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59호 이한성 동국대 교수⁄ 2013.12.31 18:53:11
한 해가 가고 새 해가 다가온다. 뜨는 해(日)는 그 해(日)이지만 한 해(年)를 보내고 새 해(年) 아침 맞는 해(日)는 느낌이 새롭다. 나이가 들어갈수록 그 날이 그 날 같은 삶이 이어진다. 어릴 적 새해가 되면 가슴 설레며 준비하던 일기장도 이제는 없다. 변함없는 일상(日常)이 이어진다. 이럴 때 일상에 묻혀 사는 삶은 무미하다. 의도적으로라도 작은 이벤트를 만들며 사는 삶은 활기를 불어넣는다.
한 해가 가는 12월 말이 되면 해넘이를 가 보자. 새해 첫 새벽에는 해맞이를 가 보자. 굳이 멀리 가지 않아도 사는 곳 근처에 작은 산이라도 오르면 붉게 지고 더 붉게 떠오르는 해를 볼 수 있다.
오늘은 잊혀진 땅 교하(交河)로 간다. 옛 이름은 교하현(交河縣) 또는 교하군(交河郡)이었으나 이제는 파주시의 한 부분이 되었다. 자유로를 타고 가다 보면 일산신도시를 지나는데 지금 일산대교가 있는 자리에는 배꽃이 아름답게 피던 포구 이산포(梨山浦)가 있었다. 이곳에서부터 오두산 통일전망대까지 자유로길의 동쪽, 파주목(坡州牧) 경계까지가 교하(交河) 땅이었다. 경의선은 교하 땅을 거쳐 평양, 의주를 지나 만주 안동(安東 지금의 단동)으로 이어지는 철도였던 것이다.
공덕역으로 가 이제는 전철화가 된 경의선을 탄다. 공덕역에는 문산행 경의선 전철이 수시로 있다. 열차는 홍대역과 디지털미디어시티역을 지나 3호선 환승역 대곡을 지나면서 일산신도시 지역으로 지나간다. 잠시 후 금촌을 거쳐 문산까지 이어진다. 차역은 금촌역이다. 길 건너 버스정류장에서 900번 시내버스로 환승한다. 3호선 종점역인 대화역에서 출발한 버스이다. 버스는 옛 교하땅을 지나 헤이리 예술인마을을 경유하여 성동리 통일동산까지 운행한다. 우선 헤이리마을에서 하차하자.
90년대에 통일동산이 개발되면서 자리잡은 헤이리는 예술인들이 모여 사는 공동체마을인데 자신들의 창작활동과 전시공간, 발표공간이 있고 공연(소극장), 강좌, 체험프로그램, 갤러리, 박물관, 서점, 카페, 레스토랑이 있어 방문하는 이들에게는 불편함 없는 공간이기도 하다. 필자도 가끔은 들려 커피도 한 잔 마시고 괜찮은 책을 할인 받아 사기도 하는 재미를 느끼는 곳이다. 이곳으로 오는 직통버스를 타려면 합정역 2번 출구에서 2200번 버스를 이용하는 것도 무난하다.
삼국시대 흥망성쇠 간직한 불당골 주변엔 천년 유물
이 인접지역의 옛 지명이 불당골이다. 어딘가에 옛 절터가 있었을 것이다. 이제는 아무 흔적도 찾을 수가 없다. 90년대 통일동산을 개발하면서 세차게 이 지역 법흥리와 성동리를 파헤쳤는데 그 시절의 신문기사를 돌아보면 충분한 조사를 거치지 못하고 개발된 지역이 많다고 한다. 이 지역은 백제의 옛 땅이었다가 고구려의 땅이 되고 이윽고 신라가 차지한 땅이다.
그나마 옆 동네 성동리(산 65번지)에 6세기 말~7세기 초의 것으로 보이는 백제계의 신라 고분들이 발굴되어 보존될 수 있었던 것은 다행스러운 일이다. 그 석실분, 석곽분들에서는 금동관편(金銅冠片), 금동귀고리, 장신구 등이 발견되어 이 지역을 다스리던 통치자의 무덤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복원하여 작은 공원을 조성해 놓았으니 그나마 다행스럽다. 그러나 백제의 옛 성(城)을 비롯한 관방시설은 거의 남아 있는 것이 없어 아쉬울 뿐이다.
