼던 대도무문(大道無門)이란 휘호가 떠오른다. 많은 분들이 발심(發心)하였으나 6년 정진을 끝낸 분은 관응, 제선, 구암, 원공 4 분 스님이 전부였다 한다. 세태가 바뀌어 이제는 일반인들의 수행공간으로 바뀌었으니 이름은 무문(無門)이되 유문(有門)의 공간이 되었다. 돌아 나오는 내 마음이 어찌 이리 허전한지 모르겠다.

이제 200m 위쪽이 마당바위다. 넓은 암반이 펼쳐지는데 눈앞으로는 보문능선이 가을 오후 햇빛 속에 뻗어 나가고 아래로는 서울 동쪽 시가지가 펼쳐진다. 선인봉 0.7km, 관음암 0.8km의 이정표가 붙어 있다. 관음암으로 가자. 길은 8부 능선으로 고도의 높낮이가 별로 없는 길이다. 600m 지점에 오면 주봉(柱峰) 0.2km를 알리는 갈림길이 있다. 이 길로 오르면 신선대로 오를 수 있다. 주봉은 앞에서 보면 우람하게 솟은 반듯한 기둥 모습을 하고 있고 방향을 바꾸면 우뚝 선 남근처럼도 보인다. 오늘은 200m 전방 관음암으로 직행이다. 관음암은 바위 아래 법당 하나 요사채 하나 작은 암자이다. 사찰 안내판에 무학대사가 태조 이성계를 도와 기도했다 한다. 비몽사몽간에 굉음이 울리면서 땅이 갈라졌는데 미륵불이 용출했다 한다. 아쉽게도 그 미륵불은 남아 있지 않다. 이 높은 곳에 석간수를 항상 모아 놓아 목마른 이 마시고 갈 수 있게 해 놓았다. 이 길을 지날 때면 신세를 지니 이 암자의 급수공덕(給水功德)은 큰 것이리라. 관음암을 나서면 오봉(五峰)까지 1.6km의 능선길이다. 이 길 이름이 오봉능선이다. 능선 너머로는 삼각산의 세 봉이 보인다. 백운대, 인수봉, 만경대가 가을 석양빛에 아스라하다. 드디어 오봉 앞 갈림길이다. 오봉은 삼면(三面)에서 바라보아야 느낌이 온다. 우선 오봉 남쪽으로 짧게 벋어나간 능선으로 내려간다. 100m쯤 내려가면 오봉이 전망되면 몇 개의 지점이 있다. 흰 바위에 붉은 석양빛이 내린다. 잘 생긴 다섯 봉우리가 키 자랑을 한다. 젊은 날 우리 친구들이 자일을 들고 다니던 곳이다. 이제야 걷는 산객이 되었지만 매년 연초가 되면 이 능선에 와서 오봉을 바라보며 산신제를 지낸다. 올해도 즐거운 산행되게 하소서. 다시 돌아와 초소 앞 언덕 잠시 올라 첫 봉으로 오른다. 눈 아래로 오봉의 다섯 형제가 쪼르르 한 줄로 섰다. 위용보다는 친근감이 앞선다. 이제 하산이다. 여성봉(女性峰)까지는 1.3km의 흙길과 바위길이 섞인 길이다. 오르기도 가파르지만 내려가기도 가파른 구간이 있다. 그러나 아직 건강한 남성이라면 기꺼이 내려가시라. 천천히 30분 내려왔을까, 차마 얼굴 들고 바로 보기 쑥스럽구나. 다리 벌린 여성의 그 모습을 산신령께서 이 곳에 만들어 놓았다. 이름은 젊잖게 여성봉이라 했다. 짓궂은 이들은 노골적으로 그 이름을 부른다. 온 길을 되돌아보니 오봉의 뒷모습이 역력하다. 그런데 바람결에 들었는가 뒷눈질로 보았는가 여성봉을 바라보는 다섯 봉우리는 불끈 솟아올랐다. 자연에도 음양의 조화가 절묘하구나. 어둠이 내리는 여성봉길 1.8km 내려오니 송추 안쪽 마을길이다. 북한산 둘레길 송추구간과 만나는 곳이다. 이윽고 큰길로 나서면 버스정류장이다. 구파발, 불광동, 의정부행 버스노선이 많고 일산 지나 김포, 인천공항 방향 공항버스, 경기도 여러 곳을 도는 순환버스도 이곳을 지난다. 우리 젊은 날, 교외선 타야 올 수 있었던 송추는 어느덧 아파트 많은 대처로 변해 있었다.

교통편 1, 7호선 도봉산역 하차 걷기 코스 도봉산역 ~ 다락원터 표지석 ~ 안골마을 ~ 광륜사/도봉동문 각자 ~ 김수영 시비 ~ 영국사터(도봉원터)/도봉서원 ~ 서원교 갈림길에서 우측 능선 ~ 도봉대피소 ~ 천축사 ~ 마당바위 ~ 관음암 ~ 오봉 ~ 여성봉 ~ 송추 ※‘이야기가 있는 길’ 답사에 독자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매월 마지막 토요일에 함께 모여 서울 근교의 옛절터 탐방을 합니다. 3, 4시간 정도 등산과 걷기를 하며 선인들의 숨겨진 발자취와 미의식을 찾아가니, 참가할 분은 comtou@hanmail.net(조운조 총무)로 메일 보내 주시면 됩니다. - 이한성 동국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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