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53호 정의식⁄ 2013.11.18 11:38:01
1936년 탄생 이후 약 2250만대 이상의 판매고를 올리며, 전세계적으로 가장 많이 팔린 모델 중 하나인 비틀은 그 자체만으로도 자동차 산업의 발전사를 대변한다. 독일에서 아이들이 자동차를 그리는 것은 곧 비틀을 그리는 것을 의미했다. 과거 미국인들에게 폭스바겐을 산다는 것은 바로 비틀을 사는 것이었다. 또한 독일이 1950년대 경제적 부흥을 이룰 당시, 독일인들이 운전하는 것은 비틀을 운전하는 것이었으며, 유럽 사람들이 비틀을 선택하는 것은 ‘Made in Germany’를 선택하는 것을 상징했다. 비틀의 탄생에 아돌프 히틀러가 관여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얘기지만 전적으로 진실은 아니다. 히틀러가 집권하기 오래 전부터 페르디난드 포르쉐 박사는 합리적인 가격의 차를 대량 생산할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포르쉐 박사는 다임러에서 일하는 동안 개발한 경주차와 메르세데스 SSK 로드카로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지만, 다임러는 포르쉐와 달리 소형차 개발에 관심이 없었다. 때문에 포르쉐는 자신의 아이디어를 받아들여 대중적인 소형차를 개발할 회사를 물색했다. 모터사이클 제조사 ‘NSU’에서 포르쉐는 후방 장착형 공랭식 수평 4기통 엔진과 강철 바디를 가진 ‘타입 32’를 개발했다. 히틀러 도움으로 탄생한 비틀 1933년에 독일 수상이 된 아돌프 히틀러는 1934년 베를린 모터쇼에서 포르쉐 박사가 만들고 싶어하던 차의 개발을 촉진하는 연설을 했다. 곧이어 히틀러는 포르쉐 박사와의 만남을 가졌고, 곧바로 비틀 개발의 전반적인 윤곽이 그려졌다. 1938년 지금의 볼프스부르크에 비틀 생산 공장의 초석이 세워졌다.
히틀러는 이 차를 ‘KdF-Wagen’이라고 명명했는데, 이는 ‘즐거운 차를 통한 힘(Strength Through Joy Car)’이라는 뜻을 가진 나치운동 ‘Kraft durch Freude’의 앞 글자를 딴 것이다. 당연한 얘기지만 페르디난드 포르쉐 박사는 히틀러가 지은 이름을 싫어했고, 비공식 명칭 ‘폭스바겐’을 선호했다. 하지만 1938년 프로토타입이 도로를 달리고 있을 즈음 이미 대중들은 이 차를 딱정벌레를 닮았다며 ‘비틀’이라고 부르고 있었다. 포르쉐 박사의 첫 양산형 비틀 ‘타입 60’은 1939년 베를린 모터쇼에서 공개되었다. 차후의 모든 공랭식 비틀이 그러하듯 타입 60 또한 1.0리터 오버헤드 밸브와 주조 방식의 강철 팬 그리고 23.5 마력의 후방 장착된 수평 4기통 엔진를 장착했다. 타입 60은 4단 수동의 기어가 장착된 후륜구동 방식이었다. 브레이크 시스템은 기계식 드럼 방식이 장착되었다.