다시 900번 버스를 타고 종점인 오두산(鰲頭山, 烏頭山, 烏島山 119m) 전망대 입구로 간다. 이곳에는 오두산 전망대까지 왕복하는 셔틀버스가 운행되고 있다. 걷기로 한 날이라 눈 쌓인 길을 따라 오두산으로 오른다. 아무도 없는 도로에 내 발자국이 길을 낸다. 추운 날씨에 눈까지 쌓였으니 도로는 내 차지가 되었다. 옆 산길에 등산안내리본이 많이 매달려 있다. 이 산길로 내려와 오두산으로 향한 이들의 흔적이다. 왜 이 산길을 내려 온 것일까?
영조 때 학자 여암 신경준(旅庵 申景濬) 선생은 우리나라 산족보를 정리하여 산경표(山經表)라는 책을 묶었다. 여기에는 백두대간, 장백정간을 비롯하여 백두대간에서 갈려져 나온 산줄기인 13정맥(正脈)을 기록하였는데 그 중 한 산줄기가 한강 북쪽을 이어가는 산줄기로 이른바 한북정맥이다.
여암 선생은 한북정맥의 마지막 부분을 한강봉~사패산~도봉산~상장봉~노고산~현달산~고봉산~장명산으로 하여 끝을 맺었다.
그런데 2004년에 아마추어 산악인 박성태씨가 신산경표를 발표하여 한북정맥은 장명산에서 끝나는 산길로 갈 것이 아니라 오두산에서 끝나는 산길로 가는 것이 타당하다는 주장을 하게 되었다. 즉, 한강봉~ 앵무봉~ 박달산~ 월롱산~ 보현산~ 오두산을 잇는 산길이다. 요즈음은 이 산길을 걷는 이들도 많이 나타났다. 여암 선생의 산경표를 따르는 이들은 이 길을 오두지맥이라 부른다. 그래서 요즈음은 여암 선생의 길을 걷는 이들도 모름지기 한 번 걷는 산길이 되었다.
이윽고 오두산 통일전망대에 닿는다. 한강과 임진강은 오두산 모퉁이에서 만나 흘러 조강(祖江)이 되고 강화의 북쪽을 지나 서해로 빠져 나간다.
세종실록지리지에서는 이 물길을 자세히 설명해 놓았다.
“강물이 도성 남쪽을 지나 금천 북쪽에 이르러 양화나루가 되고, 양천 북쪽에서 공암나루가 되며, 교하(交河) 서쪽 오도성(烏島城)에 이르러 임진강(臨津江)과 합하고, 통진 북쪽에 이르러 조강(祖江)이 된다 (水經都城南, 至衿川北爲楊花渡, 陽川北爲孔岩津, 至交河西烏島城, 與臨津合, 至通津北爲祖江)”.
동국여지승람에서는 “오도성산(烏島城山)은 현 서쪽 7리에 있다(在縣西七里)” 하면서 한록산(漢麓山)을 소개하고 있다. “현 서쪽 7리에 있는데 고석성터가 있고 둘레가 1리쯤이다(古石城基周一里許)”라 하였다. 그렇다면 지금 통일전망대가 있는 오두산은 북쪽을 오도성산 남쪽을 한록산이라 불렀다는 이야기가 된다.
교하읍지에는 “오두산은 검단산 서쪽 산록인데 일명 구도산(鳩島山)이며 임진강과 한강이 이 산 앞에서 합친다(在黔丹山西麓 一名鳩島山 臨津漢江流合于山前)”하면서 그 형승이 ‘중원의 금릉(中原之金陵)’이라 하였다. 과연 그 말대로 이곳에서 바라보는 산하는 아름답기 그지없다. 이제는 갈 수 없는 북녘땅이 지척이니 아름다운 만큼 스산하구나.
‘관미성은 오두산성‘ 김정호의 대동지지 현장에는…
전망대에서 잠시 내려오면 남쪽 봉우리(평탄지) 측면에 석성(石城)의 일부구간이 남아 있다. 백제가 쌓은 성이다. 발굴결과 둘레 1228m의 테뫼식산성(산 봉우리를 중심으로 둘러쌓은 성)임이 밝혀졌다. 동국여지승람 고적조에는 “돌로 쌓았는데 둘레가 2071척(石築周二千七十一尺)”이라 했으니 이 때까지도 성이 큰 훼손없이 남아 있었을 것이다.
