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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지에서 맞수로…서청원-이재오의 정치역정

이명박-박근혜가 갈라놓은 친이 좌장과 친박 맏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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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nbnews 제361호 정찬대 기자⁄ 2014.01.13 14:42:55

▲지난 8일 국회에서 열린 새누리당 최고중진연석회의에서 이재오 의원(오른쪽)과 서청원 의원이 개헌 문제를 놓고 정면으로 충돌했다. 사진 = 연합뉴스

새누리당 내 양대 축이 맞붙었다. 친이(친이명박)계 좌장인 이재오 의원과 친박(친박근혜)계 원로인 서청원 의원의 ‘개헌 논쟁’을 두고 하는 말이다. 두 사람의 설전은 ‘과거 권력’과 ‘현재 권력’이 맞붙었다는 점에서 정치권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특히, 박근혜 정권 1년차를 숨죽여 바라보던 친이계가 6월 지방선거를 앞두고 목소리를 키우며 전열을 재정비하기 위한 시점에 터진 서 의원의 ‘이재오 견제’는 정치 공학적 측면에서 다양한 해석을 낳아 흥미로움을 더한다.

개헌 논쟁으로 정면으로 부딪힌 두 사람의 인연도 새삼 화제를 모은다. 정치권의 양대 거물인 이 둘은 중앙대 동문으로 끈끈한 정치적 동지관계에서 출발했다. 과거 YS(김영삼 전 대통령) 상도동계의 핵심으로 활동하며 두터운 친분을 유지하기도 했다.

하지만 두 사람은 박근혜와 이명박을 각각 선택함으로써 정치적 노선을 달리했고, 이후 한쪽은 친박계 맏형을, 또 다른 한쪽은 친이계 좌장을 맡으며 대척점에 섰다. 결코 화합할 수 없는 상극에 놓인 셈이다.

개헌론으로 맞붙은 두 수장

지난 9일 이 의원은 자신의 트위터를 통해 중국 법가의 고서인 ‘한비자’ 10과편의 고사를 인용, “行小忠 則大忠之賊也(행소충 즉대충지적야)”라고 적었다. 이는 ‘작은 충성을 하는 것이 곧 큰 충성의 적이 된다’는 뜻으로 과거부터 주군의 입맛에만 맞는 말이나 행동을 하는 부하가 오히려 독(毒)이 될 수 있다는 의미로 쓰여 왔다.

선문답과 같은 이 글을 놓고 당내에선 여러 정치적 해석이 나온다. 특히 전날 이 의원과 서 의원이 ‘개헌론’을 놓고 적잖은 언쟁을 벌였다는 점에서 친박계 좌장 서 의원을 직접 겨냥했다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이에 앞선 8일 국회에서 열린 새누리당 최고중진연석회의는 일촉즉발의 긴장감에 휩싸였다. ‘개헌 전도사’로 통하는 이 의원이 박근혜 대통령의 개헌 불가론을 정면으로 반박하며 개헌 필요성을 언급하자, 박 대통령 지원에 나선 서 의원이 이 의원 면전에 두고 “무슨 개헌이냐”고 언성을 높이면서 분위기는 험악해졌다.

이날 회의에서 이 의원은 “국민 75%가 개헌해야 한다고 응답했고, 박 대통령은 대선후보 시절 이를 공약으로 내걸었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국민 의견을 따라가는 것이 소통이며, 이에 반대하는 것은 불통”이라고 박 대통령을 강하게 질타했다.

이후 마이크를 넘겨받은 서 의원은 발끈했다. 그는 “분명 기억한다. 이명박 정권 때 개헌하겠다고 특위 만들고, 이 의원은 정권 2인자라 할 만큼 힘이 있었지만 당시 이를 추진하지 못했다”며 이 의원의 아킬레스건을 건들었다. 회의 내내 두 사람의 얼굴은 붉으락푸르락을 반복했다.

박 대통령은 신년 기자회견에서 개헌론과 관련 “개헌 논쟁을 하면서 국력을 낭비하는 것이 안타깝다”고 밝혔다. 개헌 반대 입장을 분명히 해둔 터라 두 사람의 언쟁은 그들이 서 있는 위치를 잘 말해준다.

중앙대 선후배에서 상도동계 선후배로

서 의원과 이 의원은 중앙대 2년 선후배 사이로 잘 알려져 있다. 서 의원은 중앙대 총학생회장 시절 박정희 정권의 한일회담에 반대하는 6·3항쟁을 주도해 투옥됐고, 이 의원은 중앙대 한일회담 반대 구국투쟁위원장으로 시위를 주도해 제적됐다. 