기본 구상은 평범한 독일인이 저축우표로 매주 5제국마르크를 내고 비틀을 구매할 수 있게 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전쟁으로 인해 개조된 경량 다용도 트럭이 더 많이 생산되었다. 전쟁 기간 중 실제 생산된 비틀은 총 643대(이중 13대는 카브리올레)에 불과했으며, 군용으로 개조된 차량은 약 6만4000대에 달했다. 패전 후 부흥과 국민차 폭스바겐 탄생 1945년 5월에 2차 대전이 종료되고 비틀은 역사 속으로 사라질 뻔했다. 공습으로 큰 피해를 받은 공장의 관리 역할을 맡은 영국군 장교 아이봔 허스트는 “나치 측이 폭파한 것 같았다”고 증언했다. 전후 혼란기 진주해 온 미국, 프랑스, 영국, 소련 등 연합군은 독일의 각종 공장과 자재를 수탈해 자국으로 가져가고 있었다. 그러나 매우 전위적인 디자인의 폭스바겐은 다행히 수탈을 피할 수 있었다. 점령국에서의 수탈 행위에 가장 적극적이었던 소련은 오펠 카데트를 가져가 국산화를 추진했지만, 영국과 미국의 자동차 업체들은 보수적인 디자인에 치우쳐 폭스바겐의 선진성을 이해하지 못했다. 영국 메이커 시찰단과 포드 자동차의 헨리 포드 2세는 폭스바겐을 검토한 후 특이한 디자인의 자동차라며 ‘무가치’하다고 판단했다. 덕분에 폭스바겐 공장은 연합군의 접수 대상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한편, 아이봔 허스트는 폭스바겐의 장래성을 믿고 남아있던 독일 노동자들과 힘을 합쳐 공장을 복구시키고 자동차 생산을 재개하기로 결정했다. 허스트는 영국군의 지프를 대체할 내구성이 높은 차량으로 폭스바겐 사용을 제안했으며, 1946 년 1만대의 ‘타입 1’이 생산되었다. 1947년 네덜란드로 해외 수출이 시작되었으며, 1949년에는 가장 큰 시장인 미국에 진출했다. 미국 시장에서 초기에는 고전했으나, 1959년에 대대적 광고를 전개한 결과 판매가 크게 향상되었다. 이후 타입 1은 기본적인 형태를 바꾸지 않은 채 1978년 1월 서독에서 생산이 중단될 때까지 1927만대가 생산되었고, 그 후 브라질과 멕시코 등의 공장에서 2002년까지 생산되었다. 1955년 누계 생산 100만대를 돌파했으며, 1964년에는 누계 생산 1000만대에 도달했다. 하지만 1960년대가 되자 오래된 디자인과 부족한 공간활용성, 엔진의 불안정성, 공냉 엔진의 소음 등의 문제가 제기되기 시작했다. 1974년 전륜 구동 방식의 대체 차량 ‘폭스바겐 골프’가 등장할 때까지 폭스바겐은 대체 차종 개발에 지속적으로 실패하며 경영난을 겪게 된다. 그런 와중에도 1972년 2월 17일 폭스바겐 비틀은 누계 생산 1500만7034대를 기록, 포드의 ‘모델 T(1908-1927)’가 가졌던 1500만7033대 생산 기록을 깼다. 2003년 7월 30일 멕시코 공장에서 ‘타입 1’의 마지막 차량이 완성됐다. 65년 제품 수명을 유지한 역사상 유일한 사륜 승용차 ‘폭스바겐 비틀’은 그렇게 사라지는 듯 했다.
1991년경 캘리포니아 시미 밸리 디자인 스튜디오의 매니저 제이 메이즈와 디자이너 프리만 토마스는 비틀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디자인 ‘컨셉 1’을 제작했다. ‘컨셉 1’은 1994년 디트로이트 오토쇼에서 큰 반향을 일으켰고, 폭스바겐은 새로운 비틀을 양산하기로 결정했다. 현대에 부활한 딱정벌레 ‘뉴 비틀’ 30년대의 감성, 오리지널 비틀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뉴 비틀’은 유럽뿐만 아니라 북미, 아시아에서 베스트셀러로 자리매김한 모델로, 트렌드 세터들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는 패션 아이콘이기도 하다. 뉴 비틀은 독특한 반원형의 디자인, 스티어링 휠 옆의 꽃병, 원형 헤드라이트 등 올드 비틀의 요소를 그대로 유지하면서도 더욱 깔끔하고 세련된 디자인으로 그 어떤 차보다 현대적이고 트렌디한 모습을 하고 있다. 스티어링 휠 옆에 위치한 작은 꽃병은 아기자기한 멋을 내고 싶어하는 여성 고객들이 좋아한다. 모든 뉴 비틀 시리즈에서 볼 수 있는 이 작은 꽃병은 시대를 초월하여 비틀의 감성을 이어나가는 코드로, 계절마다 다양한 매력이 담긴 꽃을 담을 수 있는 특별한 공간이다. - 정의식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