그 후 교하읍지에는 “둘레가 4000여 보인데 지금은 훼손되었다(周四千餘步今毁)”고 기록하였다. 조선 후기에는 많이 훼손되었고 한국전쟁을 거치고 군대가 주둔하면서 백제의 고성은 이제 몇 개의 돌로 남았다.
과연 이 성에서는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 광개토대왕 1년(391년)조에는 관심을 끌 만한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동절기 10월에 백제 관미성을 공격하였는데 그 지역은 사방이 웅크린 듯 절벽으로 바다가 감쌌다. 왕께서 군대를 일곱 길로 나누어 20일을 공격하여 이내 함락시켰다(冬十月 攻陷百濟關彌城 其域四而蛸絶 海水環繞 王分軍七道攻擊二十日乃拔)”
한편 패자인 백제본기 기록도 이 일을 빼놓지 않았다. 진사왕 8년(일본서기에는 진사왕이 재위 7년에 서거했다는 기록이 있으니 비교 연구가 필요한 내용이다) 기록에 “고구려왕 담덕이 병사 4만을 거느리고 와서 북쪽 변경을 쳐 석현 등 10여 성을 함락시켰다(高句麗王談德(광개토대왕)帥兵四萬 來攻北鄙 陷石峴等十餘城).
이 내용은 만주 집안에 서 있는 호태왕비(광개토대왕비)에도 기록되어 있다.
“백잔(百殘 백제)과 신라(新羅)는 옛날부터 우리의 속민으로 조공을 바쳐 왔다. 그런데 왜가 신묘년(辛卯年 : 391년)에 바다를 건너 왔기에 백잔(백제)과 신라를 쳐 신민(臣民)으로 삼았다.
6년(396년) 병신년에는 왕(광개토왕)이 몸소 수군(水軍)을 이끌고 백제를 토벌하였다. 군이 과남에 이르러 영팔성(寧八城), 구모로성, 각모로성, 간지리성), □□성, 각미성(閣彌城)..... 을 공취하였다. (百殘新羅,舊是屬民 由來朝貢.而倭以辛卯年,來渡□破百殘□□[新]羅以爲臣民. 以六年丙申, 王躬率□軍, 討伐殘國 軍至窠南, 攻取壹八城, 臼模盧城, 各模盧城, 干氐利城, □□城, 各彌城 ......).
삼국사기에는 이 때 탈취한 성이 58개라고 기록하였다.
여기에서 언급한 관미성(또는 각미성)은 어디에 있었던 성이었을까? 강화도설, 교동도 화개산성설, 예성강설, 오두산성설 등 의견은 분분하다. 이에 대해 고산자 김정호 선생은 1864년 발행한 대동지지(大東地誌)에서 관미성을 오두산성이라고 기록하고 있다(臨津漢水交合處 本百濟關彌城).
이렇게 단정한 근거는 어디에 있는 것일까? 모르긴 몰라도 이때까지는 아마도 오두산성을 관미성으로 기록할 수 있는 자료가 있었을 것이다. 필자도 김정호 선생의 오두산성설에 한 표 던지는 사람이다. 오두산성을 비롯한 한강 수계의 방어선이 무너지자 드디어 장수왕 때에 하남 위례성이 고구려에게 함락되었다. 이 때 21대 개로왕은 고구려군의 포로가 되어 아차산성으로 끌려가 죽임을 당하는 비극으로 이어졌으니 한강 수계의 전초기지인 오두산성을 관미성으로 주장할 수 있는 개연성은 충분하다 할 것이다.
오두산성을 내려온다. 앞 쪽으로는 눈 속에 고려통일대전(高麗統一大殿)의 웅장한 건물이 건너다보인다. 국비, 도비, 민간자본 160여 억원이 투입된 큰 사업이다. 고려 34분 임금의 위패와 충신들을 봉안할 것이라 한다. 명실공이 고려의 종묘(宗廟)인 것이다. 아직은 문을 열지 않았으니 내년을 기약해야 할 것 같다.
