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미술이 탈장르와 융복합, 경계해체, 그리고 무엇보다 관객의 해석이 중요한 예술형식으로 인식되기 시작하면서 예술가에 대한 정의 역시 다변화 되었다. 특히 인스티튜션 크리틱의 중요성이 커지면서 물질적으로 무엇인가를 만드는 예술가의 작품과 상호 관계성에 기반을 두어 공간에 이야기를 만들어 내는 예술가의 표현형식 사이의 이질성은 점차 더 큰 차이를 보이기 시작한다. 눈에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물질성과 비물질성, 과거와 현재, 집단적인 기억과 개인의 기억, 자연과 인공적인 피조물 사이의 관계를 드러내고 있는 하원은 여러 면에서 후자에 해당하는 작가이다. 보여주기보다는 감춰내는 전략을 더 선호하고, 그래서 어떤 작품을 보여줄까의 문제보다는 어떤 해석을 유도할 수 있을까란 보다 근원적인 질문을 던진다. 평면, 조각, 설치, 영상 등 다양한 장르를 넘나들고 있는 작가 하원은 작은 오브제에 기반을 둔 작품 보다는 공간 전체를 활용하는 작품을 선호해왔다. 그래서 한 자리가 아닌 공간 속 여기저기를 걸어 다녀야 체득할 수 있는 건축적 개념 자체가 그녀의 중요한 작품 구성 요소이다.
무엇을 만들어 넣을까의 문제가 아닌 그 공간을 구석구석 걸어 다녀야만 알 수 있는 그녀의 예술형식은 실제로 그 시간, 그 공간을 체험하지 않으면 볼 수 없는 것들로 채워진다. 그런 이유로 절대성보다는 상대성이, 하나의 형식보다는 다음 형식으로 변화하는 과정이 하원 작품에서는 중요한 단서를 제공하는 키워드가 된다. 미적 대상, 예술 작품, 그리고 남겨진 여백과 배경까지, 하원의 공간개념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차이를 만들거나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고 있는 프레임(인식의 틀)을 관객들에게 제시한다.
그래서 그것을 어떻게 정의할까란 문제와 대면해야만 온전히 그녀의 작품에 다가갈 수 있다. 이는 관람의 대상을 넘어 관객의 입장에서 살펴보면 더 명확해진다. 예를 들어, 프레임 안에 있는가. 혹은 밖에 있는가의 개념적인 위치 변화가 결국 서로 다른 관점을 만들어내고, 이는 곧 해석의 차이로 이어진다. 그런 면에서 사람들이 경계를 인지하는 한 하원의 프레임은 어김없이 작동할 것이다. 이는 첨단 기술이 아닌 일상화된 기술을 활용하거나, 미니멀한 형식으로 담아낸 과거에 대한 오마주, 자연을 담아내고 있는 인공적인 빛 구조물 등이 만들어낸 의도된 그러나 모호해진 경계에서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다. 눈에 보이지 않았던 경계를 의도적으로 인지하게 만들기 위해 공간을 무엇으로 채울 것인가란 쉬운 길 대신, 어떤 경계선들과 그로인해 어떤 프레임을 제공할까를 고민한 결과이다. 보여주기보다 감춰내는 전략을 선호 비록 레이저 커팅과 현란한 LED 라이팅, 그리고 렌티큘러 기법을 활용하고 있지만, 하원이 드러내고 있는 경계선은 0과 1의 반복이 낳은 날카로운 디지털 감성과는 구별된다. 대신 밤과 낮 사이의 경계를 모호하게 만들어내는 새벽녘의 무뎌진 시간개념에서 비롯된 경계선에 가깝다. 그 무뎌진 경계를 기반으로 바라본 과거와 현재, 시간과 공간의 정의는 일상이 아닌 또 다른 공간과 시간으로 관객의 경험과 시점을 이동시키기에 충분하다. 인공 빛 속에서 자연의 파동을 감지하고 그 안에 유연한 역동적 움직임을 부여하고 있는 작가의 섬세한 감성은 일상의 공간, 제도화된 공간을 특별한 장소로 만들어 버린다.
이는 공간(space)이 소유한 시간이 아닌 시간의 변화가 창조한 공간 즉 내러티브가 살아있는 공간의 탄생을 의미한다. 오브제로 가득 채우거나, 벽면에 텍스트로 도배해서 읽어낼 수 있는 이지적인 내러티브로는 얻을 수 없는 숭고함을 하원의 설치 작품 속에서 어렵지 않게 경험할 수 있다. 물질을 다루고 있지만 물성에 갇히지 않고, 인공 빛을 다루고 있지만 그것의 사회적 정의에 갇히지 않을 수 있었던 이유는 단순히 기술적인 측면을 넘어, 빛, 물, 물결, 사람, 그리고 그것들이 만들어내는 다양한 함수관계까지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는 작가의 논리에서 비롯된다. 하원은 그녀 스스로 만들어 놓은 프레임과 경계의 논리가 어떤 해석과 차이를 만들어 낼지 예측하는 힘이 강하다. 프레임이 있어 예술작품과 아닌 것 사이의 경계가 더 명확해졌듯이, 예술작품과 공간, 관객과 작품의 상호작용, 이미지와 구조물 사이의 경계를 많이 발견한다는 것은 그 만큼 많은 의미와 형식은 공간 속에 부여할 수 있다는 의미이다. 공간이 특별한 장소로 기억되기 위해서는 시간과 기억이 공간의 형상을 지배할 수 있어야 한다. 하원의 내러티브 스페이스가 특별한 이유도 같은 맥락에서 기억해야 한다. 한편 15회째 개인전 The Wave of Light 를 11월 15일부터 12월 20일까지 부산시 해운대구 갤러리 폼에서 진행하는 하원(42) 작가는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서양화과 및 동대학원 서양화전공 졸업하고 현재 울산대학교 미술대학 서양화과 교수로 재직중이다. 하원의 작품은 영국 대영박물관, 미국 호놀룰루 아카데미 오브 아트, 포항시립미술관 등에 소장되어 있다. - 글·이대형 아트 디렉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