학창시절 이후에도 두 사람은 끈끈한 동지애를 이어갔다. 특히, YS키즈로 불리며 상도동계를 이끌어온 이들은 범민주계로 분류되며 김영삼 정부의 개혁을 뒷받침했다. 두 사람의 정치적 유대관계는 1996년 이 의원이 국회에 첫 등원하면서 절정에 이른다.

제도권 정치에 먼저 발을 디딘 서 의원은 이 의원의 정치적 성장을 도왔고, 이 의원은 서 의원의 정치적으로 발돋음 할 수 있도록 힘을 보탰다. 상호 간의 조력자 역할을 한 셈이다.

두 사람은 1997년 대선을 앞두고 한나라당 이회창 대표에 맞서 정치발전협의회를 함께 주도하며 반 이회창 전선을 구축했다. 당내 경선 당시 ‘이수성 대통령 만들기’ 일환으로 두 사람이 뭉쳤고, 서 의원은 이수성 캠프의 경선대책본부장을, 이 의원은 대변인을 맡으며 호흡을 맞추기도 했다.

이명박-박근혜가 갈라놓은 이재오-서청원

정치적 유대관계를 이어온 두 사람은 2005년 중앙대 총동문회장 선거에서 서 의원이 유용태 전 의원을 추천하고 이 의원에게 이를 양보할 것을 제의했지만, 이 의원이 출마를 강행하면서 서먹해졌다.

특히, 2007년 한나라당 대선후보 경선 당시 서 의원과 이 의원이 각각 박근혜 후보와 이명박 후보를 진두지휘하면서 두 사람은 정치적으로 갈라섰다. 서 의원은 박근혜 캠프에서 이명박 후보의 도곡동 땅 의혹을 집중 제기하며 창을 빼들었고, 이 의원은 이명박 캠프에서 수비수 역할을 맡으며 대립했다.

박근혜 후보가 경선패배를 인정했지만 캠프에선 여전히 갑론을박이 이어졌고, 그런 사이 갈등은 더욱 깊어졌다. 이명박 후보가 확정된 이후에도 계속된 당내 불협화음에 이 의원은 “이 후보를 인정하지 않는 세력이 있는데, 결코 좌시하지 않겠다. 아직도 경선인줄 아느냐”고 언성을 높이며 탁자를 내리친 일화는 유명하다. 이는 박근혜 캠프 좌장인 서 의원에게 보내는 일종의 경고 메시지로 양측 간 갈등의 깊이를 말해준다.

친이계의 ‘공천학살’…朴 정권 ‘전세역전’

서 의원과 이 의원이 각각 박근혜와 이명박을 택하며 정치적 노선을 달리했지만, 이러한 갈등이 감정으로 치달은 것은 18대 총선을 앞두고 일어났다. 바로 당권을 휘어잡은 친이계가 친박계에 대한 대대적인 공천학살을 단행한 것이다. 이러한 기류는 이명박 정부 내내 지속됐다. 

2008년 18대 총선에서 친이계에 밀린 친박계가 줄줄이 공천에 탈락했고, 서 의원은 이에 반발, 탈당 후 ‘친박연대’를 결성했다. ‘친박연대’는 일각의 우려에도 불구하고 서 의원을 포함해 14석을 얻으며 원내 제4당으로 우뚝 서면서 정치적 약진을 거뒀다.

그러나 서 의원은 공천헌금 파문으로 이내 의원직을 상실했고, 실형을 선고받으면서 수감됐다. 이후 지난 2010년 출소했지만 18대 내내 야인으로 전전해야만 했다.

두 사람의 전세는 박근혜 정부 들어서면서 완전히 역전됐다. 서 의원은 지난해 1월 사면 복권됐고, 박심(朴心)을 등에 업은 그는 10월 재보선에서 전략공천을 받아 19대 국회 입성에 성공했다.

재보선을 한 달여 앞둔 지난해 9월 서 의원과 이 의원이 오랜만에 조우했다. 서 의원은 이 자리에서 “당에서 친박만 움직이고 친이는 숨죽이고 있는데 친이가 활발하게 활동하게 해주겠다”고 했고, 이에 이 의원은 “형님이 들어와서 역할을 해주셔야겠다”고 말한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왕의 남자’ 이재오와 ‘박의 남자’ 서청원은 친이-친박 간 정치적 노선 차이를 풀지 못한 채 서로를 견제하며 여전히 대척점에 서있다. 

- 정찬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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