국가대표 축구 트레이닝 센터 옆 장준하공원
큰 길로 내려와 우측(남쪽)으로 향하면 잠시 후 축구대표팀의 연습장인 국가대표 트레이닝센터를 만난다. 공기도 맑고 공간도 시원하니 2014년 브라질 월드컵에서는 8강에 들기를 기원해 본다.
트레이닝센터 옆으로는 장준하공원이 자리 잡고 있다. 임시정부에서 활약하고 자유당 독재, 박정희 군사정권의 독재에 맞서 유신헌법 반대와 사상계를 통해 사자후를 토해낸 선생을 기리는 소공원이다. 무슨 연고로 선생을 기리는 공원이 이곳에 자리 잡은 것일까?
1975년 8월 17일 파주 광탄에 있는 약사봉에서 유신정권 최대의 눈엣가시인 장준하 선생이 의문의 죽음을 당하였다. 당시 많은 의문이 제기되었으나 사인은 실족에 의한 추락사로 결론지어졌다. 38년이 지난 금년 3월 선생의 묘소를 이장하는 과정에서 유골에 대한 재검사가 이루어졌다. 두개골에 돌멩이나 아령 같은 둔탁한 물건에 의해 발생된 것으로 추정되는 7cm의 두개골 함몰 부위가 생생하게 드러난 것이다. 그것이 추락에 의한 것인지 타격에 의한 함몰인지는 분명하지 않으나 법의학 전문가인 L교수는 추락에 의한 사인에 의문점을 던지고 있다.
결국 이 일은 최대의 미스터리로 남게 되었고 연고지 없는 파주 광탄에서 운명한 선생을 기리기 위해 파주 지역인 이곳에 선생을 기억하는 공원이 만들어졌다. 아~ 다시는 이런 어두운 시절은 없어야 한다.
길 따라 잠시 내려오면 아담한 검단산(黔丹山, 152m)으로 오르는 길이 나타나는데 동안거(冬安居)를 알리는 검단사(黔丹寺)의 플랜카드가 길손을 맞는다. 검단사, 아담하고 고요한 절이다. 동국여지승람이나 교하현읍지에는 단순히 ‘검단산에 있다(在黔丹山)’고 기록하였을 뿐 달리 이 절의 내력을 알 길이 없다. 다행히 전등사 본사와 말사를 기록한 전등본말사지(傳燈本末寺誌)에는 검단사지(黔丹寺誌)가 포함되어 있다.
거기에는 검단사의 창건 내력이 전설로 기록되어 있다.
“신라 문성왕 9년(847년) 정묘년에 검단(黔丹 ; 즉 진감국사眞鑑國師 혜조慧照인데 그 모양이 검어서 혹자는 이르기를 흑두타黑頭陀라 한다)선사가 시자(侍者)에게 명하여 개산(開山 산에 절을 창건하는 일)하고 그 별호로 절 이름을 삼았다. 조선 영종(英宗: 후에 英祖로 바뀜) 신해년(영조 7년, 1731년)에 조정에서 인조 및 인열왕후릉을 파주 임진면 운천리(臨津面 雲泉里)에서 현 갈현리(葛峴里)로 옮길 때 검단사도 이 자리로 옮겼다고 전한다.”
검단사는 본래 이곳에서 동쪽으로 약 3km 떨어져 있던 갈현리에 있었던 것이다. 인조 내외의 능 장릉(長陵)은 임진면 운천리에 있었는데 뱀과 전갈이 나타나자 불길하다 하여 검단산 동쪽 갈현리로 옮기게 되었다. 이곳에는 본래 읍치가 자리하고 있었고 향교와 검단사도 자리잡고 있었는데 장릉이 옮겨 오면서 모두 이전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인조는 한강 너머 계양산을 조산(朝山)으로 부친 정원군과 모친 인헌왕후 구씨가 잠들어 있는 김포 장릉(章陵)을 바라보는 위치에 잠들어 있다.
한편 지금 세곡동에 자리잡고 있는 순조의 능 인능도 22년 간 이곳 검단산 동녘 장릉(長陵) 좌측에 잠들어 있었다. 그러다가 안동 김씨와 풍양조씨의 세력 다툼의 결과로 철종 7년(1856년) 지금의 세곡동 헌릉 곁으로 천장해 갔다. 그러니 검단산은 산은 자그마하되 그 품은 가히 임금 둘 정도는 품을 만한 산인 것이다.
지금 장릉은 미개방 왕릉이다. 직접 능역(陵域)에 포함되지 않았다면 검단사의 옛터는 장릉 숲 어딘가에 흔적이 남아 있을 것이다. 검단사의 옛터 찾는 일은 일단 뒤로 미루고 법당으로 들어간다. 도문화재자료로 지정되어 있는 목조관음보살이 정좌해 계신다. 벽에는 후불탱화(後佛幀畵)도 걸려 있다.
임금 둘 정도는 품을 검단산, 신비의 검단사 창건
검단사지에는 귀중품 목록도 기재되어 있다. 관음보살 1, 후불탱 1, 신중탱 1, 영정 1, 산신탱 1, 법화경 2. 이 중 얼마나 남아 있는 것일까?
법당문을 나서니 동안거 중인 스님이 눈치우는 울력(運力)을 하러 나오신다. 좀 거들어야 하건만 시간이 없다는 핑계로 귀동냥만 하고 검단산을 오른다. 이제는 이 절이 전등사 말사가 아니라 봉선사 말사가 되었다 한다. 그래서 그런가, 본사(本寺)를 따라 주련도 한글로 달아 놓았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검단산봉수가 기록되어 있다. “서쪽으로는 풍덕군 덕적산에 응하고 남쪽으로는 고양군 고봉성산에 응한다(西應豊德郡德積山 南應高陽郡高峰城山)”고 했다. 이 봉수라인은 의주에서 해안을 따라 이곳에 이르고 고봉성산과 무악서봉을 거쳐 한양의 목멱산으로 연결되던 제4봉수 라인이었다. 이제는 모두 파괴되어 연조의 흔적은 찾을 수 없다.
대동여지도와 증보문헌비고에는 검단산봉수의 이름이 형제봉봉수(兄弟峰烽燧)로 바뀌어 있다. 검단산은 서쪽과 동북쪽으로 두 개의 봉우리가 있으니 훗날 형제봉으로 불렀던 것 같다.
강 너머로 해가 기운다. 구름 사이로 햇빛이 햇살을 펼친다. 잠시 후 해가 질 것이다. 한강 줄기를 따라 교하(交河)의 들판이 펼쳐져 있다. 최창조 교수는 통일한국의 수도로 이곳 교하를 추천하였다. 그렇다, 한강과 임진이 만나고 슬그머니 공릉천도 끼어들어 어울리는 땅 교하, 통일국가의 수도는 모름지기 어울리는 땅이어야 할 것이다.
일찍이 광해군 때도 이곳 교하로 수도를 옮겨야 한다는 주장이 있었다. 술관 이의신이 상소를 올려 도성의 흥왕한 기운이 이미 쇠하였으니 마땅히 수도를 교하현에 건설해야 한다(術官李懿信上疏言: “都城旺氣已衰, 宜建都於交河縣)는 주장하였다. (1612년 광해군 4년 11월)
이에 이정귀가 한사코 반대하는 기사가 실록에 실려 있다. 광해군은 이에 마음이 끌려 교하를 답사시키기도 했으며 4년이 지난 1616년까지도 천도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있었다. 교하, 언젠가 크게 쓰였으면 좋겠다.
산길을 걸어 동봉(東峰)으로 내려간다. 서설이 발목까지 쌓였다. 이제 금촌으로 나가 육개장 한 그릇 해 볼거나.
교통편
1) 경의선 금촌역 하차~ 길건너 900번 버스 환승
2) 합정역 2번 출구 2200 번 버스
걷기 코스
해이리~(버스로) ~ 통일동산 승차장 ~ 오두산 ~ 장준하공원 ~ 검단사 ~ 검단산정상 ~ 동봉 ~ 정류장(유승A 109동 건너편)
※‘이야기가 있는 길’ 답사에 독자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매월 마지막 토요일에 함께 모여 서울 근교의 옛절터 탐방을 합니다. 3, 4시간 정도 등산과 걷기를 하며 선인들의 숨겨진 발자취와 미의식을 찾아가니, 참가할 분은 comtou@hanmail.net(조운조 총무)로 메일 보내 주시면 됩니다.
- 이한성 동국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